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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89)화 (88/135)

89화

율리키안은 매디가 알려 준 주소와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빠르게 말을 달렸다.

중간부터는 길이 좁아져 말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착해서 문을 열어젖히자 예상외로 시커먼 복도가 나타났다.

당황도 잠시, 복도 끝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을 발견했다.

작은 빛에 익숙해지고 나니 복도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짧은 복도였다.

율리키안은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 다시 한번 문을 열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아스트리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얌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율리키안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 예상한 시간보다 데리러 오는 사람이 늦어지자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율리키안은 제게 뛰어오는 아스트리드를 보며 한쪽 무릎을 꿇어 주었다.

아스트리드가 품으로 쏙 들어왔다.

율리키안은 뛰어온 탓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천천히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외삼촌 왔잖아.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집에 가자. 아스트리드.”

할딱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스트리드를 안아 달래던 율리키안은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숨을 멈췄다.

아스트리드의 등을 다독이던 손이 허공에 굳어 버렸다.

이곳, 녹스가 사는 집은 아스트리드를 맡긴 이후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문으로는 출입했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벽장을 열어도 다른 방이 나오고, 서랍을 밀어도 다른 방이 나오는 집.

게다가 방금 전 율리키안이 열고 들어온 문은 옷장이었다.

………온 집이 미로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왜 매디는 늘 가던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주소와 지도를 알려 준 거지?

아직도 저를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뭔가는 알려 주려고?

매디의 주소대로 갔을 때 제일 처음 맞닥뜨린 건물은 한 블록 더 지나서 있는 약간 더 넓은 골목의 안쪽 집이었다.

율리키안은 아스트리드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만, 아스트리드. 외삼촌이 확인할 게 있어서.”

그동안 매디가 했던 말, 그녀와 했던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엉겼다.

[여기 집주인은 따로 있어요. 레이디 알마라고, 늙은 과부인데 돈 많아요.]

[아이고, 내 돈 주고 산 내 집의 내 싱크대에 쏟아지는 술!]

[레이디 알마의 집도 몇 채 밀리겠네요.]

[……3구역에도 레이디 알마의 집이 있어?]

[그럼.]

[잠깐만. 몇 채라고? 알마의 이름으로 집이 몇 채나 있는 건데?]

[꽤?]

바로 몇 시간 전, 필립과 나눴던 대화도 스쳐 지나갔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매디를 믿습니다. 그 아가씨가 돈을 노리고 대공님께 접근한 게 아니라고요.]

율리키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악몽이라도 꿨다가 갓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

천장의 나무 이음새가 들려 있는 부분도 보이고, 바닥 마루 색이 다른 곳도 있었다.

전이었으면 빈민촌에 있는 집이니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이 공간 너머에 숨겨진 곳들을 알고 있어서 그리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율리키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의 모든 벽을 구석구석 주먹으로 노크하듯 두드렸다.

반대편 공간에서는 텅텅 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벽장과 서랍, 옷장 너머의 공간처럼 온 집이 다른 공간으로 이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밖에서 보이는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집 안쪽에는 더 많은 공간들이 존재한다.

‘왜? 심부름 업자, 기껏해야 사기꾼이 비밀 사무실을 몇 개나 만들고, 건물을 살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나? 분장을 하는 곳이라면 이미 저번에 봤는데. 그것 말고도 다른 공간이 더 있을 필요가 있나? 고객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하나의 사무실이면 충분할 텐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아스트리드, 삼촌 금방 올게. 잠깐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아스트리드를 안아 올려 침대에 앉힌 율리키안은 무언가에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간 율리키안은 녹스의 집뿐 아니라 이 골목 라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건물을 돌아다니며 훑어봤다.

불이 꺼져 있거나, 창문이 깨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커튼이 내려와 안을 전혀 볼 수 없는 곳이 더 많았다.

그런 주제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모두 다 빈집이다.

심지어 여기가 끝이 아닐 것이다.

그날 매디와 함께 확인했던 재개발 지역에서 이쪽 라인은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필립 말이 맞았다.

매디는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게 아니다.

돈이라면 이미 충분히 있으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매디는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거다.

뭐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율리키안은 골목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제일 처음 매디가 가르쳐 줬던 지도의 입구로 향했다.

다시 한번 그 컴컴한 복도를 살핀 후 그쪽의 벽도 두드려 볼 예정이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아까는 마음이 급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복도 중간의 벽 틈새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율리키안은 마른침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벽인 줄 알았던 공간이 또 다른 비밀을 내보였다.

전에 갔던 것처럼 긴 복도도 없었고, 여러 개의 문도 없었다.

녹스의 집처럼 따듯한 공기가 흐르지도 않고, 그 어떤 가구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검고 축축한 네 개의 벽.

그게 다였다.

그대로 돌아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질감이 느껴져 다시 돌아봤다.

율리키안은 천천히 벽을 향해 걸어가 등불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벽 전체가 시커먼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색의 벽지가 붙어 있는 방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작은 글자들로 빈틈없이 4면을 가득 채운 방이었다.

율리키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황빛 조명을 든 채 멍하니 그것들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매디. 내 이름은 매디. 내 이름은 매디. 나는 매디. 매디. 매디. 나는 매디. 그냥 매디. 부모도 형제도 없는 매디.’ 

본인의 이름을 거듭 적어 놓은 구간이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힌 곳도 있었다.

‘검은 방. 검고 어두운 상자. 동굴. 웅크린다. 숨을 죽인다.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살아남다. 살아남는다. 반드시 살아남다. 끝까지 살아남다. 복수하다. 복수한다. 죽인다. 나는 남는다. 되갚는다.’ 

누군가를 향한 복수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꾹꾹 눌러쓴 글씨로 봐선 굳게 결심한 일이라 짐작할 수밖엔 없었다.

‘쓰레기. 쓰레기. 나는 쓰레기. 버려지다. 버리다. 쓰레기. 처리하다. 살아남다. 버려지다. 쓰레기통으로 흘러내려 가다. 살아남다. 쓰레기. 쓰레기가 되다. 쓰레기로 살다. 버려진 쓰레기. 나는 쓰레기.’ 

자기 비하처럼 보이는 말도 있었으며.

‘배고프다. 배가 고프다. 배고프다. 허기지다. 출출하다. 꼬르륵 소리가 나다. 나는 귀엽다. 나 귀여워? 왜?’ 

엉뚱한 소리가 적힌 곳도 있었다.

‘높은 벽. 쓰레기통.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 사람 하나, 사람 둘. 사람 셋, 사람 넷. 사람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높은 벽 아래 사람 열의 열. 그리고 괴물 하나.’ 

그 외에도 각종 독극물이 적혀 있는 구간도 있었다.

‘보론타 1mm 생존. 보론타 3mm 생존, 보론타 10mm 생존.’

‘벨로륨 10mm 생존, 벨로륨 20mm 생존, 벨로륨과 아시엔트랄륨 5 : 5 배합 30mm 생존.’

‘셀고늄 50mm 생존. 30분 수면. 셀고늄과 플타리넛 7 : 3 배합 100mm 생존.’ 

믿기 힘들었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걸 섭취했다면 몇 번이고 죽었어야 당연한 양이었다.

어느새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율리키안은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다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벽면에 있는 글을 모두 읽어 보고 싶었지만 혼자 남겨져 있을 아스트리드가 걱정되었다.

이 방에 들어오면 매디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더욱 추측하기가 힘들어졌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방을 나서는 율리키안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율리키안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멍한 얼굴로 우뚝 굳어 버렸다.

문을 닫기 일보 직전 스치듯 봤던 벽의 잔상이 묘하게 익숙했다.

율리키안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벽 전체를 천천히, 곱씹듯이 바라봤다.

촘촘히 이어져 있는 글자들 사이사이의 빈틈이 불규칙했다. 띄어쓰기도, 문단과 문단 사이의 줄도 모두 규칙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율리키안은 문을 연 채로 복도 밖으로 나가 멀리 떨어져 벽 전체를 바라봤다.

눈을 반쯤 감은 채 글자들의 빈틈을 이어 보니 초상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율리키안은 시커먼 어둠 속에 서서 익숙한 얼굴과 조우했다.

헤일던 쿤 론데네스.

선황의 장자이자 전 황태자.

그리고 나의 아버지.

살해되어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벽에 남아 있었다.

매디가 그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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