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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92)화 (91/135)

92화

세 사람 사이에 적막이 찾아왔다.

싸울 때도 숨 차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매디가 씩씩거리며 가슴을 들썩였다.

매디는 람다 쪽은 아예 신경 쓰지도 않고서 녹스만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녹스 역시 놀란 눈으로 매디와 눈을 마주했다.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디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다 알지는 못해도 그녀의 손에 묻은 피가 적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부득이하게 그런 의뢰가 들어오면 혼자 처리한 뒤 돈을 나누곤 했으니, 영문 모를 돈이 테이블 위에 있는 날이면 매디가 또 그 일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일을 하고 온 날이라 해도 매디는 태연해 보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카드를 치고 술을 마시고 녹스에게 농담을 걸어 댔다.

그래서 녹스는 제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 매디가 저렇게 화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황한 녹스가 매디를 향해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러는데요. 누님이 위험한 일이라고 해서, 혹시 몰라서 총 챙겨 왔으니까……. 난 그냥 걱정돼서 도와주려고…….”

“내가 알아서 해! 네가 나설 일 아니야!”

“……매디 누님.”

“신경 끄라고.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맞지도 않는 총 쏴 대지 말고 넌 그냥 도망이나 쳐.”

녹스는 넋 나간 얼굴로 망연자실 매디만을 바라봤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매디가 이를 악물고 두 눈에 힘을 준 채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가라고. 필요 없으니까.”

강아지같이 큰 녹스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동그란 눈매의 끄트머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알았어요. 그래도…… 위험하면 소리라도 질러요.”

녹스는 총을 들고 있던 두 팔을 천천히 내린 뒤 일어섰다.

람다가 저를 노리든 말든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녹스는 힘없이 털레털레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이제 겨우 둘만 남았다. 매디는 녹스의 머리꼭지가 완전히 보이지 않고서야 람다를 바라봤다.

람다는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매디와 눈이 마주치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흡! 크, 크큭……. 아, 재밌어라.”

“웃겨?”

“내가 쟤 죽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네가 너무…… 귀여워.”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을 고이 접은 채로 웃는 람다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가증스러웠다.

“네 걱정이나 해.”

“네가 해 줘, 내 걱정.”

한마디를 안 지는 징그러운 새끼.

매디는 속으로 쌍욕을 뇌까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맞붙으려는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가 거듭해서 울려 퍼지자 치안 경비대들이 몰려온 듯했다.

산길이라 올라오는 동안 시간이 꽤나 걸린 것 같았지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으니 그들이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람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매디에게 물었다.

“지금 잡히면 결혼식 못 하겠다.”

“잘 생각해. 난 죽었으면 죽었지, 네 개새끼로는 안 돌아가니까.”

“너 죽으면 나는 살 이유가 없는데.”

“알 바임?”

매디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곤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람다에게 던졌다.

이파리가 빽빽해 시야를 다 가렸다.

뻔한 수였지만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수밖에 없었다.

람다는 가만히 서서 발소리를 죽인 얀이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오늘은 포기해야 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얀을 잡는다고 해도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경비대가 몇 명이 올지도 모르고, 그들을 처리하는 동안 얀이 얌전히 있을 리도 만무했다.

역시나,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깨부숴 눈앞에서 치우고 나니 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도망치는 법을 배웠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건 할 줄 몰랐는데.

얀이 자꾸만 매디로 살아가려고 하는 게 불쾌했다.

람다는 조용히 숨을 고른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경비대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죽은 마부와 말, 박살 난 마차와 몇 군데의 총알 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 *

발이 질질 끌려 바닥에 신발 자국이 길게 남았다.

이렇게까지 지친 적이 없었는데.

매디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겨우 대공저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야 저택이 나오는데 도저히 마저 걸어갈 힘이 나질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다.

보통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는데.

매디는 감겨 오는 눈에 힘을 주며 앞으로 걸어갔지만, 정문을 지나고 나니 더욱 걷기가 싫어졌다.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안심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진짜.”

평생 모를 줄 알았던 두 글자였는데.

안도감이라는 걸 제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짐작도 못 할 남자에게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감히’

헛웃음이 나와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저택 전체가 신기루처럼 일렁거리길 반복했다.

모든 것이 손안에 그러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갈 것 같았다.

따듯한 집과 언제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담,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다정한 율리키안.

율리키안이 제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건 율리키안의 착각일 게 분명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러웠다.

몸이 한쪽으로 서서히 기우는 게 느껴져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매디는 그냥 이대로 몸에 힘을 빼기로 했다.

쓰러지면, 쓰러진 대로 잠깐 자다가 일어나야지. 여기는 율리키안의 집이니까. 누군가 나를 끌고 가진 않을 거야.

안도감이 먼저였나, 믿음이 먼저였나.

나는 언제부터 율리키안을 믿게 되었을까.

잡생각이 이어졌다.

매디의 몸이 기울어지고, 완전히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단단한 두 팔이 그녀를 붙잡았다.

“……율리키안?”

“녹스인데요.”

“아, 미안.”

녹스는 불퉁한 얼굴로 매디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누님.”

“아힘 틸리랑 다니엘은?”

“……두 사람도 무사해요. 저택에 잘 들어왔고, 각자 방에 잘 있는 거 확인하고 왔어요. 저는 코 고는 소리가 심해서 부인이랑 각방 쓴 지 꽤 됐다고 방 따로 달라고 했고요.”

“그래.”

“……누님,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녹스에게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걷던 매디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듯 무심한 눈빛이었다.

녹스가 됐다고 하려던 찰나 매디가 입을 열었다.

“너는?”

“예?”

“넌 괜찮아? 아까 어깨 맞았잖아. 아, 말하고 나니까 생각났네. 야, 부축하지 마. 환자한테 부축받을 정도 아니야, 나는.”

매디는 녹스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팔을 빼내며 그를 툭 밀쳤다.

녹스는 멍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매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느릿하게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 아래에 비치는 매디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빛났다.

“녹스. 고생했어. 들어가서 쉬어. 일찍 자고. 약 잘 챙겨 먹고. 총 맞은 거 티 내지 마. 경비대들이 현장에 왔으니까 사건 조사할 거야. 우리는 틸리의 멀미 때문에 호숫가 쪽으로 빙 둘러서 온 거야. 나는 처음 보는 고모부랑 싸운 탓에 혼자 산책하다가 늦게 들어온 거고. 그렇게 입 맞추자.”

격전을 벌이던 아까와 달리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녹스도 평소와 다른 조용한 말투로 매디에게 물었다.

“아까 왜 그랬어요?”

“뭐가.”

매디가 계속 앞서 걷고 있는 바람에 녹스도 몇 발자국 더 가까이 걸어갔다.

매디의 옆모습이 살짝 보였다.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다.

녹스가 매디를 다시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매디는 말없이 녹스를 뿌리치고 조금 더 빠르게 걸어갔다.

녹스는 별수 없이 또 그녀의 뒷모습만 보며 되물었다.

“아까 왜 나한테 죽이지 말라고 했냐고요. 내가 못 죽일 것 같아서? 저 내전 지역에서 태어났잖아요. 나 총 쏴 본 적 있는 거 알잖아요. 다 알면서 왜 말렸냐고요.”

드디어 매디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몸을 돌려 피로로 반쯤 감긴 눈으로 녹스의 손을 보며 말했다.

“총을 쏠 줄 알면 뭐하냐. 사람 해칠 줄을 모르는데.”

기운이 빠진 매디의 웃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너 도망치는 거만 잘한다며.”

“……기억해요?”

“당연하지. 내 지갑 훔친 놈은 네가 처음이었는데.”

[나는 사람이 죽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그거 보기 싫어서 고향에서 도망쳤어요. 난 달리기는 잘하거든요. 오래 달리고, 빨리 달려요.]

[그래서 시발, 감히 내 지갑을 훔치고 튀었냐?]

[그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잡힐 줄 몰랐어요.]

[하긴, 안 잡히면 장땡이지. 밥은 먹었냐? 이건 뭐, 해골이야 사람이야. 따라와.]

[왜요?]

[유치장에서 밥 안 준다. 가기 전에 먹고 들어가야지. 네 마지막 만찬이 될 거다.]

그때의 녹스는 죽을상을 하고 매디의 뒤를 따라갔고, 그녀가 사 주는 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하지만 유치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

녹스는 매디가 마련해 준 집에서 먹고 자고 아침을 맞이했다.

총소리가 없는 낮과 밤이 이어졌다.

매디가 녹스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녹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디는 한숨을 천천히 내쉬더니 밤공기에 내려앉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녹스, 사람 죽이지 마. 그거 되게 별로야.”

녹스는 굵다란 눈물방울만 아래로 뚝뚝 떨구며 말없이 고개만 계속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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