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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123)화 (122/135)

123화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가다가 흩어졌나 보다.

마음을 담은 고백조차 아무런 감흥도 없이 넘겨 버릴 줄은 몰랐던 율리키안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진심을 무시당한 적이 있었는지.

서운하고, 매디가 낯설고, 어쩐지 조금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율리키안의 얼굴 근육이 작은 경련이 일 듯 떨려 왔다.

“나랑 결혼 안 해도 상관없었네? 어차피 너한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긴 하죠. 궁극적인 목표는 쓰레기 만들기였는데 결혼을 안 해야 더 쓰레기가 되는 상황이었기도 하고.”

두 사람 앞의 사제가 난처한 듯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것은 알겠지만, 이제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니 그만 저를 봐 주시죠. 언제까지고 서 계실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허허허허.”

“미안하군. 매디와 얘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서 여기가 어딘 줄도 잊어버렸네.”

율리키안이 너스레를 떨며 정면을 바라봤다.

이를 갈며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남들이 보기엔 서로 가깝게 붙어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눈꼴 신 커플처럼 보일 뿐이었다.

율리키안은 앞을 바라봤고, 매디는 꿈꾸는 듯 반짝반짝한 눈으로 율리키안을 올려다봤다.

어느 나라에 데려다 놔도 여우주연상을 받을 연기였지만 지금은 그 눈빛도 미웠다.

매디는 남이 예쁘게 포장해서 건넨 마음을 똥으로 안다.

심지어 몇 번이나 거듭 말했는데.

밉살스럽기 그지없었다.

율리키안이 매디의 턱을 잡고 정면으로 돌렸다.

“앞을 봐야지요.”

“어머나.”

거침없는 손놀림에 매디는 놀란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내 호호 웃더니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둘은 빙그레 웃으며 사제를 바라봤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은 푸른 초목이 자연히 시들어 한 줌 재가 되는 날까지 서로를 사랑하겠습니까.”

“예.”

“넹!”

아, 밉다.

이제는 저 당찬 목소리도 밉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율리키안의 마음을 지르밟는 잔인한 매디가 얄미워 죽겠다.

마음이 풀리지 않은 율리키안은 결혼식이 끝난 후 매디와 첫 춤을 출 때까지도 삐뚜름한 얼굴이었다.

매디는 율리키안의 손을 잡고 빙그레 돌고 다시 그에게 안기며 복화술로 말했다.

“방금 결혼한 새신랑 얼굴이 그따위면 사람들이 억지로 결혼한 줄 알겠지요? 안면 근육을 강제로 풀어 버리기 전에 스스로 풀어야 착한 대공이지요?”

매디가 친절히 경고까지 줬지만 율리키안의 신경질적인 낯빛은 풀어지지 않았다.

“내버려 둬. 어차피 가짜 결혼식이잖아.”

결혼식의 대부분의 순서를 생략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빨리 식이 끝났다.

뒤늦게 도착한 귀족들이 율리키안과 매디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대공 전하.”

“고맙소.”

새하얗고 꼬불거리는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쓴 귀족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제가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이렇게 급히 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꼴을 보여 드려 송구합니다.”

“괜찮으니 걱정 말게.”

말이 새어 나갈까 걱정한 율리키안이 은밀히 결혼을 준비한 탓에 귀족들은 아무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래서 보수가 끝난 대공저에서 결혼식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귀족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는 이……분께서 바톨로즈 공자와 결혼을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하.”

“바톨로즈 공자가 혼자서 망상하는 병이 좀 심각하긴 하지.”

“아니, 그러면 결혼한다고 떠들썩대던 게 다 바톨로즈 공자의 착각이었단 말입니까?”

헐레벌떡 뒤늦게 들어온 다른 귀족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바톨로즈 공자가 꾸민 일이었다고?”

“세상에, 그럼 대공 전하의 약혼녀에게 멋대로 청혼했다는 게 사실이구나.”

율리키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췄다.

“매디는 꽃을 받아들인 적도 없고, 그가 보낸 선물을 고이 받은 적도 없어. 편지도 그쪽에서만 거의 보냈더군. 난 매디의 외도를 의심조차 한 적 없어.”

“세상에…… 그러시군요.”

“그 공자는 아무래도 병원을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현실과 망상을 구별하지를 못하니 말이야.”

율리키안은 간단히 람다를 나사 빠진 놈으로 만들었다.

분위기가 조금 심각해지자 귀족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 신혼여행은 어디로 떠나십니까?”

“신혼여행은 미뤄야겠지.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여의치가 않으니까. 일단은 아스…… 어윽!”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율리키안은 한쪽 다리를 접으며 휘청거렸다.

매디가 뒤에서 오금을 걷어찬 탓이었다.

“평생 한 번뿐인 결혼인데 당연히 가야죠! 어머, 전하. 사레들리셨어요?”

매디가 율리키안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신혼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말을 막기 위해서인 듯했다.

매디는 율리키안의 등을 두들겨 패며 귀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결혼에, 신혼여행까지…….”

“아까 말했듯 망상증 환자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리고 신혼여행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를 찾았어요.”

“찾았어?”

율리키안이 매디의 매타작에서 겨우 벗어나 허리를 세우고 물었다.

매디는 방긋거리며 대답했다.

“찾았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어요. 아이와 만나서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려고요.”

율리키안이 미심쩍은 눈으로 매디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매디가 아스트리드의 위치를 알고 있으리란 건 이미 예상했다.

그러니 정말로 찾아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을 수도 있지. 전에도 녹스의 집에서 아스트리드가 놀고 있었으니까.

율리키안은 머리에 힘을 주며 매디가 한 말을 믿으려고 애썼다.

믿음에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는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믿기 위해 이를 악물고 상황을 납득하려 노력했다.

매디 말이 맞다.

매디 말이 다 맞다.

매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주문 같은 말들을 쉴 새 없이 속으로 되뇌며 율리키안은 가까스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귀족들이 매디와 율리키안의 손을 잡고 한마디씩 격려의 말을 건네 왔다.

“아유, 정말 다행입니다.”

“마음 졸였어요.”

“아이를 찾았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그 아이가 쿤의 이름을 물려받겠네요.”

“그 아이, 틀림없는 대공 전하의 친자가 맞는 거죠?”

마지막 질문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은발에 벽안, 빼다 박은 얼굴이 있는데 뭘 의심하세요? 제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하시면 몰라.”

매디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드와 율리키안은 너무 닮았다.

매디와는 달리.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매디는…… 아니, 대공비와는 하나도 닮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죠. 원래는 자식만 잘 키워 달라고 하고 대공저 저택 앞에 두고 가려고 했어요. 누가 봐도 대공 전하의 자식이니까 키워 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발랄하게 말하던 매디가 잠깐 말을 멈추고 작게 숨을 들이켰다.

한숨과 함께 다음 말을 이었다.

“애를 버릴 수가 없었어요.”

“어머, 어쩜 좋아. 아이고.”

자식을 키워 본 중년의 귀족 여성들이 매디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도닥이고, 심지어 안아 주기까지 했다.

“잘했어요, 잘했어. 이제 가족 잘 지키기만 하면 돼요. 고생 많았어요.”

“그 힘든 와중에도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게 대단해요. 난 빈민촌으로 가면 하루도 못 살 텐데.”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응?”

“연락하고요.”

피로연에서의 댄스파티를 위해 가져왔던 가문과 제 이름이 적힌 종이들을 뚝 떼어 낸 여자들이 매디의 손에 쥐여 줬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아이 문제든, 남편 문제든.”

“그래요. 우리 살롱에도 놀러 와요. 수요일 밤에 모여서 소소하게 피아노 치고, 가끔 카드를 치는데……. 아, 카드를 칠 줄 아나요?”

매디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조금요.”

[속보] 율리키안 어처구니 실종!

귀족 여인들의 커뮤니티에 자연스레 입성하게 된 매디는 대화가 끝난 직후 율리키안을 끌고 방으로 올라갔다.

“매디, 아스트리드는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어?”

“몰라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빨리 짐 챙겨요. 나가게.”

“잠깐만, 무슨 소리야. 만날 수 있다며. 장난해?”

결국 오늘 내내 참아 왔던 설움과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궁극적인 목적? 결혼? 이딴 거 다 걔 하나 지키려고 짠 연극이야! 그런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니 무슨 말이냐고!”

매디는 담담하게 눈썹을 위로 까딱이며 대답했다.

“람다가 너 죽이러 올 테니까 너랑 같이 가는 거야. 그러니까 애 뼈다귀라도 찾고 싶으면 따라오든가. 아니면 여기서 네가 뼈다귀가 되든가.”

율리키안이 이를 악물었다가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피로에 짓눌려 뭉개지는 것 같았다.

“매디.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어? 이유나 좀 알자. 왜 또 사람 피 말리듯이 대화를 하냐고.”

“나 원래 이래요. 당신이 그동안 착각했던 거지.”

매디는 가슴을 쿵쿵 빠르게 울리는 고동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 말했다.

“감정은 무겁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좀 치워. 걸리적거려.”

율리키안의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속의 광채에 어쩐지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래야 했다.

그게 맞았다.

매디는 익숙한 듯 등을 돌려 짐을 싸기 시작했고, 율리키안도 그제야 묵묵히 제 짐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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