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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127)화 (126/135)

127화

율리키안은 프릴이 나풀나풀 펄럭이는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뒤뚱거리며 여관 계단을 내려왔다.

메이드복을 입고 자연스럽게 걸어 나가는 매디와는 확연히 다른 걸음걸이였다.

율리키안은 좀처럼 빨리 걷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매디는 뒷문으로 향하는 율리키안을 물끄러미 보다가 카운터 앞에 섰다.

“아저씨, 아직 인생에 미련 많지? 나한테 갚아야 될 빚도 있고.”

“너는 무슨 모른 척해 달라는 말을 그렇게 험악하게 하니. 근데 너 아까 남자랑 오지 않았냐? 설마…….”

매디가 몸을 비비 꼬며 품 안의 금화를 주인에게 스윽 내밀었다.

“이잉. 저기는 우리 남푠.”

주인은 금화를 챙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취향 독특하다. 결혼할 때 지나서도 안 하길래 애가 뭔 하자가 있나 했더니 정신머리에 하자가 있었구나.”

“보통 남편이 저 꼴이면 남편 정신머리를 의심할 텐데 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인들 좋아서 너랑 결혼을 하고 저 꼴을 하고 다니겠냐, 뭐 가슴 아픈 사연이 있겠지.”

매디가 눈동자를 빙그르르 한 바퀴 돌리며 여관 주인의 말을 곱씹었다.

가슴 아픈 사연?

있지.

가족이 모조리 죽은 건 보통 아픈 사연이 아니지.

그것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니까 이 중늙은이 말이 맞네.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매디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를 주먹으로 쿵 두드리고 눈짓했다.

“아무튼 입 좀 무겁게, 어? 부탁합니다.”

“아이고, 알았어요. 얼른 나가세요.”

속눈썹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윙크를 하는 매디가 징그럽다는 듯 주인이 손사래를 쳐 댔다.

앞서가던 율리키안은 아무도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봤다.

하얀 프릴이 대롱대롱 달린 보닛까지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매디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매디가 양쪽 어깨를 밉살스럽게 떨며 애교를 부려 댔다.

“죄송해요, 아가씨. 숙박비 계산하느라 늦어졌어요. 이 중늙은이가 몇 시간도 안 쉬었는데 1박 요금을 내라네요. 여기는 대실도 없나 봐용.”

금발의 떡대 아가씨는 발을 쿵 하고 굴리며 큰 손의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지만 위협적인 몸 때문에 당장 닥치라는 의미로 읽혔다.

“금방 갈게요, 아가씨!”

금발 떡대 아가씨가 양손으로 보닛을 깊이 눌러쓴 후 몸을 움츠러뜨렸다.

갈래머리를 한 앙큼 발칙 메이드가 두 발을 높이 들며 폴짝폴짝 아가씨에게로 뛰어갔다.

“쟤가 원래 저 정도는 아닌데…… 저 남자가 저리 좋은가?”

평소보다 유독 신나 보이는 매디의 뒷모습에 설마 ‘진짜’ 신혼여행인가 싶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관 주인은 이내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매디가 누굴 좋아한다 해도 그저 입 꾹 다물고 모른 척하는 게 은혜를 갚는 길이었다.

“이 돈도 안 줘도 된다니까 꼭 주고 가네.”

여관 주인은 매디가 주고 간 금화를 손바닥 위에서 한 바퀴 굴리다 저금통에 집어넣었다.

휴일에 딸애가 손주와 함께 오면 용돈이나 줘야겠다 싶었다.

몇 달 전, 매디는 여관 주인을 찾아와 방 하나를 달라고 부탁했다.

언제든 찾아오면 쓸 수 있도록 비워 두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디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길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요구를 보내왔다.

밖이 잘 보이는 꼭대기 층의 방을 항상 사람이 지내는 것처럼 꾸며 두라고 했다.

언제 누가 찾아와 뒤진다고 해도 묵었던 사람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여관 주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매디가 공짜로 부탁한 것도 아닐뿐더러 몇 년 전 그녀가 잃어버린 딸을 찾아 준 것만으로도 평생의 은인이었으니까.

수년 만에 되찾은 딸과 재회할 때의 감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딸은 현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잘 지내고 있다.

다 매디 덕분이었다.

딸 찾기를 포기하려던 밤, 골목에 쓰러져 있는 제게 젊은 여자가 대뜸 ‘아저씨. 가족 잃었어? 나는 원래 없어.’라고 말했다.

웬 헛소리냐며 화를 내자 젊은 여자는 제 앞에 쪼그려 앉고는 강한 악력으로 턱을 붙잡았다.

어떤 온기도 없는 잠잠한 눈빛과 말투에는 일말의 연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 밑바닥 끝의 끝까지 찾아봤어? 딸 시체라도 건지려고 손톱이 빠지도록 땅이라도 파 봤어?]

여자가 빈정거리듯 말했다면 화를 냈겠지만 그녀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말투였다.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에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여관 주인은 끅끅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눈물 콧물을 다 흘려 가며 말했다.

아이를 잃어버렸던 곳, 그 근처 마을, 보육원, 거지굴, 심지어 사창가와 시체 보관소까지.

모두 찾아보았다고.

그런데도 딸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 얘기를 모두 들은 젊은 여자는 또다시 물었다.

[내가 찾아 줄까? 아저씨가 본 게 진짜 밑바닥이 아닐 수도 있잖아.]

술에 취한 여관 주인은 코웃음을 치곤 찾을 수 있으면 찾아 달라 말했다.

찾기만 한다면 영혼이라도 주겠다고.

그 말에 젊은 여자는 뚱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영혼은 돈이 안 돼서 싫고, 나중에 부탁 하나 할게. 거절하면 죽어.]

정말로 딸을 찾아 돌아왔을 때는 그녀가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나중에 딸이나 제 목숨을 가져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매디가 술을 들고 찾아와 한잔하자고 할 때면 몰래 머리에 성수를 뿌린 적도 있었다.

그러면 매디는 술 잘 마시다가 왜 사람한테 물을 뿌리냐며 여관 주인에게 술 싸대기를 날렸다.

다행히 악마는 아니었다.

혹은 성수를 맞아도 멀쩡한 악마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이 보내 준 천사거나.

하긴, 얼굴은 천사 같지.

여관 주인은 매디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사라고 추측하다가 고작 물 싸대기에 볼에 멍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악마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덕에 여관 주인은 누군가를 찾아 소란스러워진 마을의 공기에도 태연할 수 있었다.

마을 저편에서부터 말발굽 소리와 고함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마을 전체를 뒤지고 다니는 듯 말발굽 소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잠잠하던 마을이 금세 시끄러워졌고, 곳곳이 주황색 불빛으로 밝아졌다.

얼마 뒤, 매서운 눈매를 한 남자가 여관 주인을 찾아와 매디로 추정되는 여자와 그녀와 함께 찾아온 은발 남자의 행방을 물었다.

“20대 중반의 은발 남성과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여자를 목격한 적이 있나?”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딸을 잃고 가슴을 도려내고 살았던 몇 년에 비하면 목에 들어온 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 모릅니다! 정말로 본 적 없어요!”

여관 주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목에 들이밀린 칼보다 땀에 젖어 내려온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형형하게 빛나는 시뻘건 눈동자가 더 섬찟했다.

그저 저를 지옥에서 건져 준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악마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는 세상의 밑바닥을 밟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어느 중늙은이의 소원과는 달리, 매디는 또다시 바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 * *

기차를 두 번 갈아탄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단단한 코르셋 때문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는데 뛰어내릴 때는 그나마 코르셋 덕에 갈빗대가 부러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갈밭에서 빠져나오며 매디는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었고 율리키안도 눈치껏 드레스의 단추를 풀었다.

드레스 단추가 더럽게 많았다.

매디가 손가락을 쫙 펼쳐 그 사이로 율리키안을 지켜보며 경악한 척 소리를 질렀다.

“어머, 아가씨!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길에서 옷을 벗으시다니요!”

율리키안은 말없이 가발을 무 뽑듯 벗어 버렸다.

“생각을 해 봤는데, 네가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을 동안 내가 내내 이 드레스만 입고 이동한다는 게 말이 안 돼.”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율리키안은 이를 악물고는 답답한 코르셋을 잡아 양쪽으로 뜯어 버렸다.

간만에 양껏 마시는 공기가 무척이나 달았다.

속이 시원했다.

매디가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바지를 주워 들었다. 대충 보니 들어갈 것 같았다.

기차를 두 번 갈아타며 챙겨 왔던 짐 가방은 이미 어딘가에 두고 온 뒤였다.

이럴 거면 왜 짐을 챙기라고 닦달했던 건지. 그조차도 연기였나 보다.

“고개 안 돌려?! 나 바지 입는 거까지 볼 거야?”

“직접 벗기기까지 했는데 입는 것까지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율리키안이 참지 못하고 자갈을 주워 매디에게 던졌다.

제 평생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매디는 낄낄거리며 가뿐히 피하고 뒤돌았다.

율리키안은 너덜너덜해진 바지를 입고 매디가 던져 버린 셔츠까지 주워 입고 나서야 발견했다.

자갈밭에 주저앉은 매디가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훔친 남의 옷 가방에서 깔끔한 셔츠를 꺼내 느긋하게 입고 있었다.

“너 사람 뒤통수치는 거. 그거 버릇이야.”

“어머, 어쩐지. 안 고쳐지더라!”

사람이 너무 얄미우면 주변 사람이 화병으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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