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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폐하?”
자신을 부르는 톤이 높은 목소리에 염류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선이 곧 선명해지며 붉은 머리의 긴 곱슬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는 짜증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힘껏 손으로 그녀를 밀어 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꺅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떨어졌고 그 소리에 놀란 시종들이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밖에서 난리였고, 여성은 맨몸으로 바닥에 굴러 이리저리 아팠지만 현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라 그 누구도 부를 수 없어 괜찮다고 말하며 기어서 침대에 다시 올라가 자신을 민 황제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여성은 얇은 백저(얇은 속치마 같은 걸치는 옷)를 손에 쥐고 몸을 가리며 무슨 일이 있으신 거냐고 그에게 물었고 그는 누운 자세에서 앉은 자세로 바꾸며 물을 찾았고 그녀는 얼른 백저를 입고 옆에 어제 밤에 시종이 준비해준 물을 떠다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물로 목을 축이며 한숨을 쉬었다.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밤새도록 끙끙 앓으셨답니다.”
“그렇군.…후…악몽이라. 악몽일 만도 하지”
꿈에서 자신은 물 안에 있었다. 깊고 넓은 물 안에. 그리고 희한하게도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숨이 쉬어졌고 그것이 신기해 이리저리 물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도 아니며, 태염류도 아닌 아주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염류…염류…염류…’
고작 이름을 불리어졌을 뿐인데도 그 이름에는 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기쁨, 슬픔, 애절함, 그리고 사랑스러움까지 묻어 있어 염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자 물속을 하늘을 날듯이 돌아다니다 하나의 빛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에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져 괴로움에 발버둥 치다가 방금 차빈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행히 깬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죽을 고비(?)에 자신을 구해준 차빈이니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맞으나,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은 그 빛을 잡았지만 깨는 바람에 다시 놓쳐 버린 것과 다름이 없어 짜증이 난 것이다.
태염류는 다시 혀를 차며 침대에서 일어나 신하들과 시종들을 불렀고 차빈의 의복과 또한 태염류의 의복을 가진 이들이 일제히 들어와 그들의 몸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태염류는 백저만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기 위해 욕후로 향하다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았다.
“폐하?”
늙은 환관이 그를 욕후로 안내하다가 그가 발을 멈추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고 깜짝 놀라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좀 더 창문에 다가가 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종일 내리고 있는 것인가?”
그의 질문에 환관은 무엇을 그가 묻는 건지 몰라 당황하다가 곧 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다고 답문하였다.
환관의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창문을 닫다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북을 두드리는 소리에 손을 멈칫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자신에게는 하늘에서 점지해준 황후가 있다하여 지금껏 기다렸다. 어릴 적에는 자신을 이 모든 땅을 지배하는 패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그 황후만 있으면 뭐든지 될 것 같아 간절히 바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릉빈가라는 것이 없어도 현재 자신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고, 현재 여덟 대제국 중, 여섯 개의 제국을 손에 넣고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제국도 곧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그 말은 즉 가릉빈가 따위는 헛소리라는 결론이 나고 더 이상은 믿지 않게 된 것이 사실이다. 아니,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생각을 해보면 가릉빈가가 나타나 자신이 여덟 방위의 땅을 하나하나 삼킬 때마다 가릉빈가 덕분이라며 말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신은 무능한 황제가 될 터. 그러니 지금은 차라리 그것이 신관이 미쳐 헛소리를 내 뱉은 것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고, 믿고 있다. 그리고 오늘이야 말로 그 믿음을 실현할 때였다. 신관의 목을 쳐 성 밖에 매달아 두고 황제를 갖고 논자라 할 예정이다. 20년의 기다림을 지친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테니 말이다.
“폐하, 서두르시지 않으시면 조례에 늦으십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태염류에게 환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고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환관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그가 욕후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바라본 창밖은 참으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작정한 듯 물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염류가 의복을 차려입고 신전에 나타난 것은 오전 11시경이 조금 넘어서였고, 신관은 황제가 온 것도 모른 채 온 몸이 비에 다 젖어서 열심히 천중을 중얼 거리며 애타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애절함이 얼마나 깊은지 염류에게도 전해져왔다. 하긴 당연한가. 오늘 가릉빈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에게 내일이 없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아하는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관이 좀 안타깝기도 하고 자신을 위해서 20여 년간 열심히 해준 그를 위해서 마지막 예의를 차려 날이 바뀔 때까지 한번 있어줘 볼까하는 생각을 하며 염류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자 그의 옥채가 상할까 두려워하며 시종들은 그의 어깨에 전포(망토)를 덮어 주었고 따뜻한 흑차를 내밀었고 염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마시며 시간 가는 것을 즐겼다.
역시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대신들이 그가 자리를 뜨기를 청했고 염류는 거절하며 모든 일거리를 여기로 가져오라하여 시종들이 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끙끙 거리며 책상과 그에게 쏟아진 호서들과 전서들을 올려두었고 그는 옆에 놓인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펼쳐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 비가 과연 그치기라도 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쏟아지던 빗방울이 점점 약해지더니 동그란 두 개의 달이 하늘 높이 떴을 때에 비가 그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별들이 반짝 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북소리도 점점 약해지고 잦아 들 때쯤 황제는 보고 있던 고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에게 그 고서를 건네고 어깨위에 있던 전포를 벗어 성큼 성큼 다가가 이미 목이 팍 쉬도록 자신을 위해 천중을 읊고, 헛된 희망을 안고 하루 종일 그 폭포 같은 비를 맞아 몸이 완전히 무너진 신관에게 던지듯 덮어 주었다.
“날이 바뀌었군.”
신관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건가?”
황제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있던 신녀들과 신자들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럼 약속대로 신전은 폐쇄한다. 더불어 대신관 ‘자홍’은 끌고 가서 목을 베어, 그 목을 성 앞에 삼 일간 매달아 두어라. 눈은 감기지 말 것이며 그 몸은 짐승에게 던져주어라.”
염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거기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신관의 아래에 있던 모든 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라를 배반한, 황제를 배반한 이들에게도 그렇게 심한 형벌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한 이에게 염류는 다가가 그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내 그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급소는 피했지만 찔린 신자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신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하원(의원)을 불렀고, 그 모습에 신관은 염류의 옷자락을 붙잡아 머리를 조아리며 울면서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죄가 있는 것은 저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살려 주십시오.”
“자홍, 나는 그대를 아껴. 그대의 신자들도 아끼지 그러니 걱정 말아 줬으면 좋겠군. 다만 저이는 나의 말에 대들었기 때문에 벌을 준 것 일 뿐. 내 시종이 나에게 저렇게 대들었으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 텐데 그대의 신하라 봐준 것이 아닌가?”
“폐하…”
친절하게, 다정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그 말투와 달리 너무나 무서워 신관은 그의 옷에서 자신의 손을 떼버리고 말았다. 염류는 몸을 돌려 아까 불러들인 무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황제에게 임무를 받들겠다는 의사를 표시 한 후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신관의 양 팔을 붙잡았고, 곧 이제 모든 볼일이 끝났다는 듯 그 자리를 나서는 황제를 향해 신녀들과 신자들의 원망 섞인 말들이 들려왔고 그것을 듣다 못한 무위들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신관의 절규 소리가 하늘에 퍼졌고 바닥은 그들의 피로 얼룩지며 가루다의 인까지 덮어 버리고 있었다.
“이 신전도 오늘 안으로 모두 없애 버려.”
그의 간단명료한 명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 명을 받들었다.
“폐하! 이 신전만큼은, 가릉빈가님이 오실 때까지 지켜 주십시오! 폐하!”
신관이 목에 칼이 대어져 날카로운 날에 목이 베일 지언즉 소리를 지르며 염류에게 부탁을 하였지만 염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종이 다시 건네주는 전포를 몸에 걸친 채 자신의 황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번쩍하는 빛과 함께 가루다의 중심에 있는 문의 인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솟아 나와 하늘과 연결이 되었다.
덕분에 하늘은 태양이 떠 있는 것처럼 밝아졌고, 밤이었던 율비천국이 갑자기 환한 대낮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있던 모든 신하들과 무위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신관은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더불어 코웃음 치며 등을 뒤로 돌렸던 황제, 태염류 역시 천천히 그 빛을 바라보았다.
모든 이들이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급기야 그 빛을 본 이들은 눈이 갑자기 안 보인다고 소리를 질렀고, 몇몇은 도망가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염류에게는 그 빛이 너무나 잘 보였다. 눈이 아프지도 않았으며, 눈이 부시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빛의 안에서 보이는 인영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신관역시 그 인영을 보며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 그 빛으로 걸어가 그 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릉빈가님…!”
그의 외침에 태염류는 깜짝 놀랐다.
흐릿했던 그 인영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빛의 기둥이 사라지자 밝았던 하늘이 다시 어두컴컴해졌고 그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고 있던 이들이 눈을 비비며 그 기둥이 있었던 쪽을 바라보았다.
신관이 눈물을 흘리며 문의 인 위에서 한 사람을 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관의 품에는 한 사람이 안겨 있었고 본 적 없는 외모와 그리고 또한 본적 없는 옷차림으로 온 몸이 젖은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가, 가릉빈가인가?”
“설마요…”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자신들이 본 것과 보는 것을 말하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의 인에서 나오는 이는 자신들이 이 몇 십년간 알게 된 바 가릉빈가 밖에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그 신탁이 사실이냐고 서로서로 침을 꼴깍 삼키며 신관과 그 품에 안긴 사람을 바라보았다.
태염류는 성큼 성큼 걸어서 신관의 앞에 섰다. 신관은 눈물범벅이 되어서 태염류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품에 있는 그를 그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폐하…가릉빈가님이십니다.”
“…깨워라.”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는 신관과 달리 냉소적으로 차갑게 말하는 염류 때문에 신관은 그에게 내민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이를 다시 소중히 품에 안았다. 혹시나 그가 이 사람을 해하는 것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때 염류는 신관의 품에 있는 자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어 당겨 끌어 올렸다.
신관이 기겁하여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황제의 명으로 무위들이 와서 신관을 저지했다.
“이게…가릉빈가라고?”
자신이 20년간 기다려온, 아니 태어나기 전 부터, 30년간 기다려온 가릉빈가.
“하…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군.”
바짝 말라 뼈 밖에 없는 몸에 머리카락은 흑발에 노예들처럼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옷은 특이하긴 하나 그 옷 모양 자체역시 천민들만 입는 옷에 어깨에는 이상한 것을 매고 손에는 무엇이 그렇게 소중한지 네모난 판때기를 꼭 붙잡고 의식을 잃은 채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자신이 상상한 가릉빈가와 달라서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황제는 이상한 것을 느끼고 한손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평평한 가슴, 여자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몸의 선. 그리고 안 봐도 알 수 있는 딱 붙는 옷에서 느껴지는 그의 볼록한 앞섶
“하!…게다가 남. 자. 란 말이지?”
가릉빈가는 자신의 다음 대를 이어줄 후손을 낳는 모태후가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남자…남자라… 염류는 던지다 시피 자신의 손에 들린 생물을 신관에게 던졌다.
“죽기 싫어 네가 발광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군.”
“폐하…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죽기 싫어 수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신관은 마법도 부릴 줄 아는 이들이니 말이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비사문천님과 천제님에 맹세코 절대로 아닙니다. 이분은 하늘에서 주신 가릉빈가님이십니다!”
“그럼, 증명해봐라. 깨워서 노래를 부르게 해”
전설에 의하면 천제가 가장 아끼는 새가 있고 그 새는 이 세상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간혹 천제가 화를 낼 때 그 화를 잠재워 준다고도 한다. 또한 외모도 너무 아름다워 보는 이들도 모두 매료 시킨다는 새, 그 새가 바로 가릉빈가.
그 전설 그대로라면 고서에 적혀 있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의 가릉빈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마치 천제가 단물 쪽쪽 빨아 먹고 쓸모없는 쓰레기를 버린 것 같은 모습
“어느 것 하나 가릉빈가답지 않으니 노래라도 부르게 해. 그래야 네가 살 테니 말이지. 더불어 그 말라비틀어진 나무 같은 놈도.”
신관은 안타까운 눈으로 의식이 없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손을 얹히며 천중을 외웠다.
신이시여 이 자가 가릉빈가라면 이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바랐고 바랐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서부터 그의 발끝까지 자신의 손길로 한번 쓰다듬더니 곧 그의 몸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자 대신들도 호기심에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와 신관이 가릉빈가라 주장하는 이의 모습을 보았다.
“가릉빈가님…정신이 드십니까?”
귀도…눈도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귀는 그나마 조금씩 들리기 시작해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빈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목소리를 부르는 이를 보려 애를 썼다.
할머니일까? 아니,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젊고 고운 목소리였다.
그럼, 누굴까? 그리고 자신은 왜 여기에 있을까? 아아, 죽은 걸까? 그럼 여긴 천국이고 자신을 부르는 저 목소리는 천사일까? 아니면 반대로 지옥이고 악마일까?
고민을 하는 사이에 시력이 제대로 돌아왔고, 귀 역시 트였다.
“가릉빈가님…!”
정신이 든 가빈을 보며 신관은 기뻐하며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몸은 괜찮으시냐고 물었지만 가빈은 멍하니 신관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했다. 눈앞에 하얀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단어 뿐, 그 외의 말은 이상하게 외계어로 들리고 있었었다. 혹시 이건 천국의 언어일까 생각을 할 때에 신관 역시 가빈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신탁에 의하면 그는 이계에서 온 이이니 분명 비천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하얀 재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가빈에게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한 뒤에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그 재를 후하고 뿌려서 그 귓속에 스며들게 하였다. 가빈은 자신의 귀에 들어온 것에 깜짝 놀랐지만 곧 무언가 삑-하는 소리가 들려 몸을 웅크렸다가 신관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가릉빈가님 괜찮으십니까?”
이제는 생생히 그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말하는 것이 한국어로 들렸고 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다시 무위가 신관의 목에 칼을 대었고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갑자기 나타난 칼 때문에 놀란 가빈이 몸을 움찔하자 그 앞에 화려한 금의 수가 놓인 옷을 입은 자가 섰고 가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청보라 빛의 머리를 하고 등 뒤로 보이는 금색의 달과 너무도 어울리는 붉은 눈을 가진 이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고 있어 가빈은 자신의 가방과 손에 들린 것을 꼭 붙잡았다.
방금 자신을 부르던 이를 보면 천국인 줄 알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천국과 너무도 멀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칼에 찔려져 죽은 시체들과 그리고 피가 얼핏 보였고, 또한 주위에 있는 이들은 전부 이상한 눈 색깔과 이상한 옷을 하고 마치 가빈을 비웃듯 보고 있었고, 무엇보다 눈앞에 서있는 이는 너무 매서운 눈을 하고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 지옥 같았다.
가빈은 여기가 어딘지 너무 궁금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인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 곳인지 자신이 죽은 것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뻥긋뻥긋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죽으면 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결국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인가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염류가 가빈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히며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흑발에 검은 눈이라…후…날 너무 우습게 봤어 자홍, 이딴 천민을 데리고 와서 다른 나라 옷을 입혀 속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아닙니다. 폐하! 그 분은 확실한 가릉빈가님이십니다.”
“자, 그럼…가릉빈가라는 증거를 대봐라. 내 말을 이제는 알아듣겠지. 노래를 불러라. 하늘에서 말하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번 나를 위해서 울어봐”
머리를 꽉 쥐고 흔드는 통에 가빈은 너무 아파 인상을 찌푸리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의 머리를 잡고 있는 이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고개를 저었더니 더 그가 인상을 쓰며 가빈의 머리채를 더 꽉 잡고 머리 가죽을 벗길 기세였다.
“노래를 불러!”
그는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가빈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벙어리인걸.
가빈은 자신은 벙어리라고 입모양으로 말을 해주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염류는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빈의 몸을 다시 바닥에 내팽개치며 자신의 옆에 있는 무위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바닥에 쓰러진 가빈의 목에 갖다 대었다.
가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불러라. 가릉빈가.”
어째서 이 남자가 자신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은 부를 수가 없다. 가빈은 자신의 목을 붙잡고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필사적으로 의사를 전달했지만 그것은 염류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폐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신관이 기어오다시피 다가와 염류의 옷자락을 붙잡고 빌었다. 그리고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가빈의 어깨를 손을 덜덜 떨며 붙잡았다.
“혹시…가릉빈가님…목소리가 나오시지 않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본 그 질문에 가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신관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원래 나오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빈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태어 나셨을 때부터 입니까?”
역시나 가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답에 가빈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신관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 하하하하…미치겠군.…하하하”
가빈과 신관의 대화를 들은 염류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바 이렇게 웃기고 기가 막힌 일은 처음이라며 코웃음 치더니 곧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다시 무위에게 넘겨주며 한숨을 쉬며 머리를 넘기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그 눈빛에 모두들 움찔하였다.
그 눈에는 살기와 분노가 가득했다.
“당장 이 둘을 처형해라.”
그렇게 말하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를 보며 가빈은 영문을 모른 채 무서운 사람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를 하고 있었지만 신관은 황제를 부르며 빌고 빌었다.
“폐하!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가릉빈가님이십니다. 제발 이 분 만큼은 살려 주십시오! 폐하! 이분은 당신의 황후가 되실 분이십니다. 당신 곁에 있을 분이란 말씀입니다. 폐하! 염류 폐하 제발!”
이제 염류에게 신관의 말은 모두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결국 신탁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신관의 속임수였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자신은 더 이상 거기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발 뻗고 편안하게 자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뒤를 따르던 우상신과 좌상신이 조심스럽게 태염류를 불렀다.
“폐하, 일단은 저 두 사람을 살려 두는 것이 어떠하실 런지요?”
우상신의 말에 태염류의 가벼운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지며 멈춰 섰다. 하얀 백발의 자신의 아버지와도 같고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두 원로대신은 진지하게 태염류에게 청하고 있었고 그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문했다.
“그대들도 싫어하던 신관이 아니었나? 때론 나에게 가릉빈가란 전설의 존재라며 말하기도 했던 자들이 그대들이었는데 이제와 나에게 그 말씀 하시니 당황스럽기까지 하군”
태염류의 말에 두 원로대신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올려 자신들의 무례함을 용서 해달라고 말했다.
“저희들이 물론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저희들이 보기에는 아까 그 빛은 지금껏 본적 없는 빛이었습니다. 대신관의 마법으로도 힘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보다 저 청년의 옷차림도 저희들이 지금껏 다녀온 그 어떤 나라의 옷과도 다릅니다. 조금 더 조사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혹은 뒤에 다른 나라가 배후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신관을 처리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신관을 따르는 백성들이 아직 있는 만큼 적당한 죄명을 발표한 후에 처형해야 반발이 덜 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분명 아까 그 빛을 본 백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일을 꾸미라 이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실을 준비하시라는 것입니다. 신관이 지금껏 백성과 황실을 능멸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야 후에 반발이 없을 것입니다.”
“피곤하기만 하군”
이제 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머리 아픈 일이 더 생겼다며 태염류를 혀를 차며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신관과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고 있는 벙어리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뒤를 돌았다.
“저 둘을 가둬라. 단, 서로 각각 다른 곳에 가두어라, 신관은 지하 감옥에, 그리고 저 자는 빙궁에 가둬라.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입조심해라. 빛의 기둥의 정체는 신관의 마법이었고 그 빛을 타고 나타난 이는 없었다. 알겠느냐? 그 어떤 이야기가 새어 나갈 시에는 모두 소리 소문 없이 사라 질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자신 뿐 아니라 그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까지 모두 처단 할 터이니 그렇게 알도록”
그 신전에 모인 가빈의 모습을 본 자는 총 25명은 황제의 말에 몸을 숙이며 지킬 것을 맹세했다. 그 맹약을 듣고서야 태염류는 자신의 황성으로 돌아갔고 무위는 두 사람을 따로 떼어내어 서로 각각 반대편에 있는 지하 감옥과 빙궁으로 향했다.
신관은 끌려가면서도 가빈에게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외쳤고, 가빈은 영문도 모른 채 힘없이 무장을 한 그들이 끌고 가는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