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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막스는 기사다
“생각 외로 시시한 조직이었군.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조직인 줄 알았더니.”
“……하나만 충고하지. 그렇게 사람 깔보는 식으로 말하다가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다.”
이를 부드득 갈는 조안을 보며 빈센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음. 충고 고맙군. 기억해 두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빈센트는 후안이 도망간 엘리스를 쫓아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후안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추격 중 격파 당한 걸까 아니면 아직도 교전 중인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지만 일단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별되지 않는다면 이후의 방침을 정할 수가 없었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그로서는 지금 상황은 꽤나 신경줄을 긁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자신이 후안 대신에 엘리스를 쫓는 편이 더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조안을 격파함으로써 그들의 계획에 대해 알아내는 수확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계획의 주축은 인형술을 사용할 수 있는 엘리스였다. 조안이 잡히더라도 엘리스가 어딘가에 숨어 계획을 진행시킬 가능성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다지 좋다고 할 것은 없는 상황 속에서 빈센트는 결국 조안의 신병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의 가장 큰 무기인 마술은 수갑에 의해 봉인돼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상태의 조안이라면 가드에게 맡기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한 가지 문제점이라면 가드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것도 결국 후안과의 문제와 같다고 생각한 그는 주머니에서 껌 한 통을 꺼냈다. 딱 두 개가 남아있는 껌 중에서 하나를 꺼내 씹던 그는 고개를 돌리다가 조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빈센트가 말했다.
“하나 어떤가?”
“……이 자식아,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안 씹어.”
“풍선껌인데?”
“안 씹는다고.”
“판박이도 있다만?”
“안 씹어! 안 씹는다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만일 손에 채워진 수갑이 없었다면 땅이라도 쾅쾅 두들겼을 듯한 기세였다. 빈센트는 별 변화 없는 얼굴로 그럼 남은 건 후안 경이나 줄까 하고 중얼거렸다. 의외로 바보 같은 기사라고 조안은 생각했다.
“쳇……. 이딴 놈에게 붙잡힐 줄은. 그동안 특경들이랑 목숨 걸고 싸워왔던 내가 다 한심스럽다.”
조안이 투덜댔지만 빈센트는 아무 말없이 풍선껌을 씹고 있었다. 간간히 그의 입에서 풍선이 불어졌다가 터지기를 반복했다. 별로 초조해 하는 기색도 없이 가끔씩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바닥에 꿇어 앉아 있는 조안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당연히 조안은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때우기도 힘들군. 대화나 하자고. 어때?”
조안은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로,
“어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안 해. 너랑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그럼 나부터 질문하지. 좋아하는 사람은?”
“안 한다고 했잖아! 무슨 진실게임이냐! 그리고 그딴 거 초면에 묻지 마!”
“흐음. 이상하군. 친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이 필수라고 책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무슨 책을 본 건데?! 그리고 그건 친구랑 여행가서 묻는 질문이라고! 너는 친구랑 여행도 안 가봤냐?!”
조안의 딴지에 빈센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턱을 매만졌다. 의외로 이 기사는 친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조안은 생각했다.
“그럼 다른 걸 할까.”
빈센트는 꽤나 심심했던지 자꾸 조안에게 말을 걸어댔다. 조안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십 분쯤 빈센트가 혼자 떠들어 댔을 때 그가 일어섰다. 이제 포기하는 건가 하고 조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갑자기 검을 뽑아든 빈센트가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도 살벌한 살기가 피부를 타고 흘렀다. 조안은 직감했다. 이건 전투의 시작이라고.
“늦어서 미안해.”
그다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조안은 물론이고 빈센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스였다. 혼자 온 것을 보아하니 후안은 격파당한 듯 했다. 빈센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조안은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웃었다. 엘리스는 수십 기의 인형들을 부리고 있었다. 조안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이것 참 안 됐는걸? 결국 그 바보 기사는 격파당하고 만 걸까나? 네가 혼자서 두 명을 이길 수 있을까?”
빈센트의 한 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너는 지금 이렇게 수갑을 찬 상태잖아.”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지금 당장 엘리스가 나를 구해줄 거니까 그런거잖아.”
“으으음……. 역시 요즘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말을 자주 하는구만.”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그런 말 하지 마 하고 조안이 쏘아붙이고자 하는 순간 빈센트의 검이 다시 한 번 횡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수십 기의 인형들이 한 번에 허리가 잘려나갔다.
“무, 무슨……?”
조안이 말을 더듬었다. 엘리스도 눈을 크게 떴다. 빈센트만이 담담하게 말했다.
“칠무 중 2식 ‘분소(坌埽)’ 다. 이건 먼지를 빗자루로 쓴다는 뜻이거든. 그 뜻대로 이 기술은 한 번에 모두 쓸어버리지. 쓴다기 보다는 벤다는 걸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난 칠무를 네 개나 배웠다. 기사단장 같은 경우는 여섯 개나 배웠으니 우쭐해 할 만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말인데…….”
빈센트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검을 들고서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내가 이렇게 멀쩡히 서 있는데 대체 누가 누굴 구한다는 거지? 저 무리가 너를 구하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너는 대체 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건 압도였다. 목소리만으로도 판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세만으로 전의를 짓눌러버리고 있었다. 조안은 자신이 대체 어떤 자를 적으로 돌렸는가를 몸으로 느꼈다. 함부로 상대를 자극해서는 안 됐었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기도 전에 빈센트가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검을 조안의 목에 겨눴다. 그의 눈동자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회색의 겨울이 비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겨울이었다. 침을 삼키지도 못하는 조안의 귀에 회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너희들의 가장 큰 실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