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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소란스럽다
올해에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뻐킹! 추워죽겠다!”
분명 일기예보에서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고 했었다. 용케도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고 진짜로 눈이 온 덕에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됐다. 하지만 그딴 건 후안 막스에게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일단 너무 춥다. 눈이 오는 건 좋은데 너무 춥다. 루돌프 복장을 입고 있는 후안에게 이 추위는 살인적이었다. 코까지 빨개진 것이 분장이 필요없을 정도다.
“닥치라! 니만 춥나! 내도 춥다!”
후안과 마찬가지로 순록 복장을 입은 ―이쪽은 루돌프가 아니라 평범한 순록이지만 사실 별 차이는 없다―좀비는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마치 백짓장 같았다. 본래 언데드라서 얼굴이 창백한 편이기는 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섰다. 눈 속에 얼굴만 빼고 묻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순록들이 무슨 말을 해요? 너희들은 동물! 건방지게 사랑 흉내 내지 마라! 짖어라, 짖어! 우하하하!”
잭 오 랜턴은 후안과 좀비와 달리 산타 복장을 입은 채였다. 머리의 호박 때문에 산타 모자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붉은색 옷과 거대한 자루만 해도 충분히 산타처럼 보였다.
“아오! 이게 무슨 크리스마스의 악몽인 줄 아나? 너도 같이 썰매 좀 끌라고, 빌어먹을 호박 머리 새끼!”
후안이 참다 못해 소리쳤지만 날아온 건 대답 대신 찰진 채찍질 뿐이었다. 좀비가 ‘니가 무슨 여왕님이가!’ 하고 소리쳤지만 역시 채찍만 얻어맞았다. 채찍을 들고 무소불위의 독재자 포스를 풍기는 잭은 경망스럽게 웃으며 두 마리의 불쌍한 순록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건방진 순록 새끼들! 너희들은 그저 하루하루 녹용 생산하는 기계일 뿐이다!”
자, 이쯤에서 그들이 왜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시간을 조금만 되돌리도록 하자. 사건의 시작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오후 열한 시쯤이었다.
2.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다. 후안과 좀비와 잭은 도서관을 대표하는 잉여들답게 거실에 할 일 없이 모여 있었다.
“내일 뭐하지…….”
할 짓 없는 잉여들은 내일이 크리스마스이건만 별다른 계획이 없다. 후안과 좀비와 잭은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시간 때우기에 열중했다. 본래라면 그 한심한 인간들 사이에 조수도 있는 게 정상이지만 그는 여자친구가 있는 인생의 승리자이기에 무리에 끼지 않았다. 방 안에서 혼자 스마트폰을 만지며 히히덕 대고 있을 그를 생각하자 확 열 받는 그들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잭이 고개만 조금 들고 말했다.
“좀비 씨. 내일 언팸 안 만나요?”
“응. 다들 내일 바쁘다 카더라.”
“후안 경. 내일 엘리스랑 어디 놀러 안 가요?”
“나랑 놀기 싫대요. 사춘기인가 봐.”
“그럼 내일 우리끼리 놀까요?”
그 말에 의욕 없이 바닥에 누워 있던 좀비와 후안이 천천히 일어났다. 잭도 따라 일어났다. 흐리멍텅한 눈을 한 셋은 내일 거리라도 좀 돌아다닐까 하고 의견을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거실에 레가 들어왔다.
“아,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있다! 할 일 없는 잉여들 겟!”
잉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화를 내지 않는 점에서 확실히 잉여들이 맞다. 좀비는 멍청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후안도 따라 하품했다. 레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일 봉사 활동 좀 하세요!”
“봉사 활동?”
후안과 좀비와 잭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봉사 활동이라면 그거 아닙니까? 그 왜 메이드복을 입고 ‘주인님께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
“아이지. 우리는 남자니까 집사복이지.”
“으음. 그런 것도 나쁘지 않군요.”
잉여들의 수근거림을 모두 들은 레는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이 인간들이 무슨 헛소리를. 그런 거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봉사 활동을 하라는 거예요! 쓰레기 줍기 같은 거!”
“뭐어? 귀찮잖아, 그런 거.”
“귀찮으니까 당신들 시키는 거잖아요. 그리고 쓰레기 줍기는 예시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다른 일을 시킬 거예요.”
잭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뭘 시킬 건데요?”
“선물 나눠주기요.”
“그걸 왜 하는데요?”
흐응. 레가 콧소리를 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모두의 시선이 레에게로 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도서관의 평판이 너무 나빠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면서 도서관의 평판을 올리는 거지요. 꽤 괜찮은 생각이지 않아요?”
“괜찮기는 개뿔이. 귀찮은 일이잖아.”
후안이 부정적의 반응을 보였지만 레는 웃는 얼굴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후안이 몸을 뒤로 젖혔다. 레가 말했다.
“연금술사 씨도 하라고 했거든요? 연금술사 씨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알고 있잖아요?”
모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연금술사의 말이라면 그들도 거절할 수 없다. 후안과 좀비와 잭은 결국 내일 크리스마스에 선물 나눠주기 일을 하게 되었다.
3.
시간은 다시 크리스마스 당일로 돌아온다. 제비뽑기로 정한 역할에 따라 후안과 좀비는 순록, 잭은 산타클로스 복장을 입고 거리에 나와 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거리에서 선물을 나눠주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사람들이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게 문제지.
“추워! 엄청 추워! 이 순록 옷 따뜻한 것처럼 생겨가지고 엄청 추워! 어째서 안쪽에는 털이 없는 거야?!”
눈은 내리고 바람은 분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계심을 품고 나눠주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벌써 시간은 밤 열한 시. 얼어죽기 딱 좋은 시간이다. 거기에 그들에게는 단순히 선물을 나눠주는 것 외의 임무도 있다. 바로 어린이가 있는 가정을 방문해서 진짜 산타가 선물을 주는 척 하는 것이다. 레의 말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의 며칠 저부터 몇 군데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이기는 사기다, 사기! 와 산타만 전기 히터에 손난로까지 있는데?! 순록은 뭐 다 얼어죽어삐도 된다 이기가? 이기는 명백한 동물 학대다!”
좀비의 외침대로 산타인 잭은 썰매 위에서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기 히터와 손나로의 온기를 마음껏 누리는 중이었다. 잭은 최대한 재수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아앙? 지금 순록 놈들이 뭐라고 찌걸이는 겁니까? 뭐어어어어? 춥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건방진 순록 놈들이 감히 인간님이랑 같은 대우를 원하다니. 가서 마늘이랑 쑥이나 더 먹고 오라고!”
후안과 좀비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이게 미쳤나! 산타 시켜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구만!”
“이 놈아 이거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만!”
폭풍 같은 구타 타임이 지나가고 나서,
“죄송합니다. 역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여러분을 착취하고 말았군요. 메소드 연기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군요.”
“……아니, 산타클로스는 그렇게까지 재수 없는 악덕 사장 같은 놈이 아니라고요.”
잭은 후안의 지적을 무시하고 썰매 위의 선물 자루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자루 안에는 따뜻한 음료나 핫팩 등이 들어 있었지만 거의 나눠주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선물을 건네봐도 다들 하나 같이 손사래를 치며 도망쳤다. 도망쳤다는 건 과장이 아니다. 정말로 도망쳤다! 중간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의 작은 다툼까지 있었다. 이미 그들이 여기서 선물을 나눠주는 건 글렀다.
사실 선물은 연금술사와 레가 준비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나눠주지 못해도 그들이 손해볼 것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몇 개 나눠주지도 못하고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영 찝찝하다.
“근디 사람들이 와 우리 선물을 안 받아주노?”
좀비의 질문에 잭과 후안이 제각각 답을 내놨다.
“남정네 세 명이 어울리지도 않는 분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역시 이런 건 새끈한 미니 스커트 산타 누님 같은 게 나눠주는 게 정석입니다.”
좀비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셋이서 함께 썰매를 끌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아이들이 있는 집을 방문하는 일이라도 제대로 끝내자는 생각으로 부탁받은 집들을 돌아다녔지만 어떤 아이도 그들이 진짜 산타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산타라는 인간은 머리에 호박을 쓰고 있고, 순록이라는 인간들은 맞지도 않는 옷을 입어서 기분 나쁜 갈색 쫄쫄이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울끈불끈한 근육까지 더하면 아이들의 꿈과 환상이 산산조각 나도 이상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대책이 없다. 세 명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금술사가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를 썰매를 힘겹게 끌고 가던 중 후안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눈더미가 보였다. 주위의 부분과 비교하면 이상할 정도로 봉긋 솟아있는 눈더미였다. 후안이 얼른 눈더미 쪽으로 다가갔다. 무언가가 묻혀 있는 것 같아 눈더미를 파보던 그가 손을 멈칫했다.
“사, 산타님!”
“산타님?”
“재 뭐라카노? 산타님?”
잭과 좀비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후안 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후안이 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새끈한 미니 스커트 산타, 주웠습니다!”
상황이 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오오! 이거 산타클로스의 선물입니다!”
“오오! 미니 스커트 산타!”
잭과 좀비도 얼른 후안을 도와 눈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온 것은 놀랍게도 미니 스커트 산타다. 그 미니 스커트 산타에 대해 설명하자면 금발벽안의 꼬마 아가씨가 고등학생이 되서 미니 스커트 산타 복장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눈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건지 입술을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몸은 덜덜 떨고 있다. 후안과 잭과 좀비는 신사기에 얼른 미니 스커트 산타를 썰매 위에 태웠다.
“좋아! 그럼 출발해 볼까!”
“오오!”
“미니 스커트 산타 만세!”
파이팅 넘치게 출발한 그들은 얼른 근처 모텔로 직행했다. ……절대 모텔로 갔다는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미니 스커트 산타를 편히 쉬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다. 물론 모텔 직원은 방 열쇠를 건네주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런데 이 사람 어떡할까요?”
“이마이 추운 날 이래 짧은 옷 입고 돌아댕기는 그 보믄 제정신인 가시나는 아닌 긋 같은데.”
“산타님이잖아요. 산타님이라면 가능합니다.”
“일단 일어나는 걸 기다리도록 하죠.”
잭의 제안대로 그들은 일단 미니 스커트 산타가 정신을 차리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고된 노동을 했던 그들은 따뜻한 방 안에 들어오자 금세 젤리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었다. 30분만 더 있으면 크리스마스도 끝났는데 그 때까지 계속 여기에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우리 기다리는 꼬마야들이 있다 아이가.”
“지금 나가야 오늘 내로 다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두 집 남았는데. 산타님은 그냥 여기 두고 가죠.”
용케 자신들의 본부를 잊지 않은 그들은 따뜻한 방바닥과 눈물의 작별을 했다. 막 선물 자루를 챙겨서 방을 나가려는 순간,
“으, 으으으음…….”
기지개 켜는 소리와 함께 미니 스커트 산타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미니 스커트 산타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히이이이익! 변태들이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바보들은 발끈했다.
“변태 아닙니다!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이라구요!”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암만 봐도 가짜 산타하고 가짜 순록 아이가!”
“맞습니다! 저희는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입니다! 들어주세요! 우리의 진심이 담긴 캐롤을!”
갑자기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는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을 보며 미니 스커트 산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등이 벽에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이 캐롤을 모두 불렀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해졌나요? 저희들의 진심이!”
안 전해졌어요.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참았다. 대신에 머뭇머뭇 자기소개를 했다.
“저, 저는 견습 산타 ‘루치아’ 라고 합니다.”
“산타루치아요?”
“……아뇨. 견습 산타, 루치아요.”
미니 스커트 산타의 자기소개를 들은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은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수군대더니,
“우리가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대답해 드리는게 인지상정!”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산타계의 감초, 귀염둥이 산타!”
“난 좀비!”
“난 후안!”
“우주를 누비는 우리 산타들에겐!”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난 잭이다옹!”
짜잔!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이 제각각 멋있어 보이는 포즈를 잡으며 루치아를 바라봤다.
“…….”
솔직히 말해서 욕할 뻔 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걸까. 루치아가 이 병신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주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후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은 자기소개도 개성 시대입니다.”
……어쩌라고. 루치아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보들이 신이 나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루치아에게 모였다. 루치아는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일단 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 했어요.”
후안이 말했다.
“아, 그것 말인데요. 왜 거기 쓰러져 있던 거예요?”
“그건…….”
루치아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 지금 꽤 오랫동안 견습 산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저 정도 일했으면 벌써 정식 산타가 되는 게 정상이지만 전 한 가지의 큰 결점 때문에 아직도 견습 산타에 머물러 있어요. 보다못한 산타 장로께서 올해에는 어떻게든 그 결점을 해결하라고 말씀하셔서 여기까지 오게는 됐는데요…….”
“그 결점이란 게 뭔데요?”
“사실 저……. 아이들을 싫어해요.”
“…….”
후안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고민은 사자가 ‘사실 저 고기 먹는 걸 싫어해요’ 라든가, 새가 ‘사실 저 나는 게 귀찮아요’ 라든가 하는 급의 고민이다. 살면서 산타가 아이들을 싫어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후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치아가 얼굴을 붉히자 잭이 대신 말했다.
“그, 그러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는 게 낫지 않나요?”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요. 산타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산타가 되는 게 운명이에요. 다른 직업은 가질 수 없어요.”
“혹시 산타가 안 됐으면 뭐가 되고 싶었어요?”
“니트요. 일 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
글렀다. 이 산타는 정말로 글렀다.
이번에는 좀비가 말했다.
“이거 그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네. 그 뭐꼬, 견습 산타들이 막 수염이 안 나가 안 되네, 살이 안 찌가 안 되네, 순록 할부금을 몬 갚아가 안 되네, 주식을 안 해가 안 되네, 뭐 그런 그다 아이가.”
“……처음 두 개는 들어본 것 같은데 뒤의 두 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주식을 안 한 거랑은 무슨 상관이에요?”
“아, 인마, 이거 또 뭘 모르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주식 해가꼬 돈 안 꼴아본 인간은 아직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꼬!”
루치아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문득 시계를 본 잭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끝난다고요!”
“어이구, 벌써 시간이 이래 됐나? 가자, 가자!”
“루치아 씨! 저희 갈게요!”
“자, 잠깐만요!”
루치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문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저도 같이 가요! 저의 결점을 고치려면 아이들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돼요!”
후안과 좀비와 잭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딱히 그들에게 해가 될 만한 제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끼리 돌아다니는 것보다 미니 스커트 산타가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후안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이자 루치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자, 그럼 어서 가볼까요! 가자, 순록들아!”
찰싹! 찰진 채찍질이 바닥을 때렸다. 썰매를 끌던 후안과 좀비와 잭이 썰매 위를 보았다. 루치아가 순구무진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세요? 안 가세요?”
“아니, 썰매 안 끌거면 조용히라도 있던가. 뭐야, 그 경망스러운 채찍질은!”
루치아는 풀이 죽어서 썰매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썰매는 다시 출발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근처에 있는 아파트였다. 그들이 방문해야 할 집은 총 두 곳. 시간이 촉박하지만 빨리 한다면 오늘 내로 다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 견습 산타가 탄 썰매가 아파트 정문을 지났다. 경비실의 경비원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후안의 윙크 한 번에 어떻게든 넘어갔다. 그들은 아파트 입구에 서서 주섬주섬 선물 자루를 챙겼다. 진짜 산타라면 썰매를 타고 베란다로 들어갔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가짜 산타다. 견습 산타는 한 명있지만 베란다로 날아가는 재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멋은 없지만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갔다. 문이 열리고 수상쩍은 산타들이 내렸다.
“501호에 가죠. 그 다음은 602호.”
잭이 대표로 5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산타복을 입은 것 말고는 산타처럼 생긴 구석이 없지만 어쨌거나 산타니까 제일 앞에 섰다. 문 안쪽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우와! 진짜 산타 할아버지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여섯 살쯤 되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잭을 바라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호호호호!”
잭은 최대한 나이 들어 보이는 목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어서 선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좀비와 후안은 마침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에 잭의 눈짓을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루치아가 선물을 들고 왔다. 루치아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잽싸게 남자 아이에게 선물을 건네준 후 얼른 창문을 열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난감해진 잭이 대충 남자 아이를 집 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괘, 괜찮아요?”
“후우. 후우. 괘, 괜찮아요. 역시 악마 같은 아이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군요.”
“……당신 진짜 산타 맞아요?”
“니트가 되고 싶었던 불행한 견습 산타라고 해두죠.”
“……다음 집이나 가죠. 마지막 집이에요.”
“벌써요? 저보다 부지런하시네요.”
당연한 소리를. 잭은 선물 자루를 챙겨 다시 엘레베이터 쪽으로 갔다. 나머지들도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버에는 6층. 그들은 602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이번에는 열두 살쯤 되보이는 남자 아이가 나왔다. 그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치는 잭을 보자 마자,
“아앙? 이것들은 뭐야? 산타인 척 하는 알바인가? 헹! 누굴 바보로 아나? 세상에 산타가 없다는 건 나도 안다고! 선물이나 내놔!”
가정 교육 한 번 멋있게 받은 아이다. 잭 뒤에 서 있던 후안과 좀비가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잭의 제지로 앞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잭은 애써 화를 참으며 선물을 건네줬다. 남자 아이는 선물을 받자마자 포장지를 뜯었다. 선물은 예쁜 장식이 된 오르골이었다. 남자 아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게 뭐야! 장난하나! 오르골? 누가 이딴 거 받고 싶댔어!”
남자 아이는 있는 힘껏 오르골을 바닥에 던졌다. 두어 번 바닥에 튕긴 오르골이 잭의 발치에 닿았다. 아, 이건 못 참겠다. 잭이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순간,
“이 빌어먹을 자식이이이이이이이이! 가정 교육을 판타지로 받았냐!”
잭은 보았다. 엄청난 위력의 라이트훅이 남자 아이의 얼굴에 꽂히는 것을. 그리고 그 라이트훅을 박아넣은 사람이 루치아라는 것을. 남자 아이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날아가 집 안에 꽂혔다. 모두가 멍해 있는 사이에 루치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 속이 다 시원하네요! 역시 저런 아이는 매가……. 헛! 잠깐!”
“왜, 왜요?!”
“아이 몸에 손을 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거야 손을 댄 정도가 아니라 때렸으니까 그렇지. 잭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루치아는 기뻐하며 혼자서 방방 뛰더니 잭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 결점을 고칠 수 있게 됐어요! 전 아이들을 향한 증오를 계속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기에 그들을 만질 수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그 증오를 한꺼번에 방출했기 때문에 전 순수한 마음의 산타로 돌아갈 수 있던 거지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루치아는 하하하 웃으며 복도 창문을 열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루치아를 보며 후안이 말했다.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쪼매만 마시자.”
“……역시 세상은 막장입니다.”
가짜 산타와 가짜 순록들은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거리에는 아직도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기뻐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소리치는 산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쨌거나 올해의 크리스마스도 이렇게 막장으로 지나간다.
============================ 작품 후기 ============================
지난 해 크리스마스에 썼던 크리스마스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