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회: 아파트에 이름을 붙이자고? (2)
“뜻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럴싸하게 들리기만 하면 되지.”
“그럼? 아무 뜻이 없다고?”
전생에서 아무리 많이 듣고 보고 한 아파트 이름이긴 해도 그 뜻에는 관심이 일절 가지 않았다. 아파트 이름이 달라진다고 작업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전생에서 본 한자를 대충 추정하건대,
“미래에 래 예쁠 미 안락할 안 그런 뜻이죠.”
“오. 제법인데? 병원에서 아주 놀기만 한 건 아닌가 보네?”
“예?”
“병원 입원했을 때 생각했을 거 아냐?”
이렇게 알아서 넘겨짚어 주니, 설건우로서는 연 대리가 기특할 수밖에.
“예. 병실에 갇혀 지내다 보니 지루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맞아. 인간의 창의력은 지루할 때 나온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다음, 이 자이는 무슨 뜻인데?”
자이는 한자도 아니고 요상한 영어였다. 뜻을 알 리 없는 설건우는 살짝 당황했지만, 금세 평정을 찾았다.
“연 대리님. 지금 이름 고민할 때가 아니고, 이 아이디어가 회사에 먹힐지 안 먹힐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연 대리의 얼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듣고 보니, 건우 네 말이 맞네.”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고 차장님부터 통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얘기 꺼냈다가 아까처럼 괜히 욕만 먹을 거 같은데요?”
“그러게.”
“그럼 어떡합니까?”
연 대리는 화산의 임원을 생각하는 직장인이다. 상사한테 욕먹는 게 무섭다고 화산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이 아이디어를 사장시킬 수는 없다. 각오를 마친 연 대리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건우 네 아이디어를 내가 승인했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욕먹는 건 내 몫이다.”
“그야, 그렇긴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말고가 어딨냐. 남자가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하는 거지. 종일 현장 뛰었더니 피곤하다. 너도 첫날이라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쉬어.”
“예.”
‘말을 괜히 꺼냈나?’
뻔히 눈에 보이는 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나? 연 대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 줄도 몰랐고, 출근 첫날 일을 만든 것 같아서 조금 부담이 되긴 했지만 이제 공은 연종훈 대리에게 넘어갔다.
혹시 모르지, 일이 잘 풀리면 그 최대 공적은 설건우의 차지가 될 테니.
* * *
설건우는 어제 풀로 붙인 딱지를 날짜별로 엑셀에 입력하고 있었다.
“마우스로 이렇게 밀고 당기면 돼요. 쉽죠?”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한 여사원 정은지. 그녀는 엑셀의 신에서 엑셀의 병신이 된 설 기사의 엑셀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설건우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와! 이런 기술이! 역시 사람은 젊으나 늙으나 배워야 돼. 고마워 은지 사원.”
“그런 말씀 마세요. 사고 전에 제가 설 기사님한테 배운 VLOOKUP 얼마나 자주 쓰는지 몰라요. 그거에 비하면 이건 기술도 아닌걸요.”
“그런가? 하하.”
엑셀이라는 것도 배우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이것도 원래 설 기사님 스타일로 하시려면요, 여기서 이렇게, 컨트롤 피.”
“오?! 오케이. 컨트롤 피? 오! 땡큐!”
전생에서도 손재주 하나는 한강 이남 이북 합쳐 최 반장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손재주라 치면, 엑셀이라고 만렙 찍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설 기사님. 이거요.”
자리로 돌아갔던 정은지가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왔다.
“엑셀 길라잡이?”
“혹시 기분 나쁘실까 봐 못 드렸는데, 설 기사님이랑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드려도 될 거 같아요.”
“하하. 책 선물 받고 기분 나쁜 사람이 어딨다고······ 고마워요. 은지 사원.”
“또 모르는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고요.”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나?”
“한 달 전에 이미 다 갚으셨는걸요?”
“그, 그런가? 하하.”
지난 생은 책과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는 시간엔 케이블 티비에서 해 주는 철 지난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아니면 숙소에 일꾼들과 현장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나누는 것 정도가 여가의 전부였다.
이번 생이 전생과 같아서 쓰나. 뭐라도 달라야지. 설건우는 책을 펼쳤다.
* * *
연종훈 대리는 아침부터 이곳저곳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설건우가 말한 아파트 네이밍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봐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아이디어임은 분명했다. 문제는 과연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아이디어에도 분칠이 중요하다.
‘21세기형 아파트 네이밍. 다시 말해 아파트의 브랜드화. 21세형 명품 아파트······.’
기껏 생각나는 문장들이 이따위였다.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다. 공대 출신 연 대리는 자신의 가냘픈 작문 실력에 진한 자괴감을 느꼈다.
지금은 아파트를 시공한 건설사의 이름값이 곧 그 아파트의 브랜드다. 그런 점에서 지금 화산은 분명 화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약간의 페널티를 감수하는 중이다.
화산이 폭발한다는 둥, 화산 아파트는 온수 틀면 용암이 나온다는 둥, 우스운 농담거리가 되기도 하고.
연 대리는 화산건설의 임원이 되겠다는 야심이 있는 직원이다. 아무리 우스갯소리라고는 하지만 화산이 우스개의 소재가 되는 게 썩 달갑진 않았다.
이런 아이디어는 본사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현장에 있는 직속 상사들을 무시한 채, 대뜸 본사에 들이댈 수는 없다.
정식 라인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가장 먼저 직속 고 차장의 동의를 얻어 공정 회의 석상에라도 올려야 한다. 회의 석상에 올릴 걸 생각하니, 마냥 희망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고 차장이 그랬던 것처럼. 공돌이들끼리 머리를 맞대 봐야, 공정 회의 중에 무슨 헛소리냐며 핀잔만 들을 게 눈에 선했다.
‘내가 너무 꽂혀서일까?’
다른 공돌이의 의견을 청취해 볼 필요가 있다. 연 대리는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난데.”
―종훈이?
“어.”
―씨이발~~~~~! 다 때려치고 싶다······.
전화를 받은 동기가 느닷없이 사자후를 토해 냈다.
“본사 근무하고 싶다고 지원할 때는 그러더니, 본사 가서도 그러고 있냐?”
―네가 본사 와 봐. 내가 회사에 있는 건지 국회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이 사람 비위 맞춰야지 저기 가서는 저 사람 눈치 봐야지······. 그렇다고 현장에 있을 때처럼 짱박힐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사는 밥값도 내 돈으로 내야 되더라? 잦 같애. 아주.
지금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중인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목소리가 야단법석이다.
“모르고 간 거처럼 그러냐? 그럼 다시 현장 오든지?”
―미쳤어?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고 말지.
“근데 본사가 그렇게 빡셌던가?”
―현장이 불지옥이라면 여기는 냉지옥이다.
“여기도 냉지옥이다. 졸라 추워.”
―민철이 얘기 들었냐? 공무원 준비하더니 이번에 합격했댄다.
“그래?”
―씨바 나도 여차하면 공무원이나 하려고.
“그래, 얼른 그렇게 해라.”
몇 없는 동기들이 낙오하면 할수록 연종훈 대리의 임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은 낮아진다. 굳이 맘에도 없는 만류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빡셀 줄 몰랐지······.
“좋은 날 오겠지. 암튼 내가 너 하소연 들어주려고 전화한 건 아니고.”
―그래 어쩐 일인데?
“······우리 회사 아파트 이름 말이야.”
―아파트 이름?
“화산 아파트 말고, 이름을 깔쌈하게 바꾸는 거 어떠냐?”
―이 날씨에 더위라도 먹었냐? 생뚱맞게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말은 아파트 이름만 따로 붙이자는 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냐? 아! 그러니까 현대차도 아반떼 그랜저 이렇게 이름이 있잖아.”
잠깐의 정적 후 동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는데, 그런 얘긴 왜 나 같은 말단 기술영업직 대리한테 할 게 아니라, 기획실이나 홍보실로 해야지.
“그냥, 네 생각은 어떤가 해서.”
―아파트 이름? 깔삼하면 좋지. 당연한 거 아니냐? 달구지보다 그랜저가 있어 보이지.
“그치? 내 말이 맞지?”
―그리고 종훈아, 그런 업계에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선도적인 사안을 본사에 제안할 때는 말이다. 주댕이로 나불거릴 게 아니라, 서류로 예쁘게 꾸며서 올리는 거란다······.
“서류?”
―이 자식, 현장 물만 잔뜩 들어서······.
전화를 끊은 연 대리, 동기 놈도 분명 선도적인 사안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류! 연 대리는 회의 석상에 올릴 생각만 했지, 이걸 서류로 만들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서류라······.’
서류라면 고 차장의 화도 조금 누그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고······.
* * *
아직 현장에 함바 식당이 들어서기 전이다. 직원들은 일찌감치 근처 식당으로 몰려갔고 점심시간, 불이 꺼진 사무실에는 연 대리 혼자 남아 있었다.
CRT 모니터에 띄워진 슬라이드에는 [21세기 화산 아파트 네이밍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고 빈칸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길 한참, 직원들이 돌아와 각자 자리에 앉아 오침을 즐겼다.
“연 대리님 이거요.”
설건우가 빵과 우유를 내밀며, 취침 중인 직원들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저도 그거 빨리 배워서 대리님 일을 덜어 드려야 하는데······.”
“괜찮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이거 어떡하면 좋냐?”
“뭐가요?”
“젠장. 내가 현장만 굴렀지 이런 걸 만들어 봤어야 알지!”
“그래서 문제가 뭡니까?”
“서류를 아무리 꾸며도 두 장밖에 안 나온다.”
연 대리가 의자를 획! 하고 뒤로 젖혔다.
“······두 장씩이나?”
“두 장씩이나라니? 두 장이 다라고!”
“자, 연 대리님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
“아파트 이름 바꾸자는 얘기 아닙니까? 그 얘기를 두 장에 걸쳐 썼으면 많이 쓴 거지!”
“그······ 그런가?”
설건우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PPT라는 프로그램의 목적상 글자 수가 많이 없긴 했지만, 아파트 이름 바꾸자는 뜻은 충분히 들어가 있고도 남았다.
아이덴티티 21세기 특별한 프리미엄 럭셔리 따위 쓰잘머리 없는 단어들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설건우가 보기에 이만하면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어제 고 차장님 뭐라 하셨습니까? 우리는 엔지니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저기 뭐, 뭐라 그러더라? 이런 글 쓰는 사람을······.”
“카피라이터?”
“예! 연 대리님이 카피라이터도 아니고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설건우가 연 대리의 어깨를 주물렀다.
“건우 네 말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무슨, 이런 거까지 하면서 월급 받는 건 아니니까.”
“연 대리님. 컨트롤 피 하십쇼!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짜식······.”
연 대리는 복합기로 달려가는 설건우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으아아~.”
잠시 후 사무실 불이 켜지고, 오침을 즐기고 있던 고 차장이 기지개를 켰다. 연 대리가 설건우에게 종이를 받아 들고 쭈뼛쭈뼛 고민석 차장 책상 앞에 섰다.
“왜?”
“차장님 다름이 아니라 어제 건우가 얘기한 거 말입니다.”
“뭐?”
“그······ 아파트 이름 짓기 프로젝트 말입니다.”
“뭐? 프로젝트? 하, 이 새끼들이 오냐 오냐 해 주니까······.”
고 차장의 짜증 게이지가 슬슬 올라가려 할 때 연 대리가 잽싸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점심시간에 꾸며 봤습니다.”
고 차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연 대리가 내민 종이 쪼가리 두 장을 받아들였다.
“고 차장님께서 정식으로 한번 검토해 주십시오.”
내키진 않지만, 아래 직원이 점심까지 반납하며 만든 서류라고 하니, 서류를 훑어보는 고 차장.
“내가 어제 뭐랬어······ 우린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니까? 너 인마 이런 거 하고 싶으면 광고 기획사엘 가든가······. 왜 노가다판에 들어와서 이 난린지······ 이 자식들이 진짜······.”
서류를 다 본 고 차장이 중얼중얼 짜증을 내고 있지만,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들었다.
“······.”
“그래서 나보고 이걸 내가 어떻게 해 달라고?”
“본사에 정식으로 보고하고 싶습니다.”
고 차장도 서류를 훑어보니 말이 아주 안 되는 얘기도 아니었다. 특히 명품 엔지니어링 아파트라는 문구가 엔지니어 고 차장을 자극했다.
이런 서류 하나 본사에 올린다고, 현장 돌리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게 있다 던져만 주면 본사에서 알아서 지지고 볶을 일.
그것보다 고 차장도 이런 데 숟가락 하나 얹어 놓는 거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조직 생활 기본이다. 이건 나용남 소장도 마찬가지고.
“이 자식들이 진짜······ 가져가.”
서류를 다시 돌려주는 고 차장.
“고 차장님!”
“야 인마! 그거 그대로 본사 보낼 거야? 쪽팔리게.”
“예?”
“맞춤법 데나오시(하자) 났잖아! 그거 그대로 본사 보낼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