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회: 복수 보다 보답
“2천 6백 원 입니다.”
설건우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나왔다.
6천에 1억을 더해 1억 6천이다.
‘어디다 쓸까···’
현시점에서 매우 큰 돈임에는 분명하다. 보통사람들은 횡재했다며 밤잠을 설칠 금액이다. 하지만 전생 백 억대 금액을 주물러 봤던 설건우에게는 애매한 금액이다.
전생에서처럼 땅이나 건물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아득바득 발품을 판다면 허접한 매물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1억 6천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디에 돈을 묻어두기보다 돈을 쓰고 싶었다. 은행에 넣어두고 건물에 묶어둔 채 전생처럼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을 수는 없다.
먹고 살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단 차부터 바꾸고 생각하자!
현장을 들어서며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에스페로가 보였다. 옆에 연 대리의 아반떼, 그 옆 고 차장의 갤로퍼, 나용남 소장의 소나타까지.
당장 생각 같아선 벤츠를 한 대 뽑고 싶지만 이번 생은 전생과 같은 프리랜서가 아니다. 화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일원이다. 딱히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다. 굳이 벤츠를 뽑아 주변의 이목을 끄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벤츠 안 타본 사람도 아니고...!’
“썰! 먼저 나눠 드려!”
“예!”
설건우가 백호 김 기사에게 커피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설 기사님.”
“바가지(버킷)가 아주 날아 다니던데요?”
“하하. 설 기사님 덕분입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하하!”
“그리고 저기 일대 백호 기사님 하는 거 눈치껏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겁니다. 수고! 안전!”
“예. 항상 안전에 주의해서 하고 있습니다.”
백호 김 기사의 미소가 어쩐지 쓰게 느껴졌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더 이상은 오지랖이다.
“오케이.”
마지막으로 연 대리에게 커피를 건네는 설건우.
“누구냐?”
“누가요?”
“너 만나고 온 손님 말야.”
“아, 뭐 그냥.”
“설마 여자냐? 그 여자?”
연 대리 여자 타령이 지겹기도 하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었다. 연 대리의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니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자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긴 이 시간에 무슨 여자가 현장까지 오겠냐···”
캔을 따서 커피를 들이켜는 연 대리.
“크··· 쓰다. 써.”
누가 보면 캔맥주라도 마신 줄 알겠네. 설건우는 이 불쌍한 쪼랩 플레이어에게 사냥터 한 곳을 알려주기로 했다.
“연 대리님.”
“응?”
“여자를 만나려면 여자가 있는 곳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없잖아.”
“연 대리님 저녁에 하는 기술사 공부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연 대리가 턱을 매만졌다. 기술사는 선택이다. 자격을 따면 수당 몇만 원이 더 나온다. 그것도 좋지만, 기술사는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동우동 현장 직원 중 나용남 소장만 유일하게 기술사를 갖고 있었다.
“음···”
“연 대리님 상태를 보아하니 공부가 급한 게 아닌데.”
“방법이 없잖냐. 방법이!”
“저녁에 운동이라도 하면 여자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운동이라··· 현장에서 이렇게 구르는데, 굳이 운동이 필요할까?”
“노동이랑 운동이랑은 다르지! 그리고-”
“그리고 뭐?”
“어허! 답답하시네! 운동이 목적이 아니잖습니까!”
연 대리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후...”
입김을 길게 내뿜는 연 대리.
“근데 연 대리님?”
“응?”
“혹시 회사 직원이 공사 따다 주면 뭐 없습니까? 인센티브 같은 거 말입니다.”
“왜? 시골 할머니 집이라도 새로 짓게?”
“회사에서 지어 줄까요?”
“내 말이, 네가 무슨 영업팀도 아니고 현장 놈이 뜬금없이 공사 수주야. 수주가.”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아니야. 이 자식 뭔가 있지? 분명히 뭔가 있어!”
“그냥 해본 소립니다.”
“아냐. 내가 널 모르냐?”
“그건 그렇고 연 대리님 아반떼는 탈 만합니까?”
대화 주제를 바꾸는 설건우.
“무난하지. 왜? 차 바꾸게?”
“아무래도 미션이 나간 거 같습니다. 80만 넘으면 달달 거리는 게···”
“내가 탈 때 문제없었는데?”
설건우의 실수였다. 에스페로! 첫차의 추억에 잠겨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야 말았다.
아는 사람에게 차 사는 거 아니다.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연 대리님은 시내만 타서 80킬로 넘길 일이 있었겠습니까?”
“나한테 남은 할부금은 어떡하냐?”
“뭐 거래는 거래니까.”
“아! 이 자식 그냥 타면 안 되냐 사람 미안하게시리!”
“그럼 이렇게 하시십시다.”
“어떻게?”
“남은 할부금 절반! 일시불로 상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오늘 소고기는 내가 사지.”
“오케이.”
“근데 차는 뭐로 사려고?”
“세피아 정도면 무난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식이 나하고 같은 급을 타려고?”
야만의 세기말 대한민국이었다.
“썰, 너한테는 무리해서 프라이드까지야. 네 월급에 세피아 사면 좀 허덕이지 않겠냐?”
하긴, 1억 6천이라는 횡재한 사실을 모르는, 인생 선배 연 대리가 하기엔 충분한 조언이었다.
“프라이드라···.”
세피아보단 명차지.
***
며칠 후, 결국 에스페로가 유명을 달리했다. 설건우는 서둘러 프라이드를 계약했고, 지금 빨간색 프라이드를 인도받아 현장으로 가는 길.
-형 난데.
“그래. 할머니는 잘 계시고?”
-할머니는 걱정 마. 내가 잘 모시고 있으니까.
하긴, 젊은 놈이 시골에 할머니랑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신기하게도 주거환경에 대한 불평하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플라넷이라는 회사를 좀 조사해봤거든.
“그래 뭐가 좀 나왔냐?”
-와, 시발 완전 날로 먹는 회사더만?
전생의 숙소 동료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상기하는 설건우. 동생이 조사를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조사 결과가 그거냐? 날로 먹는 회사?”
-아니 내 얘기 좀 들어봐.
“듣고 있잖냐?”
-영국계 회사라서 나는 영국놈들이 주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플라넷 코리아라고 법인이 따로 있더라고!
“그래?”
-근데 이 회사 주주구성이 존나 웃겨요. 씨바 내가 다시는 주식 쪽은 쳐다도 안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HTS 접속 해서 호가창 본 건 아니니까.
“그래 그건 그렇고 주주구성이 어떻게 되는데?”
-영국 플라넷 그룹 지분은 5%도 안 돼. 나머진 전부 신영 은행, 가람 생명, 대한 건설, 군인 공제회 등등 전부 우리나라 회사들이 갖고 있어.
“그래?”
놈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것은 설건우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 주주구성 중에 대한 건설이 끼어 있다라. 대한이 엮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냄새가 나는 지점이다.
“응.”
“그건 그렇고 스티븐 킴인가 하는 사람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한 거야.”
이렇게나 빨리?
“그래 어떤 놈인데?”
-한동 고등학교, 미국 동뉴욕 사립대 출신이더라고.
“똑똑한 놈이네···”
-똑똑하긴 개뿔, 한국에서 대학 못 가서 도피 유학 갔던 모양이더라고.
“그 뉴욕대학이면 명문아니냐?”
-뉴욕이 아니라 동뉴욕, 알아봤더니 유학원에 돈만 주면 입학하고 졸업장 받는 학교야.
“그래?”
-응.
“그리고?”
-그리고?
“학벌 그게 다냐?”
-응. 나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흠.”
-그래서 말인데 형.
“얘기해.”
-쪽팔려서 얘기하기 좀 그런데.
“뭔데?”
-나 활동비 좀 챙겨 주라. 씨바 돈이 있어야 움직이지.
“얼마나?”
-일단 삼십만 원만 보내 줘.
“후우···”
삼십만 원이란 소리에 한숨을 길게 내뱉는 설건우. 지금이라도 동생에게 손을 떼라 하고 업체에 일을 맡긴다?
“너 만약 내가 지금 이 일에서 손 떼라고 하면 어떡할 거냐?”
-미쳤어?
이렇게 나오는 동생 놈의 패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애초에 이 일에 동생을 끌어들인 설건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실수를 했으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만회하면 된다. 동생만으로는 불안하다. 설건우는 동생에게 사람을 하나 붙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삼백 보낼 테니까-”
-삼백?
갑자기 10배로 늘어난 예산에 잠시 당혹스러운 설명우.
“너 30만 원 갖고 어디 놀러 가냐?”
-!!
여태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은 설명우! 주먹을 말아쥐고 자신의 머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퍽!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키보드만 두드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먼발치서 놈이 어떻게 생겼나 실물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산으로 강가로 끌고 다니도록 사주한 구린내 나는 놈의 뒤를 캐러 가는 거다.
-형···
“명우야 무슨 일이든 일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템을 좀 갖추고 해라. 세상에 멀쩡한 몸뚱이 하나만으로 되는 일이 있는 줄 아냐? 너 인마 현장에서 사고 난 것도 다 아이템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아이템은 무슨···그냥 내가 넘어진 건데···
“네 아이템 말고, 우마(작업발판) 말이야. 그게 현장 아이템 아니냐. 우마가 A급이었어 봐라. 어지간하면 안 자빠져. 그래도 넌 자빠졌겠지만.”
안 봐도 훤했다. 기성 제품이 아닌 현장에서 돌아다니는 각목 주워다 급조해 만든 작업발판 이었을 터.
실력 좋은 목수가 기술을 발휘해 만든다면 기성 제품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우마에 기술을 낭비할 목수는 드물다.
-어쩐지 그 발판이 씨바 존나 흔들리더라고.
“아무튼, 돈 없어서 궁상떨다가 사고 치지 말란 말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돈을 써!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근데 월급쟁이가 돈이 어딨어? 노가다하면 뒷돈 좀 만진다더니 그런 거야?
“이 새끼가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서. 넌 알 거 없어!”
-알았어. 형.
“그리고 너 그 양반들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냐?”
-누구?
“너 사람 만들어 주신 분들.”
-그 자식들을 왜?
이렇게 말해도 알아듣는 걸 보니, 자기 사람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군지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그놈들도 뭐 양아치이긴 하지만, 그냥 자기 일을 한 거지 너한테 무슨 감정이 있겠냐. 너한테 올가미를 조인 건 스티븐 킴 그 자식 아니냐. 확실한 건 지금부터 조사해봐야겠지만.”
-······
“뭐 그 양반들 뻔한 영업멘트겠지만, 자기들이 전문가란다. 움직이기 전에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
“아직 그놈들이 무섭냐?”
-무섭긴. 씨바···
“그럼 너 데모도(보조) 해 줄 사람 하나 붙인다. 그렇게 알고 만나봐라.”
이제서야, 어떤 판때기에 들어섰는지 실감한 설명우.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동생 설명우도 알고 있다.
-알았어.
“뭐부터 할 건데?”
-선동이 그 자식부터 만나봐야지.
“그래.”
동생과 전화를 끊은 설건우는 곧장 건달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며칠 전에 동생 일로 통화한 사람입니다.”
-아이고 형님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사장님 말씀하신 스티븐 킴이라는 사람 말입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 동생 놈이 뒤를 캐려고 하는데,”
-아이고 저런···. 어쩌다가.
“크흠. 제가 실수했습니다.”
-요새 인터넷에 아이라이크스쿨이나, 뭐 일촌인가 뭔가로 사람 캐본다고는 하지만 그런 거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엔 휴민트로 가야 하는 법이죠.
“이렇게 된 거 동생 놈도 오기가 있는 놈이라서 손을 떼게 하진 못 할 거 같고.”
-동생분께서 오기라... 그런데 무슨 일로?
동생에게 오기를 봤다고 하니,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사람 하나 붙이려고요.”
-그냥 저희한테 일괄 맡기시는 게 베스트이긴 한데··· 사정이 그러하시니 어쩔 수 없죠. 저희야 고객 사정에 맞춰드리는 게 일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저희 김 과장이 그쪽 방면 전문인데, 단가가···
“얼맙니까.”
-인건비로 이백에 장비 이용료 백해서 삼백에 맞춰드리겠습니다.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일요일 작업하게 되면 추가금 좀 있고요. 저희 김 과장이 일은 깔끔하게 합니다. 다른 업체들처럼 일을 일부러 질질 끌거나 그런 건 일절 없습니다. 어떻게 맺은 인연인데요.
“그렇게 하시죠. 동생이 준비되면 찾아갈 겁니다.”
-결제는···? 착수금 중도금 잔금 이렇게 있는데 어떻게 맞춰드리면 되겠습니까. 업계 관행상 착수금은 무조건 50% 이상이라는 거 참고하시고요.
“일시불로 합시다.”
장비도 있다고 하니, 동생한테 보낼 금액은 다시 책정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