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회: 예상치 못한 손님 (7)
“이쪽으로 가시죠.”
최 차장이 소장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소장님! 후손분 오셨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는 나 소장.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여기로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나 소장은 위 여사의 자리를 안내하고 최 차장에게 말했다.
“팀장들 전부 들어 오라 그래.”
“예.”
“바쁘실 텐데,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다소곳하게 포개 올리는 중년 여인.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넘쳐 흘렀다.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오시게 해서 저희가 송구하지요.”
마음이 급한 나 소장.
“급하게 오느라 이것밖에 준비를 못 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는 저희 가족이 모여서 생각해 볼 참입니다. ”
중년 여인이 박카스 박스를 나 소장 쪽으로 내밀었다.
“아이고! 박카스! 저희 같은 사람은 박카스만큼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실제 은혜를 갚는 방법은 당장 개장 합의를 하고 최대한 빨리 묘를 옮겨 주는 것뿐인데··· 일단은 체면치레가 먼저다.
잠시 후, 팀장들이 소장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죄송한데 저희 조부님부터 뵀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일어들 나지.”
***
현장의 만능 일꾼 백호. 백호가 수십 가지 작업을 쳐내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백호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바닥 레벨링 작업이다.
커다란 중장비로, 겨우 집게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오차를 두고 땅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작업.
4동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설건우와, 안 대리 그리고 백호 김 기사.
“아직 김 기사님이 저 기사님처럼 나라시하려고 하면 안 되고.”
백호 2호기가 붐대를 쭉! 끝까지 뻗어 한 번의 동작으로 가능한 최대치 면적을 평탄화시키고 있었다.
“예.”
“일단은 바가지를 지금 이 각도에 고정한 상태에서, 바가지는 움직이지 말고! 백호 붐 대 각도만 움직여서 나라시를 해보세요. 요, 요렇게. 바가지는 고정이니까 오른쪽 레버는 앞뒤로 밀기만 해야겠죠?”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 기사!
“예! 설 기사님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오케이! 시작하자고요!”
손을 탈탈 털며 일어서는 설건우, 백호에 오르는 김 기사.
“설 기사님 백호도 몰 줄 아세요?”
안 대리가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설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몬다기보다, 예전에 우연히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몰다 뿐인가? 백호로 헤엄치는 거 빼고 다해봤다고 말해줄 수도 없고,
“학원 다니셨나 보네요?”
“학원은 무슨, 백호의 신이라 불리는 분에게 배웠습니다.”
“백호의 신요? 백호의 신은 부산에 백 기사님이 진짜 신 급인데.”
“백 기사?”
“나라시로는 백 기사님 따라올 백호는 없죠.”
“어허! 나라시는 기본이지. 내가 말한 백호의 신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어떤 수준인데요?”
“흠... 바가지에 샤프심 달아서 글자도 쓴다니까?”
“하하. 그게 말이 돼요? 샤프심이 부러지지.”
“보여줘?!”
“예?”
답답해서라도 백호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하는 설건우.
-쓰으윽. 쓰으윽.
김 기사가 조종하는 백호가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어때 보입니까. 아까랑 비교해서.”
설건우가 안 대리에게 물었다.
“···비슷한 거 같은데요?”
안 대리 짬밥이면 이런 디테일은 모를 수 있다. 설건우가 한 수 가르쳐 주기로 했다.
“바가지가 지나간 자리를 잘 보세요.”
“예.”
“뭐 달라진 게 안 보입니까?”
“흐음.”
바닥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안 대리. 설건우가 보아하니 안보이는 눈치다.
“안 대리님.”
“예?”
“자! 다시 앉아봅시다.”
설건우가 다시 쭈그리고 앉으려는데,
“썰!”
5동에서 고 차장이 설건우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니 5동 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 대리님 잠깐만요.”
“예!”
설명을 뒤로하고 고 차장이 있는 5동으로 걸음을 옮기는 설건우.
분묘 앞에 선 화산 직원들과 그 일행들. 물끄러미 관을 바라보는 중년 여인.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이렇게 고마운 경우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어떤 말씀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나용남 소장이 은하 상조 박영식 대표를 바라봤다. 그저 은은하게 웃는 박 대표.
“여기 분들이 애를 많이 쓰셨다고··· 지금 저희 조부님 계신 데가 화산 분들 아니었다면 영영 아파트 아래에 묻혀 계실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위 여사는 둘러서 있는 화산 직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감사를 전했다.
한편, 그런 세부적인 사정까지 듣고 왔을 줄 몰랐던 나용남 소장과 몇몇은 움찔! 당황스러웠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 레벨보다 아래에 할머니 묘도 있는 게 아닌가 파보자고 하면 진짜 현장 망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해지니까.
“원래 땅을 팔 자리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예. 마침 저희 직원이 마사를 발견하고 이상하다 싶어서 파 봤는데, 역시. 분묘가 있었습니다.”
나 소장이 대답했다.
“....마사요?”
“흙의 종류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아닙니다. 흙 종류야 저희 같은 사람들이나 알아보는 거지, 그거 구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 발견한 직원분이 누구 신지...”
화산 직원들을 둘러보는 위 여사, 설건우를 바라보는 나용남 소장.
“설 기사.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설건우를 향해 다가가는 위 여사. 장갑 낀 두 손으로 설건우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 은혜는 저희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현장을 살피는 게 저희 일인데요.”
설건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화산 직원들과 대흥 한 소장.
“젊은 분이 참 바르시네요. 이런 분이 짓는 아파트이니 참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되겠어요.”
“하하, 여사님. 은혜는 나중에 천천히 갚으시고, 일단 앞으로 계획부터 논의해야지요.”
은하상조 박 대표가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바쁜 분들 모셔놓고 제가 실례를 했네요.”
화산 직원들 심정이야 당장 합의서에 도장 찍고 퍼뜩 일 처리를 끝내고 싶었지만, 현장에서 난다 긴다 하는 화산 팀장들도 이 사안이 사안이라 그런지 마구 서두를 수가 없었다.
“저희가 지금 화산에 계속 폐를 끼치고 있는 거죠?”
위 여사가 물었다.
“폐라뇨?! 그런 말씀 마십쇼. 후손이 조상님 모시는 것을 폐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저희야 공사가 급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크흠···!”
현장 사정 좀 알아 달라고 슬쩍 흘리는 나 소장.
“예. 안 그래도 저희 형제들이 할아버지 새로 모실 곳을 알아보는 중이니까, 화산에 최대한 피해가 덜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노력 중인 건 감사한데, 그게 언제쯤 될는지··· 박 대표를 바라보는 나용남 소장.
“소장님.”
은하상조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예.”
“여유가 얼마나 있습니까?”
“여유라면...?”
“언제까지 묘를 이장해야 화산에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습니까.”
“피해라뇨. 현장 운영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도 일어나는 거지요. 그래서 화산 직원들이 나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도 해대는 나 소장.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위 여사, 직원들도 같이 맞절을 올렸다.
“고 차장, 향후 공정이 어떻게 되나?”
서두에 체면치레는 했으니 이제부터는 본론을 꺼내 들어야지. 나 소장이 물었다.
“항타기 조립이 5일 남았습니다. 조립 전까지 측량을 마쳐야 4일, 측량 전에 바닥 다시 잡으려면 3일. 3일 뒤에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면 그나마 지장은 없을 거 같습니다.”
박 대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바닥 잡으면서 측량 같이하면?”
나 소장이 물었다.
“그렇게 해도··· 됩니다.”
두 공정 간섭으로 형틀 김 소장이 난리를 피우겠지만, 현장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그럼 나흘 동안은 이대로 둬도 손해는 없다는 얘기지?”
“손해가 없긴...”
이미 이번 일로 백호 몇 대가리 손해 본 대흥 한 소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나흘 이후부터 현장에 지장이 발생한다라···”
은하상조 박 대표가 중얼거렸다.
“예. 항타기가 대기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항타기에 딸린 크레인과 백호, 콤프, 플랜트까지 스톱되는 상황이라··· 저희로서는 좀 급한 상황입니다.”
중년 여인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조부의 분묘 출현으로 화산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를 어째, 죄송해서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나흘이면 당장 이장 할 곳이 있다고 해도 빠듯한 일정이긴 한데, 위 여사님?”
은하 상조 박 대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년 여인을 불렀다.
“네?”
“조부님 모실 곳을 찾는 게 서두른다고 서둘러지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간을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사실 부탁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법적 권리다. 분묘기지권(타인의 토지에 있는 분묘에 대해 분묘가 위치한 땅에 대한 권리)을 내세워 거액을 뜯어낼 작정을 하고 공사를 막아서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지금 이 연고자는 보기 안타까울 만큼 저 자세다.
“지금 저희 집안에서 이장 할 곳을 급하게 찾고 있으니까.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연고자님. 급하다고 조부님을 아무 곳이나 모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
화산 직원들은 저 양반이 잘 나가다가 왜 초를 치나 싶은데,
“저기, 박 대표님. 저희 현장 생각도 좀···”
“하하. 최 차장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대책도 없이 이런 말씀 드리겠습니까?”
“대책이 따로 있습니까?”
나용남 소장이 물었다.
“임시로 납골당에 모셔놓고, 오래 모실 곳은 천천히 여유를 갖고 찾아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 그런 방법이!”
위 여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여사님과 가족분들이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하마터면 콘크리트 아래에 계실뻔한 조부님을 찾아 주신 분들 아닙니까. 그분들 현장에 폐를 끼치는 것도 연고자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니실 테고요.”
“그럼요. 그럼요.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말씀을 해 주시지.”
“나흘밖에 여유가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3개월을 꼬박 대기하는 현장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4일 이후부터 손해가 막심해진다고 하니, 임시방편을 꺼내 들었을 뿐.
“저희 현장 여건이 그렇게 됐습니다.”
“한 번 모셨다가 다시 모셔야 하니, 비용이 두 배로 드는데 그건 괜찮으시겠습니까?”
박 대표가 나 소장을 향해 물었다.
“저희가 지금 이장 비용이 문제겠습니까!”
나용남 소장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럼 비용은 화산에서 일체 책임지는 것으로 하면 문제없으시겠습니까?”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연고자님, 그건 아닙니다. 화산에서 지급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가요?”
“예.”
“저희 막내가 녹봉을 받고 있어서요. 혹시라도 문제 될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하하. 이 일로 누가 문제를 삼는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불안하시면 비용 문제야 얼마든지 저희가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연고자님. 저희가 서두르면 내일 당장은 어렵고 모래부터 묘제 지내고 이장하는 것까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언제가 좋을지 가족분들이랑 상의하셔서 알려 주십시오.”
“시일 안에는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나 소장이 말했다.
“예. 저는 서둘러야 할 거 같아서 이만 가봐도 될까요?”
위 여사가 말했다.
“예! 예!”
“저도 준비할 일이 많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은하 상조 박 대표가 말했다.
“살펴 가십시오. 최 차장! 모셔다드려!”
“예!”
이틀 후, 운구용 리무진 한 대와 프라이드 한 대가 현장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