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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명가 만렙 신입사원-75화 (75/219)

# 75 회: 안전제일 (8)

전생에서 최 반장은 계측을 신뢰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장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시험과 실험들은 규정을 지키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맨 처음 나 소장의 입에서 계측이라는 말이 나오자 썩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은 인부였던 최 반장이 아니다. 시공사의 흙막이 담당 신입 사원이다. 전생 최 반장이 짜고 치는 판때기의 NPC였다면 이번 생의 설건우는 그 판때기의 플레이어다.

“계측을 벌써 해요?”

계측 업체 직원이 말했다.

“예. 소장님 지시도 있고, 해빙기이기도 하니까.”

안전 김 차장이 말했다.

“센서 어디다 설치할까요?”

계측 기사가 물었다.

“여기, 여기 띠장에 부착하지 뭐.”

대흥 한 소장이 띠장을 가리켰다. 최대한 하중이 제일 적게 받을 것 같은 위치에 센서를 설치하려는 한 소장의 잔머리.

짜고 치는 판때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설건우는 짜고 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거기 안 됩니다. 저기 1단 스트러트에 설치할 겁니다.”

설건우가 전생 사고가 있었던 2단 스트러트 위의 스트러트. 즉, 1단 스트러트를 가리켰다.

“뭐 하러 거기까지 올라가? 올라가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냥 여기에다 설치하고 말아.”

현재 2단 터파기가 진행 중이다. 그래서 1단 스트러트는 머리 위 공중에 떠 있었다.

“못 올라가십니까?”

설건우가 계측 기사에게 물었다.

“올라갈 수야 있죠. 있는데······.”

계측 기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대흥 한 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계측 업체와 계약된 회사는 화산이 아니고 대흥이다. 대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당연히 올라갈 수야 있겠지. 근데 위험하잖아? 그냥 여기 띠장에 설치하자고! 설 기사, 왜 일을 만들려고 그래? 설 기사답지 않게.”

“일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일을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기사님?”

설건우가 계측 기사를 불렀다.

“예.”

“센서를 원래 어디에 설치하게 되어 있습니까?”

“······.”

설건우의 질문에 한 소장을 슬쩍 바라보는 계측 기사.

“에이! 눈치 그만 보시고요! 우리가 돈이 없지! 양심이 없습니까? 기사님, 이번 기회에 우리 기술자의 양심을 걸고 탁 터놓고 이야기해 보십시다!”

설건우의 권유에 어렵사리 입을 떼는 계측 기사.

“그게 그러니까 원칙상 흙막이 부위 중 가장 하중을 많이 받을 것으로 판단되는 곳에 설치하게 되어 있죠. 원칙은 그러한데······.”

말꼬리를 흐리는 계측 기사.

“그러한데?”

“현장에서 싫어하죠. 만에 하나라도 재수 없게 관리 기준 넘어가면 서로 피곤해지니까요.”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대흥 한 소장이 펄쩍 뛰고는 말을 이었다.

“내 기술자의 양심은 여기가 제일 하중을 많이 받을 거라고 하는데? 봐 봐, 여기 토류판 툭! 튀어나온 거 안 보여?”

야만의 20세기 대한민국 흙막이 공사장. 그리고 일찌감치 양심을 갖다 버린 한 소장이었다.

“······.”

하긴, 전생에서 사고를 겪은 설건우이기에 이렇게 예민한 것이지. 사실 한 소장의 양심만 탓하기엔 상황이 조금 애매하긴 했다. 땅속을 어떻게 알고 가장 토압을 많이 받을 위치를 정한다는 말인가?

“한 소장!”

흙막이를 작업한 강 반장이 나타났다.

“왜요?”

“센서 그거 아무 데나 설치하라고 해! 상관없어.”

강 반장은 자신이 작업한 흙막이에 자신이 있다는 표현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러지.”

“걱정도 많다! 이 사람아!”

“형님! 오정동 할 때 기억 안 나요? 비 온 다음 날 로드셀 기준치 넘어가는 바람에 보강 공사 했던 거 말이요! 그것도 우리 생돈 들여서!”

“크흠.”

“형님이야 그때 보강공사비까지 받아 갔지만 우리는 원청한테 땡전 한 푼 못 받았다고!”

보강 공사를 하게 된 원인이 업체의 시공 불량이니, 부실 시공한 대흥으로 공사비를 전가했다는 뜻이다.

“그 업체가 어딥니까? 너무 하는구만.”

안전 김 차장이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대한이지. 양아치 새끼들 같으니라고! 우린 지들이 시키는 대로 공사한 죄밖에 더 있냐고! 그리고 검측까지 오케이 다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 나중에 문제 생기니까 우리한테 덤탱이를 씌워? 사람이 환장 안 하고 배기겠냐고.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럼 한 소장님 이렇게 합시다.”

안전 김 차장이 박수를 딱! 딱! 두 번 쳤다.

“어떻게 하자고요?”

한 소장이 물었다.

“한 소장님 말씀하신 위치에 센서를 하나 달고, 건우가 얘기하는 위치에도 센서를 하나 답시다.”

“두 군데 달자고요?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예.”

“뭐 하러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쓰려고 합니까? 나 참 답답하네!”

“추가로 들어가는 돈은 대흥보고 내라고 안 할 테니까 두 군데 설치하는 거로 해요. 설 기사 그러면 되겠어?”

“예.”

“그럼 오늘은 센서 두 군데 설치하는 겁니까?”

계측 기사가 물었다.

“예.”

계측 기사가 작업을 시작했다. 여전히 못마땅한 한 소장.

“한 소장님 뭐가 걱정이에요? 설마 문제 있겠어요?”

안전 김 차장이 말했다.

“설마가 사람 잡을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 * *

고 차장은 새로 뽑았다는 직원의 이력서를 훑었다. 건축과를 졸업하고 대한에서 딱 1년 근무. 이후 호텔 시설팀에서 9년 근무 중 호텔이 부도나면서 직장을 잃은 가장.

이런 시국, 이런 나이, 이런 경력으로 재취업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 아이는 커가고 와이프 눈치도 보일 터.

뭐라도 해야 하는 와중에 마침 대학 시절 따 놓은 건축기사 자격증도 있겠다, 선배에게 부탁해 현장에 취업할 기회를 얻었다.

“흐음.”

나이만큼 경력이 좀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쩌면 현장 채용 직원은 차라리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는 안타깝지만 이력서에 기재된 경력으로는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힘들 테니까.

건설 경기가 살아나서 전국에 현장이 넘쳐 나면 갈 곳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 건설 경기가 살아난 적은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광영이라고 합니다.”

말끔하게 생긴 30대 남자가 현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살짝 긴장한 표정.

“공사팀장 고민석 차장입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예.”

회의실로 들어서는 두 사람.

“앉으시죠.”

“네.”

“현장 경력은 1년 있으시던데······.”

“예.”

“그건 없는 거로 치는 게 낫겠죠?”

“예.”

이광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묵직하게 한 방 먹었다. 썩 달갑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쉬운 놈이 참아야지.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요. 경력을 알아야 어떤 일을 맡길지 저희가 판단을 하니까요.”

듣고 보니 기분이 나쁠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을 뿐. 만약 처음 입사했던 대한에 계속 다녔다면, 이광영 본인이 저 자리에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혹시 이력서에 빠트린 경력이 있을까요?”

“설계 사무소에 잠시······.”

그때 정은지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드시죠.”

“네. 고맙습니다.”

“설계 사무소에는 얼마나 계셨습니까?”

“두 달 다녔습니다.”

“하하. 혹사만 당하다 나오셨네요.”

“네, 하하.”

이광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한엔 1년 다니시다가 왜 관두셨습니까?”

“현장 일이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새벽 7시까지 현장 나와서, 하루 종일 땡볕 아래서 왔다 갔다······ 이러려고 4년 공부했나 싶기도 하고, 많이 어렸죠.”

“그때가 참 힘들죠.”

“예, 어릴 때라 그런지 사람한테 시달리는 것도 못 할 짓이더라고요. 그때 만나던 여자도 저 일하는 거 싫어했고요. 후후.”

“후후······.”

쑥스러운 듯 웃는 이광영, 고 차장도 따라 웃었다.

“호텔 시설팀 팀장은 어떤 일을 합니까? 제가 호텔 그런 쪽은 잘 몰라서.”

“시설물 관리하는 팀이었는데, 대부분 사람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전기 설비 만지시는 분들 관리하고, 객실 청소하시는 분들 관리하고, 엘리베이터 고장 나면 사람 부르고 뭐 그런 일입니다. 호텔이라고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저희 현장도 마찬가집니다. 9할이 사람 관리하는 일이니까요.”

“예.”

“계약 내용은 대충 아시죠?”

“예. 민 차장님한테 들었습니다.”

“아! 종기 소개로 오셨다고 하셨지······ 그럼 출근은 언제부터?”

“내일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댁이 대전이신데, 주변 정리 좀 하시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시는 거로 하시죠.”

“예. 감사합니다.”

“저 따라오세요. 일단 소장님 한 번 뵙고 가시죠.”

“예.”

회의실을 나서는 두 사람. 그때 마침 연 대리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연 대리.”

“예?”

“썰 이 자식 휴무는 언제 챙겨 먹는대냐?”

“글쎄요.”

“휴무 계획 다시 짤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 * *

며칠 후,

“이상 없습니다.”

계측 기사가 설건우가 설치하자고 주장했던 1단 스트러트의 변형률 측정을 마친 다음 말했다.

“이상 없어요?”

설건우가 따지듯 물었다.

“결과치 분석을 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이상은 없네요.”

“흐음.”

설건우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계측 기사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소장이 없음을 발견하고,

“기술자의 양심을 걸고, 이상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예. 제가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다 저희 업보죠. 업체 눈치 보고 데이터 조작해서 현장에 보내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까요. 이 일을 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은데, 거래처 유지하려면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수밖에요.”

“예. 이해합니다. 사실 현장에서도 원하는 게 그거니까요.”

씁쓸한 대화를 마친 계측 기사가 한 소장이 원했던 위치, 띠장에 설치한 센서를 케이블에 연결했다.

“흐음.”

설건우가 예측하건대, 내일 점심 즈음이면 그 사고가 났던 2단 스트러트를 거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계측은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되면 전생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계측 결과에 뭐라도 나왔으면 그걸 핑계로 잠시나마 공사를 미루거나 중단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제 그 방법은 물 건너가 버렸다.

칼춤만이 남았다.

일단은 내일 2단 스트러트 걸기를 전후해서 미친놈 소릴 듣더라도 사람들을 흙막이 아래로 못 들어가게 해야 한다.

“설 기사님!”

“예. 서 과장님. 오셨네요.”

“스트러트에 붙인 센서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이상 없답니다.”

“다행이네요!”

“지금 띠장 센서 확인하는 중인데.”

설건우와 감리 서 과장이 계측 기사 뒤편에 자리를 잡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어??”

계측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 센서가 고장 났나?”

계측 기사가 띠장으로 다가가 센서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이 없는데?”

“왜요?”

설건우가 물었다.

“이것도 사무실 들어가서 분석을 해 봐야겠습니다만 결괏값이 너무 나갔는데요?”

“얼마나요?”

“지난번 대비 이 수치라면, 최소한 20톤은 늘어났다고 봐야 되는데······.”

“20톤이요?”

“거봐! 이상 없지?”

상황을 모르고 다가오는 대흥 한 소장, 설건우의 표정을 보고는 뒤늦게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얼굴들이 왜 그래? 무, 문제 있어?”

한 소장이 물었다.

“이상한데요?”

“뭐어?!”

한 소장이 계측 기사를 향해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화산 현장을 끝으로 이 썩어 빠진 노가다 판 뜨고 말겠다고 결심한 계측 기사였다.

“분석을 해 봐야겠습니다만 저번보다 축력 20톤이 늘었습니다.”

“20톤?”

계측 기사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한 소장.

“큰일 났네요?”

“아! 설 기사!! 그러길래! 내가 띠장에 하나만 설치하자고 했지?! 이제 어떡할 거야!”

야만의 20세기 대한민국 공사판,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고 일단 울화통부터 터뜨리고 보는 대흥 한 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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