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량 콘크리트 (4) >
#126화. 불량 콘크리트 (4)
화산 일행에게 공장 검수와 동시에 접대까지 마친 박 부장, 기분 좋게 공장으로 돌아와 공장장실로 들어섰다.
“손님들 장어는 맛있게 드시고 가셨나?”
이마가 반짝이는 장년인, 공장장이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예, 공장장님. 자연산 장어에 복분자까지 저희 기본코스로 모셨습니다.”
박 부장이 자연스레 소파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잡숫고, 2차 가자는 이야기는 안 했던 모양이군?”
“심 과장이라는 친구가 뺀질거리기는 하는데, 엊그제 왔던 대한 애들처럼 지저분하게 노는 스타일은 아니더라고요.”
“다른 데 비하면 화산 직원들이 깔끔한 편이긴 하지.”
“뭐, 다른 놈들보다 간이 작다 뿐이지, 저희한테는 전부 똑같은 놈들 아닙니까.”
“그래도 요즘 화산이 품질이 좋으네, 기술이 좋으네. 말들이 많이 나돌지 않나?”
“광고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파트에 품질이 어디 있고, 기술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놈이 그놈이죠.”
닳고 닳은 영업 부장의 대답에 공장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약값은 얼마나 들었어?”
“석 장 넣어 줬습니다. 그리고 주유소 기름 쓰라고 알려 줬고요.”
“그걸로 되겠나?”
“현장 소장도 아니고, 품질 실장인데요, 뭐.”
“그래, 수고했네.”
“공장장님. 화산 현장 소장한테는 따로 약을 안 쳐도 괜찮을까요?”
“얘기했잖아. 그 소장이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 약 칠 생각 하지 말라고.”
“그래도 찝찝해서 말이죠.”
“관둬. 어설프게 약 치려고 달려들었다가, 우리가 뒤통수 맞는 수가 있으니까.”
박 부장 역시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고개를 주억이는 박 부장.
“할 얘기 없으면, 그만 나가서 일 봐.”
“예.”
공장장실을 나서는 박 부장. 얼굴에 음흉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오늘 말 한마디로 200만 원을 번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박 부장님?
“예! 심 과장님?”
―예. 접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전화를 주셨습니까?”
―박 부장님. 죄송한데, 잠깐 뵙죠. 저희가 다시 공장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뭐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박 부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감리 백 이사가 술이 깨는 바람에 2차라도 가기로 했나?
―그게 아니라 아까, 아니,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다 왔네요.
“예! 제가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공장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박 부장.
* * *
주차장에 도착한 설건우의 프라이드. 설건우가 주차를 마치고 내리려는데 심 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 기사. 넌 차에 있어.”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뭐? 내가 봉투 하나 못 돌려줄까 봐?”
“박 부장 그 양반, 보통이 아닌 거 같더란 말이죠.”
“박 부장이 보통이 아니면 나는 뭐 보통 같냐?”
“그건 아니죠.”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예.”
차에서 내리는 심 과장.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잠시 후, 박 부장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아니! 심 과장님!”
“예! 박 부장님. 또 뵙습니다. 하하!”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아까 공장 검수 때 확인 못 한 거라도 있습니까?”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공장을 둘러보는 심 과장. 박 부장이 그런 심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일단 저쪽으로 가서 말씀 나누시죠.”
심 과장이 공장 건물 구석, 자전거 보관소로 걸음을 옮겼다.
“허허. 이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자전거 보관함으로 이동한 두 사람. 심 과장이 슬그머니 아까 받았던 봉투를 내밀었다.
“박 부장님. 이거 다시 가져가시죠.”
“이걸 왜?”
물끄러미 심 과장을 바라보는 박 부장. 그러자, 심 과장이 박 부장의 재킷 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었다.
“아니! 시, 심 과장님 왜 이러십니까?”
돌아가는 길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건가? 장어를 먹으면서 이야기해 본 바로는 심 과장은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친구다. 이런 인사치레 백만 원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액수가 적다는 이야기일 터, 그럼 그렇지. 100만 원. 어쩐지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액수가 적으면 저희가 성의를 조금 더 넣어 보겠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심 과장이 콧잔등을 만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액수 문제가 아니라면, 왜 저희 성의를 이렇게 마다하시는지, 이유를 알아야 저희도 개선책을 찾을 거 아닙니까.”
“이유랄 게 따로 있는 건 아니고요.”
“따로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러십니까?”
“저희끼리 하는 성의 표시가 저기, 우리 막내 입맛에는 안 맞았나 봅니다.”
심 과장이 설건우가 타고 있는 빨간 프라이드를 바라봤다. 동우동 현장에 골 때리는 신입이 하나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저, 일머리가 조금 있는 똘똘한 신입 하나가 두각을 나타내는 건 줄 알았는데, 그 신입이 이 노가다 판을 바꾸자고 할 만큼 파이팅 넘치는 무모한 놈인 줄은 몰랐다.
물론 머지않아 현실을 깨닫고 이런 노가다 판에 순응하거나, 순응하지 못하면 곧 관두겠지만 당장 신입 앞에서 100만 원에 체면을 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제가 설 기사님 몫도 따로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쇼.”
박 부장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 하자, 그를 붙잡아 세우는 심 과장.
“아니! 아닙니다. 박 부장님. 지금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박 부장님.”
심 과장이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예. 심 과장님!”
“박 부장님이나, 저나 노가다 하루 이틀 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언제까지 노가다를 이렇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 설건우의 말에 꽤 감명을 받은 심 과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런 거 받고, 서로 편의 봐주고 이런 거 이제 그만하자, 그런 얘깁니다.”
“그, 그거야 관행 아닙니까.”
“관행이라고 해도, 외부에서 볼 때는 이게 관행이 아니라, 뇌물이거든요.”
“아니? 뇌물이라뇨! 심 과장님처럼 아실 만한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박 부장이 이렇게까지 약을 쳐 놓으려고 했던 걸 보니, 심 과장은 돌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야 알죠. 아는데, 저희 신입 눈에는 그게 아닌가 보더라고요.”
“아니! 저희가 심 과장님한테 무슨 대가 바라고 드린 것도 아니고, 하하. 인사차, 심 과장님 업무 수행하시는데, 조금 보태시라고 성의 좀 표시한 걸 갖다가 이러시면 저희가 서운하지요.”
그거야 약을 친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약을 받아먹은 입장에서 대가를 생각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 하자가 아니라면 좋은 게 좋은 거리고 그냥 넘어가 줄 수밖에. 약을 친 쪽에서도 이걸 노리고 약을 치는 거고.
“하하. 박 부장님도 참.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심 과장님!”
“그럼 저희 동우동 이든 파크 물량은 A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저희가 배합을 하다 보면······.”
“압니다. 알지요. 배합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요. 누가 그거 갖고 뭐라 한답니까? 그냥 신경 좀 써 달라는 얘깁니다.”
“예······.”
대답을 하고 나서도 영 개운치 않은 박 부장.
차에 오른 심 과장이 차창을 열었다.
“박 부장님! 들어가세요.”
“예······.”
설건우의 차가 출발하고, 난감한 표정의 박 부장.
레미콘 납품이야, 나중의 일이다. 당장 200만 원을 꿀꺽할 기회를 날렸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되돌려 받은 100만 원까지 해서 총 300만 원을 빼돌릴 수 있다. 하지만 박 부장은 이걸 꿀꺽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만에 하나, 뒤탈이 나게 되면 배달 사고가 밝혀질 위험이 있다.
아무튼 지금 수중에 들어온 100만 원 때문에, 조금 전 벌었던 200만 원이 날아간 박 부장이었다.
* * *
―드르렁. 드르렁
뒷좌석, 백 이사의 코골이가 들려 오는 가운데, 심 과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됐냐?”
지금 센터에 들어가 있는 차 수리비를 생각하면 아쉽긴 하지만 개운하기도 했다.
“저한테 고맙지 않습니까?”
“내가? 설 기사 너한테? 고마워? 장난하냐?”
“왜요? 제가 박 부장한테 코 꿰일뻔한 거 구출해 줬잖습니까.”
“야, 돈 백에 코가 꿰이긴. 개뿔.”
“백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받아먹은 이상, 사람 마음이 안 그렇다니까?”
“이 자식이, 이제 말이 짧다?”
“아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심 과장님, 기왕 뒷돈 받아 챙기려면, 저기 높은 분들 하는 것처럼 짤려도 먹고살 만하게 몇억은 챙기든가? 꼴랑 100만 원 챙겨서 어디다 쓴다고.”
막내의 일갈에 한없이 쪼그라드는 심 과장이었다.
“하! 이제 진짜 FM으로 시험할 거니까, 나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만 해 봐라.”
“그거야, 우리끼리 잘 풀어 나가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우리끼리 잘 풀어? 잘도 잘 풀겠다.”
“그런 거 단도리하라고 원청 직원이 있는 거 아닙니까?”
“두고 봐라. 이제 현장에서 나만 나쁜 놈 된다?”
“그거야 심 과장님 말씀대로 두고 보면 될 일이고. 심 과장님, 근데 구산양회는 왜 저렇게까지 한답니까?”
설건우가 넌지시 물었다. 물론 원가 절감하려는 레미콘 업체의 사정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전생 일꾼1이던 최 반장이 짐작하는 이유가 아니라, 품질 실장 심 과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레미콘을 제조하다 보면, 품질이 딸리는 레미콘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뭐 작정하고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만, 구산에서 미치지 않은 이상 그렇게까지야 하겠냐?”
“레미콘 품질이야 배합비대로 섞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
“어떻게요?”
이러는 거 보면 또 신입 같기도 하고.
“레미콘에 들어가는 골재와 모래 상태가 항상 일정하지가 않잖아? 골재랑 모래 상태에 맞게 배합비를 조금씩 조정해야 되거든.”
“아. 그렇군요.”
“근데 그것도 다 핑계야, 핑계. 다 필요 없고, 시멘트만 좀 많이 넣으면 열에 아홉은 해결되는 건데, 그 시멘트 조금 아끼려고 하다 보니, 품질이 개판이 되는 거지.”
설건우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원가 절감 때문이라는 소리.
“시멘트,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건 우리 생각이고, 레미콘 회사는 그게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는 설건우.
“내가 동우동 현장 오기 전에 골 때리는 놈이 한 놈 있다는 얘길 듣기는 했다만, 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
“심 과장님도 생각을 해 보세요. 저희가 짓는 아파트, 보통 서민들이 평생을 모은 돈으로 사는 거 아닙니까?”
운전 중인 설건우를 빤히 보는 심 과장. 듣기보다 재미있는 놈이다 싶은데,
“이 자식 이거, 너 노가다 할 게 아니라, 정치를 하지 그랬냐?”
“정치하는 놈들이 건물 올립니까? 노가다하는 사람들이 건물 올리지. 정치꾼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정책 내놓으면 뭐 하냐고요. 현장이 온통 사기꾼투성인데.”
설건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심 과장.
“그렇긴 하다만, 우리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짜로 해 처먹는 놈들은 전부 위에 있다고.”
“위에 놈들은 위로 올라가서 처리하는 거로 하고,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뭐.”
“그래. 너 그 각오, 얼마나 가는지 내가 똑똑히 지켜보마.”
“그렇다고 각오까지는 갈 건 아니고요.”
“뭐야. 이 자식 김새게!”
“각오같이 거창한 거 안 해도, 다 됩니다.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설건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