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이든 파크 입주 예정자
―백 이사님 출근하셨습니다.
이광영 과장으로부터 무전이 들려왔다. 되메우기 사태 관계자들의 시선이 고 차장을 향했다.
“후우······.”
선고를 앞두고 길게 한숨을 뱉어 내는 고 차장.
“고 차장님, 어떡하시려고요?”
연 대리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 없는 고 차장. 이 사태의 책임은 온전히 고 차장 자신의 몫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닙니다! 한 소장님!”
어디선가 나타난 설건우가 대흥 한 소장을 급히 불렀다.
“왜?”
“롤러 어딨습니까?!”
“롤러는 왜?”
“다지는 척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그래!”
곧장 무전기를 말아 쥐는 한 소장.
“안 대리! 1톤 롤러 가져와! 콤팩터도 가져오고!”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긴 어디야! 1동이지!”
―앗! 네! 넵!
“람마도 가져와!”
―람마는 기름이 없는데요?
“그래도 일단 가져와!”
―예!
잠시 후, 현장에 돌아다니는 다짐기계가 모두 1동으로 도착했다.
“어떡할까요?”
대흥 안 대리가 물었다.
“뭐, 국 끓여 먹으려고 가져왔어? 얼른 가동시켜!”
“람마는요? 기름이 없는데요?”
“콤팩터 기름 좀 빼면 되잖아!”
“예!”
잠시 후.
―두두두두두두!
―다라라라랏!
―투컹! 투컹!
1톤 롤러와 콤팩터 그리고 람마까지 세 가지 종류의 다짐기가 1동 주변을 다지기 시작했다.
대흥에서 다짐 쇼를 연출하는 동안 감리 백 이사가 터덕터덕 걸어 나왔다.
“!!”
어제 반나절 자리를 비운 사이, 3일 걸린다던 1동 되메우기 작업이 끝나 있었다. 백 이사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건 관계자들 모두 백 이사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고 차장이 백 이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고 차장?”
백 이사의 서슬 퍼런 시선이 고 차장을 향했다.
“이사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바짝 머리를 조아리는 고 차장. 이런저런 기술적인 이유를 나열하며, 층 다짐을 하지 않은 이유를 갖다 대는 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방금 뭐라고 했어?”
“죽을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알긴 알아?”
백 이사, 자신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슬렀다. 가타부타할 거 없이 그걸 죽을죄로 인정한 상황.
“죄송합니다! 백 이사님.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현장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든 말든, 고 차장은 시공사 공사팀장이라는 체면을 내던졌다.
“······.”
고 차장이 이렇게 나오자, 짐짓 당황한 백 이사. 시공사 공사팀장이 일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리 앞에서 이렇게 바짝 몸을 낮추는데, 아무리 감리라지만 시공사 공사팀장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연 대리한테 층 다짐 지시한 거 들었어? 못 들었어?”
백 이사가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더 할 말 없어?”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멀뚱히 고 차장을 바라보는 백 이사. 밑에 직원들이 모르고 그랬다며 발뺌하거나, 되메우기 품질이 어떠니 하며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댈 줄 알았다.
그런데 공사팀장이 곧장 잘못, 아니 죄를 인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백 이사의 화가 한풀 더 꺾였다.
“살려 달라?”
“예!”
시공사 현장 기사로 시작해 현장 소장을 거쳐 감리까지. 수십 년 세월을 현장에서 보낸 백 이사다. 시공사 공사팀장의 계산 정도는 훤하게 꿰고 있다.
“그러니까, 나 없을 때 되메우기 끝내 버리고 욕 한번 먹으면 남는 장사다, 이거지?”
“그게······ 예. 그렇습니다.”
고 차장의 대응에 흠칫 놀라는 대흥 한 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 반면, 백 이사는 퍽 대답이 마음에 든 눈치다.
“그래서 이제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이사님 지시 거스른 점.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라?”
“예!”
“어제 갖다 부은 거, 전부 다시 파내고, 되메우기 다시 하라고 하면?”
“백 이사님 의중이 그러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 이사는 현장의 다른 감리와 달리, 시공사 출신이다. 절차적인 하자는 있었을지언정, 기술적인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고 차장, 이 친구 이제 봤더니 아주 고단수구먼? 고단수야. 내가 뻔히 못 시킬 줄 알고 말이야.”
“아닙니다. 이사님이 지시하시면 당장 파내고 되메우기 다시 하겠습니다!”
“허허.”
다행히 고 차장의 작전이 먹혀들어 갔다. 백 이사의 얼굴에서 노여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사님, 어떡할까요?”
“잠깐 자리 좀 옮기지.”
현장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백 이사와 고 차장.
“다른 분도 아니고, 백 이사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노인네 띄워 주기 스킬을 시전하는 고 차장.
“이해는, 누가 이해한대?”
“저희끼리 하는 말이지만 저희보다야 백 이사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층 다짐?”
“예, 예.”
“그래. 당장 포장할 것도 아닌데, 층 다짐 그거 좀 생략해도 돼! 되는데 말이야, 나 같은 감리 입장은 또 다른 거라고.”
“제가 아직 식견이 부족해서 그런지 거기까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헤아리지 못하긴! 당장 공기 며칠 줄일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고 차장 눈 돌아간 거지.”
“마, 맞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고 차장.
“나야, 현장을 알고, 고 차장이 이렇게 이실직고 나오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는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분 같아서는 전부 파내고 다시 되메우라고 하고 싶네만 나 소장이 기초 바라시까지 해 가며 품질 관리 하는 현장인데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해서는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이사님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되메우기가 완료된 1동 주변을 바라보는 백 이사. 저걸 다시 파내고 되메우기를 다시 한다고 해서 품질이 나아지는 게 결코 아니다.
되메운 부지 위에 각종 다짐기를 가동 중인 현장을 바라보는 백 이사. 그 모습이 하도 같잖아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거, 저거! 다짐 빨 먹지도 않는 거, 그만하라고 해!”
“한 소장님! 다짐 스톱!”
고 차장의 지시에 다짐기 세 대의 시동이 꺼졌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쓸데없이 기름을 쓰나?”
“역시!”
“그건 그렇고, 쓰레기 같은 거 파묻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양질의 토사로만 되메웠습니다.”
“하긴, 다른 업체도 아니고 요새 화산이 그럴 리는 없지. 고 차장.”
“예.”
“고 차장이 이걸 알아야 해.”
백 이사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뭐 말입니까?”
“누군 공사팀장 안 해 봤나? 내가 고 차장 입장 모를 거 같아?”
“역시! 제 편은 백 이사님뿐입니다!”
고 차장이 열과 성을 다해 백 이사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되메우기시키니까 대흥 소장이랑 밑에 직원들이 좋다고 하지?”
백 이사가 속삭이듯 물었다.
“······예.”
“고 차장은 오야지 된 입장에서 총대 한 번 메기로 마음먹었고.”
“이사님께서 그걸 어떻게······.”
“이 사람아! 내가 고 차장 처지를 모를 거 같아?”
“고, 고맙습니다. 이사님!”
“그런데 말이야. 고 차장이 이걸 알아야 해.”
“말씀해 주십쇼. 한 수 배우겠습니다.”
“밑에 일꾼들 일하기 좋은 게, 그게 마냥 좋은 게 아니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일꾼들 말이야. 기껏 총대 메고 편하게 해 주면, 그렇게 일해 놓고 뒤에 가서 회사가 꼼수 부린다고 욕한다고.”
“아······!”
고개를 끄덕이는 고 차장.
“욕만 하면 다행이지. 저들이 그렇게 일해 놓고 신고하는 놈들도 있다! 이 말이야.”
“제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
“공사팀장이 공기 줄이기 바쁜데, 거기까지 생각을 했겠어? 당장 공기 3일 버는 것만 눈에 보였겠지!”
“역시, 제 처지 알아주시는 분은 백 이사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래 봬도 자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이 사람아!”
“하하! 맞습니다. 앞으로도 백 이사님한테 많이 배우겠습니다.”
“나 같은 퇴물한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대답과는 달리 감리 백 이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배울 게 없다뇨!”
“또, 또 아부 떤다!”
고 차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는 백 이사.
“들어 가십쇼!”
사태 해결을 마친 고 차장이 다시 사건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1동으로 갔다.
“고 차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대흥 한 소장이 물었다.
“작업 계속하시면 됩니다.”
“휴우.”
사건 관계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 일터로 흩어졌다.
“한 소장님!”
설건우가 한 소장에게 따라붙었다.
“그래! 설 기사 정산은 해야지! 그래서 몇 대가리면 되겠어?”
덤프, 백호, 용역 인부까지 3일 치 투입비, 최소 5백만 원을 벌었다. 백호 세대가리 정도는 내줘도 되지 않을까, 대흥 한 소장이 계산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뭐, 골조 올라가는 마당에 백호 대가리 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럼, 어떡하자고?”
“대흥 직원들이랑 기사님들 담뱃값이나 좀 챙겨 주세요.”
“웬일이야?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아삼육 사이에 무슨 계산입니까.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안 그래요?”
눈을 찡끗거리는 설건우.
“......”
백호 대가리 수보다, 돕고 살자는 설건우의 대답이 더 불안한 대흥 한 소장이었다.
* * *
동우동 화산 이든 파크 현장 소장실.
“전무님께서 예고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나용남 소장이 문 전무와 마주 앉아 있었다.
“불시 점검 차 나와 봤어. 우리 나용남이 말년이라고 농땡이 부리는지 감시도 할 겸 해서 말이지.”
“하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나오십시오.”
물끄러미 나 소장의 표정을 살피는 문 전무.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이제 미련 없다, 이거구먼?”
“전무님 덕분에 여태 붙어 있었으면 됐죠. 제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IMF 때 마지막 동기 둘이 잘려 나갈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 소장이었다. 나 소장이 살아남은 데에는 문 전무 입김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더 바라는 게 있기는 하고?”
문 전무가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요 몇 달 동우동 현장에서 우리 회사에 이바지한 게 좀 많아?”
브랜드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화산의 기술력을 만천하에 알린 흙막이 사고. 불량 레미콘으로 판정 난 구조물을 철거한 사건으로, 흙막이 사고 때 만큼은 아니지만 화산의 품질 관리 또한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문 전무님이라도 알아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허, 나 소장답지 않게 웬 겸손이야?”
“하하, 제가 그랬습니까?”
“자랑거리만 생기면 여기저기 전화 찔러 넣을 때는 언제고.”
“하하, 그게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전무님께서 알아주시니 말입니다.”
“내가 알아주면 뭐 하나?”
“전무님이 알아주신 덕분에 아직 붙어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더 알아주면, 더 붙어 있을 생각은 있고?”
문 전무의 말에 손사래를 치는 나 소장.
“만년 부장으로 회사에 더 붙어 있으라고요? 아이고, 전 일 없습니다!”
“누가 부장으로 붙어 있으래?”
“부장이 아니면 임원 자리라도 주시렵니까? 하하.”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임원이 될 직원들은 보통 차장, 빠르면 대리쯤에 윤곽이 잡히기 마련이다.
드물게는 입사와 동시에 학벌, 집안, 심지어 처가가 어디인지에 따라 임원 가능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나 소장은 임원과는 일찌감치 임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 좋게 문 전무의 눈에 드는 바람에 남들보다 조금 오래 회사를 다니고 있을 뿐이다.
“사장님께서 나 소장한테 무척 마음이 쓰이는 거 같더군.”
“그거야······.”
그때, 소장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관리 한 과장이 낯선 남자와 서 있었다.
“누구?”
나 소장이 물었다.
“저희 현장 입주 예정자 대표님이시랍니다.”
“입주 예정자 대표님?”
나 소장이 한 과장과 입주 예정자 대표라는 중년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현장 지나가는 길에 소장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고 하셔서요.”
“어······”
나 소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문 전무의 눈치를 살폈다.
“뭐하나? 어서 모시지 않고? 이쪽으로 앉으시죠.”
문 전무가 입주 예정자에게 소파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