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천세가 아닌 만세다
상선 김호중이 갑자기 바뀐 여론을 내게 알려 왔다.
“전하, 사대부들과 온 유림이 전하를 칭송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김호중의 음성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나를 칭송한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어떻게 나를 칭송한다는 것이냐?”
“유생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이르기를, 전하께서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을 간도에서 갚아 주셨으니 이는 만고의 어느 제왕도 하지 못한 일이며…….”
“그러하냐? 하하하!”
나는 크게 웃었다. 내 웃음에 상선도 소리 없이 웃었다.
여론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과 유림이 얼마나 망한 명나라를 사모하고 있고, 마지 못해서 상국으로 섬기고 있는 청나라를 증오하는지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이렇게 빠를 줄이야. 청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수백 년 전에 없어진 명나라의 은공을 갚겠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기대 이상의 효과로 즉시 나타나다니.
이렇게 되면 조선의 여론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이 생겼다. 서원 철폐로 내게서 떠난 유림의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간도에서 돌아오는 군사들 앞에서 한 짤막한 연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나는 신료들과 군사들 앞에서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불렀고, 이미 이백 년 전에 이자성의 반란과 숭정제의 자살, 청나라의 침공이 이어지며 멸망한 명나라를 언급했다.
사실 명나라는 조선에게 은혜를 베푼 나라였다.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분명히 조선은 일본에게 망했을 것이다.
물론 명나라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우며 명을 침공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언에 놀라서 왜군과 싸울 전장으로 명이 아닌 조선을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설령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이유에 명나라 조정의 그런 이기적인 판단이 앞섰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왜군을 조선에서 몰아낸 것은 명나라 군대의 힘이 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조선 최고의 장군인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왜군의 보급을 끊은 것이 왜란을 조선이 승리로 가져간 결정적인 이유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에 조선의 지배 세력인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더구나 왜란 이후에도 당시 명의 황제였던 만력제는 조선의 식량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식량 수백만 석을 제공하는 등으로 조선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 무능한 황제라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조선을 돕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발 벗고 도울 정도로 조선에게는 분명히 고마운 황제였다.
역사와 야사에 의하면, 제위 내내 황음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던 만력제는 조선에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서 군대를 파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때문에 명은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게 돼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이어서 명은 이자성의 반란에 수도인 북경이 함락되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의 장군인 오삼계가 청군의 도움을 받으려 만리장성의 철옹성인 산해관의 문을 열어 청군을 불러들임으로써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게 결국 나라를 잃게 되었다.
상선 김호중이 내게 물었다.
“전하, 어제 군사들 앞에서 말씀하신 어의는 진심이시옵니까?”
임금인 내 속내를 대놓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내 그림자인 상선 김호중뿐이었다.
“호중아, 뭘 말이냐?”
“청국에 망한 명나라의 한을 씻고 명 황제의 은혜를 갚겠다는 말씀 말이옵니다.”
“당연히 진심이지.”
나는 웃으며 솔직히 속내를 말했다.
“호중아, 명나라는 이미 없어진 지 이백 년이나 지난 나라가 아니냐. 실체가 없는 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고 말해서 손해를 보는 것도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 못 할 것이 무엇이냐? 내 그런 말이라면 백 번, 아니 천 번도 할 수 있다. 하하!”
“전하, 멸망한 명나라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백 년 동안이나 임진왜란 때 입은 그 은혜를 마음에 담은 나라입니다. 전하께서 명에 대해 은혜를 갚는다고 하시니, 이제는 이 나라 조선의 모든 사대부와 유림들의 마음을 잡으실 겁니다. 전하, 이참에 조선 온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소서. 전하께서 하시려는 개혁에 백성들이 기꺼이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상선 김호중은 그동안 서원 철폐 등으로 유림 세력을 제거하면서 사대부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오냐, 내 그리할 것이다.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야. 청나라 오랑캐들에게서 받은 이백 년 전의 굴욕을, 조선의 백성들이 겪은 그때의 그 참담한 고통을 다시 청나라 놈들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내 백성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게 할 것이다.”
“전하…….”
김호중의 음성에 감격의 물기가 어렸다.
도승지 박규수가 들어왔다. 박규수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전하, 시급히 올릴 말씀이 있나이다.”
“무엇이오?”
“청국 장군 동강위가 자진을 하려고 했사옵니다.”
“자진? 자살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청국 장군 동강위는 써먹을 곳이 많은 포로였다. 나는 포로로 잡은 동강위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로 청국과의 협상을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동강위가 죽는다면 이런 내 구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이러면 나가리인데?”
당황한 나머지 현대에서 평소에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던 때의 말투가 무심코 튀어나왔다.
“전하, 무슨 말씀이시온지?”
“아니, 아니오. 이런. 그래, 동강위는 어떻게 되었소? 죽었소?”
“다행히 목을 매자마자 발견해서 생명은 무사하옵니다.”
“동강위가 어찌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는 말이오?”
“전하, 그것이…….”
박규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포로로 잡은 동강위에 대한 심문과 조사를 도승지 박규수에게 일임해 두었다. 그런데 자살 소동이라니.
동강위는 소중한 포로였다. 출신이 청국의 귀족에다가 황실의 사위였다. 더구나 만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봉천 장군이었다.
절대로 동강위의 신변에 이상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의원을 보내서 동강위를 보살피도록 하시오. 동강위가 회복이 되거든 도승지가 직접 가서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오시오.”
*
박규수가 다음 날에 동강위의 일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래, 동강위는 어떻소?”
“다행히 기력을 회복했나이다.”
“말해 보시오, 도승지. 동강위가 왜 자살을 하려고 했소?”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이 동강위를 직접 대면한 결과 동강위가 말하기를, 자신을 언제 죽일 것이냐고 물었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동강위를 죽인다는 말이오? 혹시 누가 그런 망언을 하기라도 했소?”
혹시나 심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아니옵니다. 동강위를 조사하는 관헌에게 특별히 소신이 주의를 하라고 일러 두었고, 이 일로 물으니 누구 하나 동강위에게 그런 압박을 가한 사실도 없다고 했나이다.”
“동강위에게도 물어보았소?”
“그렇사옵니다. 동강위 역시 그런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그러면 도승지.”
“네, 전하.”
“동강위는 어째서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오?”
처음에 동강위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승지 박규수의 온화한 인상과 부드러운 말에 마음을 움직여서 불안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동강위는 태평천국에 붙잡힌 청국의 고관들과 장군들이 모두 심문을 받는 중에 고문을 당하고 나중에는 처형을 당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도 그렇게 고문까지 받고 죽기 싫으니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고 했다.
박규수는 동강위에게 심문과 조사에 협조만 한다면 절대로 고문은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약속은 임금의 어명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박규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동강위를 살리라는 명을 해 둔 상태였다.
가지고 있는 고급 정보는 물론이고, 동강위는 황실의 일족으로서, 인질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자였다. 게다가 나는 동강위를 방패막이로 삼아서 당분간 억류할 생각이었다.
내 의지와 박규수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동강위는 더 이상 자살극을 벌이지 않았다.
조정 내에서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동강위와 허숭을 포로로 잡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청국 포로들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나는 동강위의 처소를 기와집으로 옮겨서 침식 수발을 드는 사람까지 붙여 편하게 있게 했다. 군졸을 배치해서 엄하게 감시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 동강위의 일을 전해 들은 다른 포로인 허숭이 심문에 응하지 않았다.
허숭은 자신도 버티면 동강위처럼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판단에 조사를 받으면서도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심지어 청국의 고관인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심문하는 관리에게 호통을 쳤다.
허숭은 조선의 임금이 특별히 동강위를 대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도 곧 그런 편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하고 머리를 굴린 것이다.
그러면서 허숭은 자신이 알고 있는 청국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는 조금씩만 흘렸다. 그러더니 대접이 시원치 않자 더 이상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
이레가 지났다. 허숭을 조사하는 심문관들이 지쳐 갈 즈음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나는 애초에 동강위처럼 허숭을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동강위와 허숭은 같은 포로였지만 신분과 입지가 달랐다.
나는 청국의 고관을 죽임으로써 조선의 사대부들과 유림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고, 한편으로는 청국 황실의 일족인 동강위를 후하게 대해 청국과 협상의 여지를 남길 요량이었다.
허숭은 이전의 간도 협상에서 조선을 업신여기고, 조선의 대표들에게 임금인 나를 가리키며 모욕을 안긴 자였다. 신료들 사이에서 허숭이 지난날에 청국 사신으로서 보인 거만하고 오만방자한 말과 태도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허숭 이놈을 죽이지 않으면 신하들 앞에서 내 체면이 서지 않을 거야.”
나는 김호중 앞에서 대놓고 말했다.
상참을 열었다. 청국의 고관 허숭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을 모든 신료들에게 알렸다. 동강위의 신변에 관한 것은 계속 비밀로 유지했다.
신하들이 내게 일제히 청을 올렸다.
“전하, 허숭이란 자가 비록 청국의 고관이라고는 하나 그자가 보인 사악한 오만방자함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전하, 허숭을 죽이시옵소서!”
“전하, 청국 고관을 죽여 청국과 단절하려는 전하의 성심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소서!”
“아무리 전쟁터에서 잡은 포로지만 청국의 고관인데, 마음대로 처형해도 되겠소?”
대신들 사이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뒤탈을 우려함이었다. 하지만 이내 의견은 대세에 묻혔다.
“전하, 허숭이 비록 청국의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를 능욕하고 조선을 업신여긴 자입니다. 전하, 허숭을 살려 주시면 전하와 조선의 명예가 만천하에 떨어질 것임을 유념해 주소서.”
“유념해 주소서!”
“전하, 허숭을 살려 두시면 아니 되옵니다. 윤허해 주소서!”
“윤허해 주소서!”
“경들의 의견이 모두 그렇다면 내 윤허하리다.”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서 나는 허숭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러고는 허숭의 처형을 백성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서소문 앞에서 공개 처형 하라고 일렀다.
허숭의 처형을 알리는 소식이 도성의 관청과 한양의 저잣거리마다에 방으로 붙었다. 방을 붙인 것은 일부러 내가 내린 명이었다.
“임금님께서 정말 청나라 오랑캐들과 사이를 끊으실 모양이야.”
“설마 했는데 진심이셨네.”
“나는 전부터 전하를 믿었네. 이제야 조선이 오랑캐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난 걸세.”
간도에서 잡아 온 청국의 고관을 처형한다는 소식이 도성 안팎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직접 눈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서소문 앞에 차려진 형장 앞은 물론이고 근처에까지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양반에서부터 상민과 상인, 여인들은 몰론이고 아이들까지 마치 축제를 즐기려는 것처럼 처형 순간을 보기 위해 모였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마침내 허숭의 목이 망나니의 칼에 떨어졌다.
“만세!”
“주상 전하 만세!”
청국의 사신을 지낸 고관 허숭의 처형장에서 천세가 아닌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세를 처음으로 소리친 사람은 괴짜 시인 정수동이었다. 정수동의 선창에 따라서 그의 무리가 복창을 하며 만세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어리둥절한 구경꾼들 사이에서 양반들이 술렁거렸다.
“천세가 아니고 만세라니?”
“만세? 이건 황제에게나 올리는 말이 아닌가?”
“그러게 말일세. 만세라니? 이거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
“몇 사람이 만세를 부른 걸 가지고 뭘 생각하나? 방금 청국 고관의 목이 떨어졌네. 이게 중요하네. 전하께서 오랑캐와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오늘 백성들 앞에서 만천하에 분명히 알리셨지 않은가?”
“어허, 오늘이야말로 조선에 희망이 보이는 날일세. 조선 팔도에 광명이 비치는 날일세.”
“맞네. 이제야 조선은 오랑캐로부터 벗어난 걸세. 이보시게들, 우리도 주상 전하를 위해 천세를 부르세.”
“천세!”
“천세! 주상 전하 천천세!”
“만세! 만만세! 주상 전하 만만세!”
만세 소리와 천세 소리가 한양의 온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청국 고관을 죽인 처형장에서 시작된, 이백 년이 넘도록 억눌렸던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증오와 묵은 원한의 한풀이가 임금을 향한 칭송으로 바뀌어 갔다.
청국 고관을 처형한 소식은 바람을 타고 조선 팔도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조선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