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일본에서 온 소식 (1)
간도로 백성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조선 고을마다에 여러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소작인들에 대한 양반 지주들의 처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만 해도 양반 지주들은 소작을 떼게 되면 소작농들이 생계를 잃고 사회문제가 되면서 당황한 조정과 임금이 굴복해 몰수한 은결을 되돌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임금인 내가 양반 지주들에 대해 강제로 소작인들을 다시 고용하라고 강제하지 않자 이들 지주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임금이 결국은 양반 지주들의 편에 설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보원을 담당하고 있는 정수동의 보고도 그랬다. 양반 지주들은 내가 그렇게 슬그머니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을 한 듯했다.
은결을 돌려 달라니. 웃기는 일이지. 은결을 돌려주면 나는 어떻게 먹고살라고.
김정호가 공조와 호조의 관헌들을 데리고 전국을 발품을 들여 돌며 조사한 대로 조선에서 경작이 가능한 토지의 거의 절반이 은결이었다.
그 많은 땅을 돌려주면 종잣돈이 없는 내게는 개혁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숨긴 땅 은결 몰수에 대한 양반 지주들의 저항인 소작농들에 대한 해고는 내가 생계를 잃은 소작인들을 간도로 이주시키면서 잠잠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양반 지주들의 땅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끈질겼다. 땅을 가진 이들 사대부와 유림들과 한 몸이거나 이들과 결탁한 조정 신료들이 상참에서 다시 은결에 대해 거론을 하고 나섰다.
“전하, 은결은 선대왕 이전의 역대의 제왕들도 인정하신 관행이고 관습이옵나이다.”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 이명적이 양반 지주들의 편에 서서 은결에 대한 여론을 다시 주도하고 나섰다.
“지금 뭐라 했소?”
“전하, 짧게는 양반 지주들이 은결로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동안에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이유가 있사옵니다. 전하, 역대의 제왕들이 은결을 굳이 드러내서 세금을 징수하지 않은 것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사옵니다.”
“그 합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
“전하, 이 나라 조선의 근간은 사대부와 유림이옵니다. 전하, 은결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사대부들과 유림은 생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학문을 닦아서 전하와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쳤나이다. 이제 전하께서 은결을 모두 회수하시니, 사대부와 유림은 생계를 위해 학문을 버리고 직접 농사를 짓거나 장사치들이나 하는 짓을 하며 이익을 좇을 것입니다. 전하, 이것이 어찌 성리학을 따르는 사대부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이것이 어찌 군자의 도리를 따르는 나라의 법도라고 할 수가 있겠나이까.”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 이명적이 작심을 하고 뱉은 발언에 놀란 대신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사대부와 유림이 학문을 닦기 위해서 재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니 은결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대부와 유림은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인 은결로 먹고살아야 한다 그거요?”
“전하, 그러하옵니다.”
“내 그러면 그리할 것이오. 은결을 돌려주겠소.”
신료들이 크게 놀라서 술렁였다.
“전하, 그것이 참이옵니까?”
“그렇소. 내 어찌 임금으로서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겠소?”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말 한마디로 양반 지주들이 강제로 내놓은 은결을 다시 찾았다고 착각한 대사간 이명적이었다.
내 말에 대신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은결을 돌려준다는 것은 왕권의 후퇴를 의미했다. 임금의 권력이 사대부와 유림에 눌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설마.
대신들은 믿지 않았다.
두 차례의 반란을 자신의 힘으로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한 패기 넘치는 젊은 임금이었다.
은결을 다시 양반 지주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왕권이 이전 안동 김씨 세도 정치 시대처럼 나약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신료들이 숨을 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다.
“단!”
이어질 내 말에 신료들이 마음을 졸였다. 대사간 이명적만이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임금인 나를 보며 기대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사대부와 유림들의 추앙을 받는 위치에 설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나는 이명적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고 있었다.
그래, 오늘이 바로 네가 임금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은결은 돌려주겠소. 대신에 그동안 은결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지 않았던 세금을 내시오. 세금은 정확히 셈을 해서, 관아의 토지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은결의 기한이 십 년이면 십 년치 세금을, 백 년이면 백 년치의 세금을 내시오. 물론 밀린 세금을 모두 내지 않는 자는 그만큼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래도 세금이 부족한 자는 죄를 엄히 묻겠소. 그러고도 이에 불응하는 자가 있거든, 나는 저들을 이 나라 조선의 세금을 도적질한 자로 간주해서 역도로 생각하겠소. 어떻소이까, 대사간. 내가 경의 주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대사간 이명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시간 이후로 은결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는 그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버린 자로 취급해서 중벌에 처할 것이오. 경들은 들으라. 백성이 땅을 가지고 있으면 세금을 내는 것이 백성의 도리인데, 은결을 가지고 있던 사대부와 유림은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내가 한 번 저들이 나라에 행한 불충한 짓을 감추어 주고 은결을 나라에 바친 것으로 그동안에 탈세한 것을 용서해 주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토지를 되돌려 달라고 하는 것은 임금인 나를 능욕하고 조정을 모욕하는 것이니 이는 역도의 행동과 다름이 없다. 경들은 내 말에 틀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하, 전하의 말씀이 모두 합당하고 옳사옵니다.”
“전하, 그러하옵나이다!”
신료들이 일제히 내 뜻에 동조했다. 이명적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이명적을 이제 보지도 않고 무시하고는 계속 말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백성은 이 나라 조선에 노비만 있을 뿐인데, 양반 지주들은 토지를 숨기고 세금을 내지 않았으니 저들의 소행은 노비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대사간의 주장처럼 이 나라 조선을 이끌어 가는 것은 사대부와 유림인데 어찌 사대부와 유림이 세금 한 푼도 내지 않는 노비처럼 군다는 말인가? 이것은 분명 양반 지주들이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거나 노비로 살기를 자처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것은 역도의 무리들이니 역모로 다스리면 그만일 것이고, 자신들을 노비라고 생각하면 노비로 만들어 주면 될 것이다.”
“전하…….”
신료들 일부가 입을 열려다가는 임금인 내 얼굴이 굳어 있음을 보고는 다시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다.
“역적 이명적을 당장 끌어내라!”
이명적이 끌려 나가면서 소리쳤다.
“전하, 사대부와 유림들이 등을 돌리면 누구와 종사의 일을 논할 것이옵니까?”
내가 호통쳤다.
“백성을 갈취하고 세금도 거부하는 도적 같은 탐욕한 사대부와 유림은 내게 필요 없다!”
신료들이 충격을 받은 듯이 표정들이 얼어붙었다.
나는 조선의 절대적인 기득권층인 사대부와 유림, 양반 지주들에게 빚이 없는 사람이었다.
군사 반란에서도 임금의 옥좌를 나 스스로 지켰다. 권력 역시 안동 김씨 세도로부터 찾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사대부와 유림으로 통칭되는 양반 지주들의 집요한 또 한 번의 반격은 이렇게 끝났다.
나는 유림과 양반 지주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 너희는 필요 없어.
이제 조선의 주인은 너희가 아니야.
내게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조선의 주인은 누구야. 백성이야? 그럴 리가. 잘 알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임금인 내가 바로 조선의 주인이었다.
상참을 끝내기 전에 내가 대신들에게 말했다.
“경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오. 경들이 앞으로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만을 생각하시오. 내게는 그런 신하들만이 필요하오.”
신료들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은결 문제로 더 이상 정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대사간 이명적을 파직하고 장 일백 대를 쳐서 절해고도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명적의 집안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명적이 유배를 가는 도중에 매를 맞은 몸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팔도에 어명을 내려서 은결을 돌려 달라고 주장을 하는 양반 지주들은 관아로 압송해서 장 일백 대로 가차 없이 다스리라고 명했다. 그것은 곧 죽이라는 뜻이었다.
장 일백 대를 맞으면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은 십중팔구였다. 내 어명에 양반들 중에서 은결을 돌려 달라고 나서는 이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가진 것, 먹을 것이 있는 양반 지주들은 이제 임금인 내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재물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을 걸 만큼 바보 같은 자는 없을 것이다.
간도로 이주하려는 백성들이 여전히 도성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는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소작인들을 잡아 두기 위해 양반 지주들이 소작료를 낮추고 잡세를 물리던 관행도 없애고 있어 소작인들의 처우가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땅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는 백성들은 늘어만 갔다.
나는 호조와 공조의 관리들을 차출해서 간도사라는 임시 관청을 만들고 간도 이주를 계속 독려했다.
조선의 인구가 지금 팔백여만 명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 공식적으로 보고된 수치일 뿐, 나는 역사의 연구 기록을 통해 이즈음의 조선 인구가 일천육백만 명을 상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 팔도에 천육백만 명의 사람이 곡식 농사에만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나라 경제가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흉년이라도 닥치면 백성들이 굶는 것은 당연했다.
상업을 독려하고 공업을 육성하고 싶어도 조선 백성이 모두 농업에만 매달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라를 발전시키고 싶어도 그 한계가 있었다.
백성들을 농사일에서만 전적으로 매달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래서 백성들의 간도 이주를 더욱 독려했다. 간도에 많은 사람을 이주시켜서 영구적으로 조선의 영토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조선에서 백성들이 오직 벼를 심어서 쌀로 먹고살아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의도였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논에 볍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가을이 오면 벼를 추수해서 쌀로 밥을 지어 먹고, 삼베로 실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고, 술을 빚어 마시면서 세상을 사는 것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아니, 조선 사대부들과 조선 유림들의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안빈낙도라는 것이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도(道)를 즐긴다는 뜻이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에 찬사를 바치는 이것이야말로 한마디로 가난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가.
공자와 맹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가난하게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도리를 지키려는 삶의 철학인 안빈낙도의 생활.
그마저도 자기 땅이 있고 가을 추수 때마다 넉넉한 양식을 곳간에 쌓아 둘 수 있는 양반들의 삶에 한정되었다.
양반 지주들을 대신해서 고된 농사일을 하는 백성들은 간신히 배를 채우는 삶을 사는 처지였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뼈가 빠지는 수고로 생산한 쌀 대신에 보리와 콩을 비롯한 잡곡으로 배를 채웠다. 수확한 쌀은 토지의 주인이자 자신들의 주인인 사대부와 양반 지주들의 차지였다.
사대부들과 유림들이 이상으로 치는 농사로만 먹고사는 안빈낙도의 생활.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하다는 안빈낙도의 이상은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사대부들과 유림의 생각은 내게는 거지꼴로 살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바깥세상은 눈이 부시게 변하고 있는데, 조선은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고정관념을 어떻게든 깨야 했다.
조선의 온 백성이 농업에만 매달려 있었다. 농사를 짓는 토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효율적으로 농사일도 개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조판서 최한기와 공조참의 김정호를 편전으로 불렀다. 참의 김정호가 내가 일렀던 팔도의 저수지 현황을 내게 보고했다.
지난해부터 집중적으로 시행한 수리와 관계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최 대감과 김 참의는 수리 사업이 정리가 되는 대로 한양의 도로 정비에 착수하시오.”
“전하, 공역을 벌이자면 백성들의 노역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리되면 백성들 삶이 고단할까 염려가 되옵나이다.”
백성의 어려움부터 생각하는 최한기였다. 이래서 내가 최한기를 좋아했다.
“예전처럼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라는 게 아니오.”
“전하, 하옵시면?”
“노역에 나오는 백성들에게는 노역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오. 쌀이건 돈이건 정당한 노역만큼 대가를 주란 말이오.”
김정호가 속으로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최한기가 고개를 조아렸다.
“또한, 앞으로 조선 팔도에 수레가 오갈 수 있는 큰길을 내야 할 것이니 김 참의는 이를 준비하라.”
김정호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김정호는 이튿날부터 조선 팔도에 낼 도로에 대한 조사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지시한 큰길은 지금까지 짐을 진 보부상들이 걸어서 오가는, 겨우 사람 둘이 오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수레와 우마차가 교차하면서 지나갈 수 있는 큰길을 의미했다.
나는 앞으로 활발해질 조선의 상업과 공업을 위해 도로부터 만들기로 했다. 도로를 만드는 조사에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큰 사안이었다. 더구나 도로를 제대로 만들려면 막대한 재원이 들어갈 것이다.
조선 팔도에 없는 도로를 새로 만드는 것은 돈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는 대역사였다.
어디에서 그 많은 돈을 마련한다지. 나는 궁리를 해 보았지만 지금 당장으로써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도승지 박규수와 최성환을 불러서도 상의를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도로 건설에 쓰일 재물이 나올 곳이 어디에 있을까를 몇 날을 궁리하는 동안에 일본으로부터 사신이 왔다는 소식이 왔다.
장계를 들고 도승지 박규수가 편전에 들었다.
“전하, 일본의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왔사옵니다.”
“일본? 막부? 무슨 사신?”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장계를 펼쳐 보았다.
“흑선?”
아!
장계에서 흑선(黑船)이라는 두 글자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내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쳤다.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거다, 바로 그거야! 으하하하!”
나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