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망나니 철종-140화 (140/295)

#140화 금보다 비싼 조선 인삼

대궐의 편전으로 호조판서 김영작을 불렀다. 도승지 박규수가 자리에 함께했다.

“전하, 상해에 인삼을 판매할 상점들을 마련했습니다.”

“인삼은 언제부터 판매할 생각이시오?”

“다음번에 오는 프랑스 증기선 편으로 준비한 인삼을 실어 갈 예정입니다.”

“구매처는 확정해 두었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상해의 여러 상인들과 북경의 상인들이 배를 타고 상해 현성으로 들어와서 조선 인삼의 판매를 요청했나이다.”

“상해의 오건창은 어떻소? 협조를 잘하고 있소?”

청국 상해의 장관은 도대 오건창이었다. 오건창은 역사에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매판 관료였다.

당연히 상해 현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 협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오건창은 조선이 상해를 거점으로 조선 인삼의 판매에 들어가자 적극적으로 조선 관리들에게 접근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건창은 조선의 인삼 판매에 끼어들어 잘하면 큰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조선이 상해 현성에 인삼을 파는 상점을 개설한다는 소식에 오건창은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장강(양자강) 일대의 청국 상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조선이 상해 현성에 터를 잡고 조선 인삼을 판매한다는 소식은 오건창의 인맥을 타고 장강의 상인들을 거쳐서 천진과 북경으로 전해졌다. 그러자 북경의 약제상이 크게 술렁거렸다.

그동안에 조선으로부터 들어오는 조선 인삼의 공급은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인삼이 의주에 있는 조선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상점을 통해서 청국에 공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청국 북경에서 소비하는 인삼의 수요에는 역부족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인삼을 구하기 위해 일부 상인들이 밀수를 통해서 조선으로부터 인삼을 들여오기는 했지만, 북경의 상인들은 북경 일대의 약제상은 물론이고 인삼을 찾는 그 어느 부호의 집에도 인삼이 들어간 보약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청의 황실마저 황실 금고에 보관 중인 인삼의 재고가 떨어져 가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조선 인삼의 가격은 지난해부터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다.

북경 일대의 대부호들에게서 의뢰를 받은 약제상들은 천금을 주고서라도 조선 인삼을 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이 상해 현성에 점포를 열고 인삼을 판매한다는 소식이 북경에 날아들었다.

그러자 북경의 약제 상인들과 부호들이 일제히 은화와 금괴를 챙겨 천진으로 달려가서 배를 타고 상해를 향해 출발했다.

이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 줄을 지어서 상해 앞바다를 지나 상해의 황포강으로 밀려들었다.

“저 배들은 뭐야?”

상해의 영국과 프랑스의 조계에 머무는 서양인들이 강변으로 나와서 흥미로운 눈길로 황포강으로 밀려오는 청국의 돛단배들을 보며 청국 통역들에게 물었다.

“조선 인삼을 사러 오는 청국 상인들의 배입니다.”

“조선 인삼? 그게 뭐기에 저렇게 많은 배가 몰려와?”

“조선 인삼은 하늘이 내린 불로장생의 선약입니다.”

“불로장생? 늙지도 않고 오래 산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인삼은 불로초입니다.”

“불로초라? 나도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네. 그 옛날에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다는 동쪽에 있는 전설의 나라. 그 나라가 조선이라는 나라라니?”

영국의 신임 공사인 보우링이었다. 보우링은 전임 공사인 조지 본햄의 뒤를 이어서 광동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직후였다.

보우링은 청국의 배들이 황포강으로 앞을 다투어 밀려오는 장관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해의 현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육지와 해상이었다. 해상은 지금 청국의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오거나 올라가서 상해의 황포강 줄기를 따라 현성에 닿는 길이고, 육로는 물길인 동편이 아닌 북과 남, 서편의 길목에 모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해 현성의 서편은 태평천국과 청국의 관군이, 북쪽은 영국과 미국의 조계가 가로막고 있어서 청국 상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청국의 상인들은 청국 관군이 지키는 곳을 피해서 다녔다. 부패한 청국 군대와 관리들이 청국 상인들에게 태평천국과의 대치를 이유로 들며 막무가내로 길을 터 주지 않고 과도한 통행세를 요구하거나 상품을 마구잡이로 약탈해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 지금의 청국 군대는 태평천국이나 소도회만큼은 아니어도 도적 떼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남쪽에서는 조선군에 패주한 소도회의 무리가 여전히 길목을 지키고 있어서, 상인들이 남쪽 길을 이용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으로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전 같았으면 북경의 상인들은 가장 안전한 길인 영국의 조계를 통해서 상해 현성으로 가는 길목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영국 조계로 통하는 길은 막혔다.

새로 청국 주재 영국 공사로 부임을 해 온 보우링이 청국인의 영국 조계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보우링은 올해 1월에 보수당에 이어 영국 내각을 장악한 휘그당의 파머스톤 수상의 친구로, 청국에 대해서는 강경론자였다.

파머스톤은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친구인 보우링을 청국에 보내서, 보수당이 집권했던 지난해까지와는 다르게 매우 적대적으로 청국을 압박했다.

보우링은 임지인 홍콩에 도착하자 마자 광동에서 청국의 고관을 만나서, 청국이 1차 아편전쟁 이후에 체결한 남경(난징) 조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트집을 잡으며 청국에 새로운 조약의 체결이나 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보우링은 청국에 아편의 합법화, 양자강 유역을 비롯한 청국의 모든 지역에 영국인이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여기에다가 상품 무역에 대한 관세의 철폐까지 요구하는 등으로 청국 조정을 협박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인삼을 사려는 북경 상인들의 배가 상해를 가로지르는 황포강으로 진입하자 보우링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혹여 청국 상선들에 영국의 조계를 공격하려는 청국의 병사들이 승선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지금도 영국은 전 병력을 투입하다시피 하면서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느라 청국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영국의 조계는 지금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보우링의 옆에서 영국군 장교들이 망원경으로 배들을 살피고 있었다.

황포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청국 상인들의 배가 계속 늘어나자 불안해진 보우링은 결정을 내렸다.

보우링은 통역과 호위 장교를 대동하고 조선이 장악하고 있는 상해의 현성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청국의 배들이 실제로 조선의 인삼을 사기 위해 상해로 오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이 상해에서 인삼을 판매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이미 상해 전역에 퍼져 있었다. 현성 안 역시 마찬가지로 벌써 청국의 여러 지역에서 온 약제상들의 발길로 붐비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 인삼이오? 으하하하!”

조선 인삼을 본 북경의 상인이 인삼을 손에 들고 기뻐서 들뜬 나머지 크게 웃었다. 그렇게도 구하고 싶던 인삼을 이제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에 상인들은 떠들썩거리며 얼굴에 웃음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

인삼은 옛날부터 동양의학에서 신비의 명약으로 평가받는 약제였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자연산인 산삼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에 조선은 인삼을 사람이 재배하기에 이른다.

조선이 인삼을 홍삼(紅蔘)으로 가공해서 상품의 품질을 높인 것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생삼인 인삼의 보관 문제를 증폭(蒸暴)을 통해서 해결했다. 생산한 생삼을 찌고 말리는 기술인 증폭으로 홍삼으로 만들면서 인삼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게 되자, 인삼은 청국에 언제든지 팔 수가 있는 고가의 상품이 되었다.

이에 1797년 정조 21년에 조선은 청국과의 인삼 무역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그러자 19세기 초엽부터 청국이라는 거대한 판매 시장을 확보해 인삼의 재배는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정조 때 근당 은화 25냥이던 인삼은 청국에 인삼 열풍이 불면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청국에 판매되는 인삼의 가격은, 정부의 인삼에 대한 공식 명칭인 포삼(包蔘)이라 불리는 홍삼을 기준으로 근당 중국의 순 은화인 천은 3백 냥에 이르렀다.

순조 때에는 인삼 가격이 더욱 폭등하면서 근당 천은 7백 냥까지 치솟았다. 이는 인삼 한 근인 약 750g을 사기 위해 은화 약 26kg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청국과 서양의 금 대비 은의 비율이 대략 1 대 16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인삼이 금보다 무게 대비 2배 정도의 가치로 평가받고 있었다.

19세기에 조선의 인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최고의 상품이었다.

역사에서, 조정에서는 수출 인삼(홍삼)에 대한 세금으로 헌종과 철종 때인 1841년과 1851년에 근당 5냥에서 4냥을 거두었는데, 해마다 15만 냥에서 23만 냥이 인삼에서만 세수로 걷혔다.

이 액수는 조선의 호조가 1년에 쓰는 재정(20여만 냥)과 거의 같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조선의 상인들과 해마다 북경으로 가는 사은사 일행은 천은 1백 냥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을 주고 인삼(홍삼)을 가져다가, 이를 북경(연경)에서 최소 3배에서 많게는 7배의 가격을 받고 팔아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이 북경에서 인삼을 청국의 약제 상인에게 근당 천은 3백 냥에 팔았다고 하면, 보관과 운송에 드는 비용과 인건비를 충분히 제외하더라고 상인들은 약 천은 1백 냥 이상의 수익을 올린 셈이 된다.

이제 해마다 북경으로 가는 사은사는 폐지되었다. 그래서 인삼에 대한 연행 무역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국경 지대에서 이루어지던 후시마저 조선의 임금인 내가 금지시켰다. 이제 조선에서 청국과의 공식적인 사무역은 사라졌다.

게다가 나는 국법으로 인삼의 밀무역을 대대적으로 엄히 단속까지 했다.

이 인삼 밀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잠상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18세기부터 조선의 대청 무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의주 상인과 개성 상인, 경상 등이었다.

이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청국에서 온 상인들과 몰래 인삼 밀무역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 장을 맞거나 처형되었다.

그동안 나는 내수사와 호조에 명을 내려 인삼의 재배지와 수확한 인삼을 홍삼으로 만드는 증포소를, 황해도 개성에 다량으로 늘려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전국 각지에도 인삼의 재배지를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청국에 대한 인삼의 수출이 금지되면서 조선에 인삼의 공급이 넘쳐나게 되자 인삼 가격이 폭락했다.

인삼의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인삼을 재배하던 상인들과 지주들이 호조와 내수사에 인삼밭을 헐값에 넘겼다.

나는 불과 2년 만에 조선의 거의 모든 인삼밭과 증포소를 국가와 임금인 내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인삼을 재배하는 백성들과 증포소에서 일하는 자들을 모두 호조와 내수사에서 고용했다.

호조와 내수사는 임금인 내 명을 받들어서 이들에게 상인들과 지주들 밑에서 일할 때보다 두 배 이상의 좋은 대우를 해 주고 있었다.

인삼을 청국에 팔아서 얻는 근당 천은 1백 냥의 수익. 나는 이 수익을 모두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인삼을 팔아서 벌어들이는 순수익 천은 4백만 냥.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천은 1냥은 상평통보로 4냥이니, 천은 4백만 냥은 조선의 화폐 가치로는 1,600만 냥이었다.

나는 이것을 종잣돈으로 조선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조선은 이때 1년 동안 나라를 운영하는 재정으로 들어가는 비용의 총액이 상평통보로 약 8백만 냥이었다.

국가 재정의 두 배 수익을 보장해 주는 인삼의 판매에 내가 집중을 하기 위해 청국의 상해를 택한 이유가 바로 이 엄청난 수익을 확실하게 얻기 위함이었다.

상해의 현성으로부터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소식을 가져온 배편은 프랑스의 증기선이 아닌 조선의 증기선이었다.

서양으로 사절단을 태우고 갔던 증기선 두 척 중 한 척이 광동과 상해를 거쳐서 조선의 도성 한양이 지척인 한강의 양화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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