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망나니 철종-179화 (178/295)

#179화 사로잡은 황제의 동생

“마을은 대부분 초토화되었습니다.”

“영감, 이곳 요동은 폐허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건 돌과 벽돌로 지은 집들뿐입니다.”

최성환은 휘하의 군관들을 데리고 직접 눈으로 요동성 안을 살폈다. 제대로 된 건물과 집이 없을 정도로 요동성은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가면 벌판에 남는 곡식이 아무것도 없다더니, 바로 그 꼴이구나.”

최성한은 탄식했다. 수만여 명이 모여 사는 만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요동이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성의 안팎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청나라 비적들의 포학함은 청나라 군사들에 못지않구나.”

요동에 오기 전에 최성환은 간도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피해를 입은 조선 백성들의 마을을 시찰했었다. 조선 백성들의 마을도 이곳처럼 마찬가지로 처참했다. 청군은 마치 비적처럼 백성들부터 공격하고 약탈했다.

요동을 살핀 최성환은 탄식하면서 봉황성으로 돌아왔다. 심양까지 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나빠지고 있었다.

심양을 떠난 일백여 명의 조선군이 요동성을 거쳐서 간도의 봉황성으로 가고 있었다.

조선군 사이에 청나라 봉천부의 부윤 모중개가 있었다. 모중개는 걷고 있는 조선군과 달리 편하게 말을 타고 있었지만 심신이 지쳐 있었다. 간간이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만주가 춥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춥기는 정말 춥네.”

“그러게나 말이야. 발이 얼어서 느낌조차 없어.”

“그런데 왜 저자를 봉황성으로 데려가는 거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우리는 걷고 있는데 팔자 좋게 말에 탄 저 오랑캐 놈 말이지.”

“그걸 내가 아나 네가 아나? 그저 높은 분들이 데려오라고 하면 데려가야지.”

“청나라 오랑캐 높은 놈인데, 데려다가 백성들 앞에서 모가지 치려고 데려가나?”

“말에 태워 곱게 모셔 가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모중개를 만주의 심양에서 간도 봉황성의 조선군 본영까지 호송하는 조선군의 얼굴이 추위로 빨갛게 얼어 있었다.

최성환은 박규수와 자리한 곳에 봉황성에 도착한 모중개를 불러들였다.

“부윤은 이곳 만주가 누구의 땅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거야 청나라의 땅이 아닙니까?”

“부윤, 대체 요동과 만주가 언제부터 청나라 땅이 된 것이오?”

“저 옛날에 당 태종께서 이 땅을 정복하시고…….”

“뭐요? 정복이요? 그리고 당 태종이 청나라 사람이오? 부윤, 부윤은 당나라와 청나라를 같은 나라로 보시오?”

“그건 아니지만 같은 중원의 나라로서…….”

“이보시오, 부윤. 청나라가 중원에서 시작된 나라요?”

“그건 아닙니다만…….”

“부윤, 그러면 다시 묻겠소. 당나라와 청나라가 그대의 한족이 세운 나라요?”

박규수는 모중개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당나라를 묶어서 만주가 한족의 영토임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다.

“당나라는, 청나라는…….”

모중개는 말끝을 흐렸다. 모중개와 같은 유학자가 중원의 역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박규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윤, 이 땅은 본래 우리 조선 민족의 땅이었소. 그런데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가 이 땅에서 천 년을 살아온 우리 조선 민족인 고구려를 멸망시켰소. 부윤은 그 때문에 이 땅 만주가 한족의 땅이 되었다고 생각할 거요. 하지만 부윤, 대답해 보시오. 당 태종 이세민이 그대의 한족이오?”

“그거야……?”

당연하다는 대답을 하려는 순간 박규수가 말했다.

“아니오. 당 태종 이세민은 그대와 같은 한족이 아니고 바로 북방의 선비족이오. 알겠소? 그대 한족들은 선비족 출신의 이세민에게 나라를 잃고 지배를 당한 거요.”

“그러면 송나라는……?”

모중개의 자신감이 흔들렸다.

“당연히 그거야 그대의 한족 사람들이 세운 거지요. 하지만 조광윤이 세운 북송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했소. 여진족인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했다는 말이오. 그대의 민족인 한족은 장강 이남으로 쫓겨 갔지. 아니 그렇소?”

“그건 맞소이다.”

“바로 그거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소? 그대의 한족이 중원을 다시 지배한 적이 있소? 아, 물론 있지. 명나라 말이오. 하지만 그 뒤에는 또 어떻소? 지금 중원은 여진족인 청나라가 차지하고 있소. 생각해 보시오. 지금의 북경을 비롯한 중원을 그대의 한족이 세운 나라가 차지한 세월이 역사에서 얼마나 되오? 아마 절반도 되지 않을 거요. 북경과 중원이 그럴진대 하물며 요동은 역사에서 한 번도 그대의 한족이 차지하지 못한 땅이오. 만주와 요동이 한족의 땅이라는 그대와 한족들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것인지 이제 그대는 알아야 하오. 부윤, 더구나 지금 그대의 한족은 다시 여진족의 지배를 받고 있소. 부윤의 주장은 노비가 주인이 잠시 살았던 집과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격이나 마찬가지요. 내 분명히 말하자면, 이곳 요동과 만주 땅은 본래 조선 땅이었고 앞으로는 영원히 우리 조선 민족의 땅이 될 것이오. 알겠소?”

“듣고 보니 영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중개는 풀이 죽었다. 박규수의 말대로 만주는 냉정히 말해서 지금 청나라가 세워진 곳이었다.

그리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분명히 한족이 아니었다. 게다가 박규수의 말대로 한족은 여진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엄연히 사실이었다.

만주는커녕 중원조차 한족의 것이 아니었다. 모중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역사 논쟁이 문제인가. 모중개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했다.

비록 심양을 내주고 투항했지만 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심양은 내주지 않아도 조선군이 힘으로 충분히 차지할 땅이었다.

모중개는 그것이 불안했다. 조선의 대신 박규수가 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곳으로 급하게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모중개는 그것이 궁금했다.

“부윤, 내가 이곳 조선의 간도로 부윤을 부른 이유는 부윤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부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심양의 백성들을 살려 주셨으니 이제 소생은 조선의 관대한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나와 함께 갑시다.”

도승지 박규수는 모중개를 데리고 봉황성 성내의 구석진 곳에 있는 한 전각으로 갔다. 총과 검을 든 군사 여럿이 배치되어 전각을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박규수가 다가가자 모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각의 문이 열리자 박규수는 모중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은 안에서 식사와 취침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들리자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람은 정수동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청국 사람이었다.

박규수와 모중개가 천천히 다가갔다.

전각 안의 청국 사람은 바로 애신각라 혁흔이었다. 정수동은 혁흔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모중개를 본 혁흔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었다. 모중개 역시 순간적으로 놀라는 눈빛이었다.

청나라 황제 함풍제의 친아우인 혁흔은 낭자산에서 포로가 되어 봉황성으로 끌려왔다.

낭자산에서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던 혁흔을 잡은 것은 바로 낭자산 수비대의 장수였던 허헌이었다.

허헌은 낭자산의 수비대장인 강석룡이 출세를 위해 공을 세우려 군령을 어기고 청의 대군이 쳐들어왔는데도 봉화를 올리지 않고 기발조차 보내지 않으려는 것에 반대하다가 강석룡의 영으로 억류되었었다.

그러다가 강석룡이 청군에 패하고 난 후에 홀로 결박을 풀고 산을 내려가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허헌은 때마침 조선군에게 패해 도망치던 혁흔과 청군을 발견하고 총성을 낸 후에 혁흔을 군사들로부터 분리해서 사로잡았다.

봉황성으로 끌려온 혁흔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청나라 황제의 아우이자 공충친왕인 자신의 신변을 드러내면 조선의 포로로 있어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한 혁흔이었다.

그래도 혁흔은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황제의 친아우가 조선군의 포로가 되어 인질이 된다는 것은 황제와 황실에 큰 짐을 지우는 것이었다.

만약 조선이 인질인 자신을 내세워 거래를 한다면 황제에게 씻을 수 없는 대죄를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혁흔은 그래서 잡히는 순간부터 신분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조선의 그 누구도 혁흔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혁흔은 그래서 청나라의 고관 정도로 행세했다.

혁흔을 포로로 잡은 조선은 혁흔의 신분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보려고 했지만 혁흔을 아는 자가 없었다.

포로로 잡은 청나라 군사들은 혁흔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청나라 장수들 중에서 포로가 된 자가 여럿 있었는데, 그들 중 서넛은 부상으로 죽고 나머지는 정수동이 심문으로 정보를 캐낸 후에 연해주의 노역장으로 보내졌다. 모두가 혁흔이 봉황성으로 잡혀 오기 전이었다.

정수동은 처음에 장수들에게서 혁흔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아냈다. 그러고는 장수들의 증언대로 화원을 시켜 혁흔의 생김새를 그려 냈다.

잡혀 온 혁흔의 고상하고 품위 있는 절제된 행동과 생김새를 본 정수동이 혁흔의 얼굴이 화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신분을 추궁했지만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정수동은 연해주로 파발을 띄웠다. 하지만 연해주는 기발로 회신이 온다 해도 빨라도 두 달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정수동은 그래서 도승지 박규수에게 부탁해 심양을 수복하자마자 항복한 봉천 부윤인 모중개를 봉황성으로 급히 데려오게 했다.

봉천 부윤 같은 고위직이라면 분명히 청나라 황제의 아우인 혁흔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혁흔은 팔기군을 거느리고 심양을 거쳐서 왔다. 봉천 부윤은 당연히 혁흔을 영접했을 것이다.

정수동과 박규수의 예측은 그대로 적중했다.

“저, 전하…….”

모중개의 입을 통해 신분이 밝혀진 순간 공친왕 혁흔은 눈을 감았다. 도승지 박규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정수동이 낄낄거리며 두 팔 벌려 말했다.

“공친왕 전하, 조선에 온 걸 환영하오이다!”

혁흔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 날 바로 혁흔은 도성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압송이라고는 하지만 예우를 갖추어 결박도 하지 않고 말에 태워 경마를 잡혔다.

*

혁흔이 도성 한양으로 압송이 될 무렵에 북경의 청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폐하, 성경이 조선군에게 점령당했다고 하옵나이다.”

“무엇이? 심양이, 심양을 조선에 빼앗겼다고?”

보고를 받은 함풍제는 너무 놀라서 용상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어전 대신?”

어전 대신인 숙순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 엎드렸다.

“폐하, 소신에게 죄를 물어 주소서.”

“죄를 물어 달라고? 심양을 잃었는데 지금 한가하게 죄를 물어 달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가 가당키나 하오?”

“전하, 소신을 죽여 주십시오.”

“공들에게 죄를 묻는 것은 나중 문제요. 심양은 만주의 심장이오. 우리 만주족의 본향이오. 태조와 태종, 선제들께서 대청을 세우고 중원으로 나아간 곳이오. 그런 심양을 잃었으니 이제 대체 어찌할 것인가?”

자중하는 숙순을 대리해서 대신들이 나섰다.

“전하, 조선에 사신을 보내 전후 사정을 살피시고 조선과 협상을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협상? 무슨 협상? 아니, 아니오! 지금 사신이고 협상이고 무슨 헛소리요? 내 친히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조선을 박살 내고 조선 왕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오!”

함풍제의 각오에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숙순은 터져 나오는 탄식과 한숨을 간신히 참고 삼켰다.

즉위하고서 두서너 해는 명민함을 드러내며 나름대로 정사에 밝았던 황제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제는 날이 갈수록 미망과 미혹에 빠져들면서 정세를 보는 눈마저 흐릿해진 황제였다.

황제는 이제 정사를 살피는 것보다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함풍제가 성색견마(聲色犬馬)에 빠진 것은 이미 온 조정에 널리 퍼져 있었다. 성색견마는 가무와 여색, 애견, 말타기를 이른다.

그중에서도 함풍제는 색을 특히 밝혔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여색(女色)을 밝힌 것만이 아닌 남색(男色)도 탐했다는 것이다. 남색은 바로 동성애였다.

함풍제가 이렇듯이 풍류와 호색에 몰입해 정사를 제쳐 두니 청나라의 정국이 모두 유력 대신들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되고 놀아나 풍전등화에 이르렀다.

백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치러 간다는 황제의 호언을 믿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함풍제 자신도 다음 날이 되자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자금성의 내실에서 함풍제는 여자들을 발가벗겨 놓고 아침부터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밤이 되자 함풍제는 여자들 대신에 미소년들을 불러서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것은 숙순을 비롯한 대신들의 손에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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