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첫 교전 (1)
흑산으로 갔던 레비지프가 열흘이 넘도록 병영으로 돌아오지 않자 아무르 코사크 연대는 발칵 뒤집혔다.
비록 레비지프의 현 계급이 부사관이라고는 하지만, 레비지프는 코사크 연대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궁정 귀족의 푸른 피가 흐르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게다가 시베리아 총독이 수시로 안부를 물어 오고 있었다.
만약에 레비지프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코사크 연대장부터 크게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은 분명했다.
코사크 연대장인 수하나프는 문책을 당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레비지프의 신변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하나프는 부랴부랴 레비지프의 행방을 찾는 일에 코사크 총병 1개 중대를 투입했다.
코사크 병사들이 흑룡강을 건너서 흑산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수색하고 있는 곳은 조선군이 주둔한 곳으로부터 불과 20km 이내의 지역이었다.
조선군 총사령관인 최성환이 장군들에게 흑룡강 일대의 러시아 요새를 모두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러시아 코사크 병사들은 약 10km 이내까지 접근했다.
이곳은 조선군의 전초가 있는 곳이었다. 전초에는 조선군 1개 소대가 항상 머물며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조선군엔 열흘 전에 정찰을 나갔던 조승우의 소대가 러시아 병사들을 사살하고 포로까지 생포한 이후로 비상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소와는 다르게 병력이 증파되어 1개 중대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 군사들의 접근에 대비해서 매일 엄중한 경계를 서는 상황이었다.
레비지프를 찾는 러시아 수색대가 초소 방향으로 오는 것을 조선군 정찰병이 발견했다.
러시아 병사들이 근접하고 있다는 급한 보고를 받은 중대장 주호진은 중대에 전투 준비 태세를 발령했다. 주호진은 직접 부사관을 데리고 초소 좌편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 초목 지대를 걸어가고 있는 러시아 병사들을 살폈다.
“저 길은 허저족의 동치 마을로 가는 방향인데?”
러시아 병사들의 수와 이동 방향을 확인한 중대장 주호진은 빠르게 초소로 가서 장교들을 불러 모았다.
“허저족 동치 마을로 러시아군이 가고 있다. 주민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
“쉽사리 마을을 구원하다가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다른 장교의 말에 주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진은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주호진 역시 그 출신이 유생이었는데, 평소에 진중하고 사려가 깊은 인물이었다.
“러시아 군사들이 가고 있는 허저족 마을에 주민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느냐?”
“수백여 가구가 모여서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법 사람 수가 많겠구나?”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백성들이 많이 상하겠구나.”
“러시아 군사들도 사람이라면 저들을 함부로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러시아 병사들이 우리에게 협조한 주민들을 학살이라도 한다면 일이 커질 것이다.”
총사령관인 최성환이 백성을 지키지 않는 지휘관은 문책을 하겠다고 영을 내린 상태였다.
“러시아군이 무작정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동치 마을 주민과 우리 조선군의 관계를 러시아군이 어찌 알겠습니까?”
“러시아 군사들이 포악한 것은 이미 이곳 소수민족의 촌장들이 증언했다.”
“중대장님, 그렇다고 저들의 안전을 위해 작전을 하다가는 우리 병사들의 인명 손실이 클 것입니다.”
주호진은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마을 주민들을 구하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병력을 이끌고 마을로 달려가야 하지만, 러시아군과 무작정 전투를 벌였다가는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군은 무력한 청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중대장님, 저와 정찰조가 가서 주민들을 이리로 빼내 오면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네 말을 듣겠느냐? 어제까지만 해도 저들은 청나라 백성이었다. 게다가 그 수가 수백이 넘고, 간다고 해도 이미 러시아군 몰래 구출하기에는 늦었다.”
“하지만 중대장님…….”
“안다. 저들도 이제 우리 조선 백성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소관이 소대를 이끌고 가서 러시아군을 마을로부터 떼어 놓겠습니다.”
다른 소대장이 나섰다.
“좋다. 그러면 러시아군을 여기 초소로 유인하라. 러시아군을 이곳에서 맞아 섬멸하겠다.”
조선군의 초소는 아래가 훤하게 보이는 언덕 위에 통나무를 베어다가 방책을 두른 작은 성채였다.
중대장인 주호진은 러시아군을 초소 방향으로 유인해서 전투를 벌이려 했다.
주호진은 흑산의 본대로 병사를 보내 러시아군의 출현을 알리고 지원군도 요청했다.
말을 탄 병사 둘이 조선군 본대가 있는 본영으로 급히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주호진은 유생 출신의 장교였다.
서원 철폐와 여러 차례의 역모 사건으로 유림이 뿌리째 뽑히고 나서 유학의 길을 맹신하던 많은 유생이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과거의 폐지로 앞날에 대한 불안과 회의로 많은 날을 방황하던 실력 있는 유생들이 그 와중에서 갈 길을 정하고 군대에 뛰어들어 장교가 되었다.
주호진과 조영수 같은 유생들은 대부분 지금 임금의 북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앞날을 합리화했다.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이 망한 나라 명나라를 대신해서 만주로 나아가 중원을 회복한다는 기치에 이 젊은 유생들은 갈 길을 찾았다.
젊은 유생들은 그동안 새 임금에게 저항하던 이전의 유림을 교조적인 수구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임금의 고토 회복에 대한 북벌에 기꺼이 동참했다.
일부 유림의 원로들 역시 이 젊은 유생들의 새로운 선택에 힘을 실었다. 유생 수백여 명이 새로운 체제의 조선군에 들어와서 장교가 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조선과 조선의 고토회복에 뜨거운 열망과 열정을 품고 있었다. 스물두 살의 주호진 역시 그들 중의 하나였다.
“중대장님, 동치 마을 지리를 잘 아는 녀석이 있습니다.”
부사관이 병사 하나를 데려왔다.
“동치 마을 지형을 잘 안다고?”
“네. 전에 본대에 있을 때 동치 마을로 대민 지원을 나갔습니다. 그때 귀대할 때 동치 마을 길잡이의 안내로 지름길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지름길이면 얼마나 빠르더냐?”
“족히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빠른 지름길이 정녕 있다는 말이냐? 그러면 혹시 그 길을 아는 자가 또 있느냐?”
“저와 함께 그때 지름길로 귀대한 부사관 한 명이 지금 이곳 초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가서 그 부사관을 데려와라.”
주호진의 지시에 부사관이 불려 왔다.
“너도 동치 마을로 통하는 지름길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지름길로 동치 마을로 가면 얼마나 걸리느냐?”
“반나절도 못 되어 능히 닿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서두르면 러시아군보다 우리가 늦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주호진은 작전을 바꾸었다.
“동치 마을로 통하는 길이 몇이더냐?”
“동치 마을은 사방이 야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로 들고 나는 길이 길게 오 리쯤 되는데, 하나뿐입니다.”
“길이 하나? 분명하냐?”
“분명합니다. 분명 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분명 없더냐?”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제외하고는 두 면이 강물에 한 면은 늪지대입니다.
“옳거니! 잘되었구나.”
“지름길 상태는 어떠냐? 병사들이 쉬이 이동할 만하냐?”
장교가 부사관에게 물었다.
“지름길은 샛길인데, 길이 벼랑으로 험해서 현지인도 잘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대장님, 그렇다면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지만 지름길로 가면 러시아군보다 마을에 먼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오! 네 말이 참이면 하늘이 백성을 구하겠구나.”
“하지만 중대장님, 길이 그리 험하다면 이동 중에 병사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장교의 말에 주호진은 잠시 생각하다가는 결정을 내렸다.
“러시아군을 잡아 첫 공을 세울 좋은 기회다. 마을로 들고 나는 길이 오직 하나라면 앞뒤에서 포위하면 러시아군을 능히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름길이 벼랑길이라고 하지만 조심하면 될 것이야.”
주호진은 러시아군을 앞뒤에서 가두고 섬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호진은 2개 소대를 지름길로 앞질러 보내서 동치 마을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군 2개 소대가 지름길로 동치 마을로 가고 있었다. 주호진이 이끄는 나머지 2개 소대는 러시아군과 거리를 두고 뒤로 접근했다. 이동 중에 정찰병이 여럿 오가면서 러시아군의 위치와 이동 상황을 계속 보고해 오고 있었다.
주호진의 명에 의해 벼랑길로 먼저 도착한 조선군 1개 분대가 동치 마을 안으로 먼저 들어가서 마을을 살폈다. 다행히 마을에는 아직 러시아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무장한 조선군을 본 주민들이 놀라서 집 안에 숨어들었다.
마을의 촌장이 나왔다가 조선군에게서 러시아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군은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서 동치 마을 입구에 통나무 몇 개를 잘라 엄폐물을 치고 러시아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너라, 러시아 오랑캐 놈들아. 모두 죽여 주마.”
장교와 부사관들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배치되어 눈앞에서 나타날 러시아군을 기다렸다.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은 애초에 이웃 나라의 군대 정도가 아닌 적으로 간주되어 있었다.
흑룡강으로 출정하기 전에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러시아에 대한 교육을 대대적으로 받았는데, 교육 내용에서 러시아는 장차 조선의 이웃 나라로 가까이 지낼 나라가 아닌 북방의 오랑캐로 반드시 섬멸해야 하는 적이었다.
조선이 갈 길과 조선이 사는 길은 이미 임금의 혜안으로 정해져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와 동맹을 굳건히 하고 미국과 손을 잡아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만이 조선이 자주적으로 대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임금은 늘 말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동치 마을 앞을 지키고 뒤에서 접근하는 동안에 레비지프의 행방을 찾는 아무르 코사크 연대 소속의 러시아군 1개 중대는 조선군의 대응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동치 마을을 향해 길을 잡고 나아가고 있었다.
이 러시아군은 사실상 기병 위주로 편성이 되어 있는 러시아 변경의 경비대 역할인 코사크 연대 중에서도 가장 전력이 약한 보병 중대였다.
러시아 코사크 중대의 중대장인 바브리프는 중대를 이끌고 가면서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변방에서 평생 죽도록 고생해서 겨우 장교가 되었는데, 이제 매일같이 궁전에서 온 귀족 코흘리개 아이 뒷수습이나 하고 있으니. 아이고, 내 신세야.”
러시아군은 전통적으로 귀족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지만, 예외로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같은 변경에서는 그 지역에서 25년 이상을 근무한 부사관 중 공을 세운 자를 가끔씩 하급 장교로 임명하기도 했다.
바브리프의 중대원들 역시 레비지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레비지프가 그동안 코사크 연대 안에서 장교들은 물론이고 사병들에게도 안하무인으로 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레비지프는 출신이 대부분 코사크족인 병사들을 마치 농노나 노예 다루듯이 부렸다. 부당한 심부름을 시키고 요구를 거절하면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이런 연유로 중대원 대부분이 내키지 않은 레비지프의 수색에 나서자 군기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러시아군은 휴대한 소총에 제대로 장전도 하지 않고 있었고, 마치 소풍 가듯이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행군하는 부사관들이 낄낄대며 서로 웃고 있었다.
“바람 한번 쐬는 거야. 재미 좀 보는 거지.”
코사크 중대는 동치 마을로 가서 1박을 묵은 후에 대충 다른 마을을 둘러보고 연대로 복귀할 작정이었다.
코사크 연대가 아는 동치 마을은 흑룡강 인근의 마을 중에서 비교적 풍족한 곳이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인근의 광산에서 일을 하고, 가축을 치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다. 하지만 동치 마을은 러시아군의 정보처럼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한 마을이 아니었다. 식량 역시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바브리프는 동치 마을을 약탈하고 하루를 숙영하기로 했다. 바브리프의 계획이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동치 마을에서 가축을 잡고 술을 진탕 마시자!”
코사크 병사들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장교들은 동치 마을에서 여자를 잡아 하체의 욕심을 채울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서 레비지프를 지워 버렸다.
바브리프의 러시아 중대는 정찰도 하지 않고 척후도 없이 무작정 동치 마을로 가는 외길로 몰려가고 있었다.
지름길인 샛길을 통해 동치 마을에 도착한 조선군 2개 소대는 동치 마을 앞에 통나무로 장애물을 치고 러시아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조선군의 시야에 러시아 병사들의 모습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조선군은 소총을 장전한 상태로 러시아 병사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규율이 무너진 코사크 병사들이 소총을 거꾸로 메고 히죽이며 떠들면서 오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중대장 바브리프 휘하의 본부 소대만이 만약을 대비해 장전을 하고 열을 지어 조선군이 소총을 겨누고 있는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