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망나니 철종-295화 (294/295)

#295화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라

“사쓰마의 영주가 급사했습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잡으러 간 사무라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죽음에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비롯한 중신들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가득했다.

“사쓰마의 영주가 죽었으니, 이렇게 되면 조선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문책을 하려고 들 터인데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어쩌긴요? 넘겨줄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는 끝난 것 아닙니까? 조선군 함대도 이제 에도만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사쓰마 영주가 죽었다고 조선군이 순순히 함대를 물리고 규슈에서 물러가겠습니까?”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조선은 그동안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조선 국왕의 시해 시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그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었으니 조선군이 철수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중신들이 언성을 높였다.

“맞소이다! 책임질 사람이 죽었으니 이곳, 에도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는 조선군 함대는 물론이고 지금 규슈를 점령한 조선군 모두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옳소이다. 우리 막부는 일본의 이름으로 조선군이 일본 땅에서 전면적인 철수를 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분명히 다른 요구를 할 것입니다.”

“다른 요구라니요? 조선 국왕에게 위해를 입힌 자들은 사쓰마 번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사쓰마 번은 조선이 무력으로 응징했고, 사쓰마 번의 번주마저 죽었습니다. 도대체 다른 요구라니요?”

“맞습니다. 부당한 요구가 있다면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무겁게 입을 열고는 탄식을 뱉어 냈다.

“다이로, 하지만이라니요?”

“아무래도 우리가 중대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중대한 실수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에도 앞바다 해전 말입니다.”

“그게 왜요?”

“조선은 필시 해전을 문제 삼을 겁니다.”

“해전을요?”

모두의 표정들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우리 일본이 먼저 공격한 걸 조선이 문제 삼는다면?”

“우리 일본 함대는 우리 바다를 침공한 조선 함대에 대한 방어적인 차원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 해명이 과연 조선에 통하겠습니까?”

“통하지 않으면요?”

“생각해 보세요. 미국의 페리 함대도 우리 바다에 들어와서 대포를 쏘고 위협을 했지만, 우리 일본은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제 조선은 그 아메리카, 아니 미국의 페리 제독이 끌고 온 군선들보다 몇 배는 더 크고 강력한 함대로 에도 앞바다를 막고 있습니다.”

모두에게서 장탄식이 쏟아졌다.

“어디 그것만입니까? 조선은 지금 수만여 명의 군대로 규슈를 사실상 차지해 버렸습니다. 규슈에서 수백 년 동안 통치하던 우리 일본의 번들은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규슈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무라이들은 죽고 다이묘 역시 모두 죽거나 할복했습니다. 그런 조선군이 이제 사쓰마 번주가 죽었다고 물러가겠습니까?”

“다이로, 그러면?”

“다, 다이로, 그럼 혹시 조선군이 에도에 상륙이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지도요.”

모두 충격을 받았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서양식 총포로 무장한 조선군 수만 명이 이곳, 에도에 상륙한다면 우리 막부는 물론이고 일본은 그 길로 끝장나는 겁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조선은 정말이지 여기서 너무나도 가까운 나라입니다. 조선 국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십만 군대를 보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이거 두렵고 떨려서 손이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협상을 잘해야 합니다. 조선과 협상을 잘해야 막부를 지킬 수가 있어요.”

중신 회의에 참석하고 나온 외국 봉행 나가이 나오유키의 어깨는 쇳덩이 짐을 진 듯이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조선 대표로 전권을 부여받은 정수동이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채로 양복을 입은 조선 협상단을 이끌고 우라가 해변에 상륙했다. 정수동은 에도 해안의 우라가(요코스카)에 상륙할 때 총검으로 무장한 장교와 병사들 삼백여 명을 대동했다.

조선과 일본 막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일본 막부의 대표인 외국 봉행 나가이 나오유키가 긴장한 채로 조선 대표 정수동을 만났다.

완전무장 한 조선군 병력이 회의장을 포위하다시피 하자 일본 막부의 대표인 나가이 나오유키를 비롯한 사무라이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조차 펴지 못했다.

일본 대표를 수행한 칼 찬 사무라이 십여 명도 미군과 같은 서양식 군복에 총검으로 무장한 조선군의 위세에 겁에 질려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조선군 함대에 일본의 모든 군선이 수장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수동은 처음부터 앞에 마주 앉은 나가이 나오유키에게 일본 군선들이 조선군 함대를 선제공격한 것을 강력하게 문제 삼았다.

“감히, 하찮은 배 따위로 우리 조선군 함대를 공격하다니. 그것으로 귀국 일본이 협상할 의지가 없는 것을 확인했소. 조선 대표인 나는 귀국 일본이 이번 해전으로 우리 조선에 전면전을 선포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사실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거요.”

정수동은 차분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나가이 나오유키는 노련한 인물이었다. 나가이 나오유키는 조선이 전면전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협상을 하기 위해, 에도 인근의 우라가 해안에 굳이 대표단이 상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협상을 최대한으로 유리하게 가져가거나 버티어 볼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리 일본의 막부는 조선과의 전면전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규슈를 포함한 일본의 모든 지역과 바다에서 조선군의 무조건 철수를 바랄 뿐입니다.”

“철수를 바란다고? 일본은 우리 조선의 성상 전하를 시해하려고 했고, 또한 함대로 우리 조선군 함대를 먼저 공격했다. 그런데 이제 그에 대한 사죄는커녕 책임도 지지 않고 우리더러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이것은 마치 강도가 사람을 해치고 나서 반격을 당하니 이제 그만하자는 꼴이 아닌가? 일본과 일본인이 예로부터 신의는커녕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없는 자들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참이었구나!”

차분하던 정수동이 분에 차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

금방이라도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것만 같은 정수동의 격한 태도에 나가이 나오유키가 당황했다.

“그 뜻은 아니고, 사실, 조선에서 요구한 사쓰마 번의 영주가 죽어서 이제는 책임질 인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뭣이?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어?”

정수동은 크게 놀랐다. 조선 국왕의 시해 시도에 책임이 있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었다는 소식 때문이 아니라 이런 상황을 마치 보란 듯이 예측한 임금이 내린 기막힌 비책 때문이었다.

임금은 비책에 적어 놓았다. 사쓰마의 번주가 사망한 것을 가정한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 막부에 요구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막부는 조선의 요구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조선 국왕 전하에 대한 시해 시도에 책임이 있는 사쓰마 번 영주를 조선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한지라서, 더 이상 조선 측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이번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자가 죽었으니 조선도 더 이상 우리 일본에 대한 전쟁을 그만두고 군사를 거두어 가기를 요구합니다.”

정수동은 놀라는 척은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임금이 내린 비책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사쓰마 번의 번주가 죽었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그 주인인 막부가 책임질 일만 남았소이다!”

정수동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가이 나오유키를 비롯한 일본의 대표들이었다.

“마, 막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요?”

“당연히 그렇지 않소? 이보오, 봉행. 지금 일본의 주인이 누구요?”

“그, 그거야 당연히……?”

나가이 나오유키의 머릿속은 계산으로 복잡했다.

정수동은 임금이 내린 비책대로 계속 밀어붙였다.

“봉행, 지금 일본을 통치하는 자가 막부의 쇼군이요, 아니면 저 교토에 있다는 일왕이요?”

정수동의 입에서 교토의 일왕이 언급되자 나가이 나오유키를 비롯한 사무라이들은 정수동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 그게……?”

“일본의 통치자가 쇼군이오?”

“그, 그것은 당연히……?”

나가이 나오유키는 그제야 정수동의 의도를 간파했다. 첵임을 져야 할 인물이 사망해서 사라졌지만 조선은 끝까지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것이다.

“쇼군이요?”

나가이 나오유키는 끙 하는 신음을 냈다.

“봉행, 일본의 통치자는 쇼군이지요?”

나가이 나오유키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통역을 통해서 정수동의 질문을 들은 다른 대표 사무라이들이 눈치 없게도 나섰다.

“봉행! 일본의 주인은 쇼군입니다. 무엇을 망설입니까? 대답하세요.”

“닥쳐라! 여기는 협상장이다. 너희가 나설 때가 아니야!”

나가이 나오유키가 화를 내며 사무라이들의 언동을 급하게 제지했다.

일본 말을 알아서 사무라이들의 반응을 알아들은 정수동은 빙그레 웃고는 넌지시 물었다.

“봉행이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일본의 통치자가 쇼군이 아닌 것 같은데. 봉행, 그러면 혹시 교토의 일왕이 일본의 통치자요?”

“데, 덴노 말입니까?”

“그렇소, 덴노인지 일왕인지 하는 그 작자 말이오.”

애초부터 정수동은 언사에서도 일왕에 대한 예우를 할 생각도, 그럴 필요성도 그럴 가치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정수동에게 일왕은 그저 왜인들의 두목인 왜왕일 뿐이었다.

-갈라치기로 쇼군의 막부와 일왕의 조정을 이간해 일본을 분열시켜라.

정수동은 임금이 내린 비책을 떠올리며 일본 대표들의 반응과 대응에 집중했다.

일왕이 일본의 통치자인가 하는 정수동의 질문에도 나가이 나오유키는 대답을 주저했다.

나가이 나오유키는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 조선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둘러서 난관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정수동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나가이 나오유키를 더 곤경으로 몰았다.

“봉행, 이제 사쓰마의 영주가 죽고 없으니, 우리 조선은 사쓰마 번 영주의 주군이자 일본의 통치자인 사람으로부터 사죄를 받아야 하겠소. 봉행, 마지막으로 묻겠소. 지금 일본의 주인이 쇼군이요, 일왕이요?”

정수동의 최종 질문에 나가이 나오유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봉행, 조선 정부는 귀국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구하오. 첫째, 우리 조선국 국왕 전하를 시해하려던 죄에 대해 일본의 통치자가 직접 사죄하시오. 둘째, 일본은 조선 함대를 공격한 책임자를 처벌하시오.”

“그, 그것은?”

“마지막으로 우리 조선의 국왕 전하께서 일본에 공식적으로 전하는 성지를 내리겠소.”

“그, 그것이 무엇이온지?”

정수동은 장중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라.”

정수동은 일방적으로 통보를 마치고는 일본 대표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협상장을 떠났다.

일왕과 쇼군의 사죄와 항복이 조선의 공식 요구라는 통보에 나가이 나오유키는 다리가 풀려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가이 나오유키는 탁자를 잡고 한참을 벌벌 떨었다. 수행한 사무라이들의 얼굴도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항복하라는 말이 아닌 쇼군이 직접 사과하라는 조선의 요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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