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연하대학교 (1)
"표정이 왜 그래?"
어느새, 추억 속으로 빠지던 연우에게 물어보는 진욱.
저도 모르게 슬픈 표정이 나왔나 보다.
"아니에요. 여기 시계요."
웃으면서 진욱에게 들고 있던 국가정보원 시계를 돌려주는 연우.
"이거 선물로 하나 줄까?"
진욱의 말에 연우가 미소 지었다.
"저 시계 잘 안 차요. 손목에 독이 오르더라구요."
"그거 안 좋은 거 차서 쇠독 오르는 거다. 하하. 생긴 거랑 다르게 촌스럽기는."
"그런가요."
국가를 위해, 안보를 위해 헌신했던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지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류연우다.
***
류연우가 손진욱의 집에서 시계를 보고 있던 시간.
끼익―.
한해운 검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부지청장.
"한 검사. 어어. 앉아들 있어."
청장의 방문에 수사관들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부지청장은 차장 검사 중에도 3차 보직으로 고위 인사다.
"아니, 청장님. 호출하시지 왜 직접···."
한해운 검사도 일어나서 지청장을 맞이했다.
"하하, 한 검사 고생하는데 한가한 사람이 와야지."
한해운에게 친근한 듯이 접근해서 어깨에 손을 올리는 지청장.
"자네가 요즘 '전수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한다면서? 무슨 일이야."
"예? 청장님이 어떻게 그걸···."
해운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소리 죽여 말하는 청장에 놀랐다.
정식수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알아보는 건데, 청장이 내려오다니.
"내가 알아봤는데 말이야, 그 사람은 이미 죽었더라고. 무슨 사건인지 모르겠지만 사망으로 공소권도 없으니까 이쯤 하자구. 무슨 말인지 알지?"
해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내 곧 나가는 지청장.
"청장님이 직접 내려온다고? 대체 전수환이 누군데···?"
어디서부터 내려온 건지도 파악이 안 될 만큼 높은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일 것이다.
***
"야, 네 부탁이니까 가긴 하는데 꼭 내일 가야겠냐?"
성식의 투덜거림에 준수가 쳐다봤다.
"설마 크리스마스이브 이야기하려고?"
"야, 솔로라도 크리스마스이브는 즐길 수도 있지."
그 이야기를 듣고 준수가 성식을 째려보며 말했다.
"아, 왜 그래? 너 레어 아이템 이미 받아 놓고 딴소리하기냐. 그럴 거면 뱉어내."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간다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학교 견학을 왜 가는 거야 대체.
중얼거리는 성식을 보며 준수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나 나나 크리스마스에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냐? 내일만 아무도 안 가서 예약 신청이 되더라고."
준수는 평소 가고 싶었던 서울의 연하대학교에 견학 신청을 매번 시도했지만, 워낙 경쟁률이 높다 보니 늘 광클에 실패했다.
그런데 일요일만 신청 가능한 견학이 마침 크리스마스이브랑 겹치면서 공석이 남아있던 것.
얼른 신청하긴 했지만 혼자 가기엔 조금 외롭고 겁도 나서 성식을 끌어들였다.
"야, 견학 끝나면 연하대학교 로고가 새겨진 담요랑 볼펜이랑 준다니까?"
"글쎄, 내 말은 학교야 성적으로 가는 건데, 그 담요가 왜 필요하냐는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성식.
"아니, 진짜로 우리 누나 아는 친구가 그거 받고 성적이 쑥쑥 올라서 연하대 갔다잖아."
"에휴, 저 비과학적인 샤머니즘 신봉자. 알았다. 내일 출발하려면 일찍 자야지. 나 먼저 들어간다."
"야, 내일 아침 9시까지 슈퍼 앞으로 꼭 나와라. 알았지?"
손을 흔들며 아파트 입구에서 갈라지는 성식과 준수.
밤늦게까지 수다도 떨고 연기에 대한 깊은 대화도 나누며 연우와 진욱은 부쩍 더 친해졌다.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연우도 안녕."
"네. 안녕하세요. 상우 형."
차에 올라타며 진욱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연우야. 너네 팀장님한테는 말씀드렸어?"
"아, 네. 어차피 아무 샵이나 가도 영수증만 받아서 비용 처리하면 상관없대요."
"그쪽도 꽤 널널해. LN 엔터. 빡빡하지 않고 대부분의 편의는 배우 위주로 잘 봐주는 것 같더라고? 재혁 선배도 거기잖아."
진욱의 말에 상우가 운전하며 말했다.
"형, 거기는 윗줄이 튼튼하잖아요.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들어가고 싶은 곳이에요."
상우의 말을 들으며 진욱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흐음, 그래? 어차피 나 재계약 거의 다 되어가는데. LN도 제의 왔었거든. 상우 관심 있어?"
"저 데리고 가시게요?"
"뭐야, 당연한 거 아니야? 5년을 같이 했는데, 끝까지 같이 가야지."
진욱의 말에 감동한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우.
"야야, 앞에 봐. 신호 파란불 됐다."
"형님, 사랑합니다."
"아, 그건 좀 곤란해. 그럼 못 데려가."
괜히 쑥스러워서 농담을 던지는 진욱.
"저도 지금 LN에서 계속 편의를 봐주시기도 하고, 우리 드라마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한테 미리 말씀드렸다고 하더라구요."
연우도 사실 정철민의 조언에 따라 계약 사항에 큰 문제만 없다면 소속사를 LN 엔터테인먼트로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우리 잘하면 한솥밥 먹겠네. 연우야."
"저는 좋아요."
"이거이거, 이 차 안의 남자들은 나를 너무 좋아해?"
하하하하.
웃고 떠들다 보니 샵에 도착했다.
"촬영이 점심부터니까, 여유가 있긴 한데. 뭐 먹을 거라도 사올까요?"
상우가 차에서 내리는 진욱에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나오기 전에 연우랑 간단히 먹고 나왔어."
"네, 알겠습니다."
진욱이 먼저 들어가고 연우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 오셨네. 진욱 씨. 춥죠?"
"에이, 차 타고 요 앞에서 내리는걸요."
진욱을 맞이하는 정하늘 원장.
이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오늘은 이 친구랑 같이 부탁해요. 원장님."
진욱이 따라 들어오는 연우를 가리켰다.
"어서 와요. 아침에 현장 팀한테 컨셉 전달받았어요. 화면보다 더 잘생겼다."
"안녕하세요. 류연우입니다."
눈웃음을 지으며 연우가 인사했다.
"그래요. 연우 씨, 반가워요. 만져보고 싶은 외모네. 아, 오해하지 말아요. 메이크업 이야기야. 호호."
스탭들이 와서 둘을 안내했고, 정하늘 원장 팀이 공을 들여서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봤다.
"두 분, 내일도 촬영 있어요?"
바쁘게 브러시로 칠하며 묻는 정 원장.
"내일이 아마, 오전 촬영만 있지? 연우야."
"네, 그다음 날 촬영도 오후라서 내일 끝나면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다 오려구요."
연우의 대답에 정 원장이 눈웃음 짓는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랑 보내러 가시는구나?"
정 원장의 말에 연우와 진욱이 서로를 쳐다봤다.
"아, 내일이 크리스마스인가?"
"저도 몰랐네요."
"하여튼, 이 업계 사람들은 날짜도 모르고 바쁘게 살지. 하긴 나도 출근하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정 원장.
"아! 맞다. 연우야. 너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네? 상관없긴 한데."
"우리 여름이 시상식 봐야지. 집에서 같이 보자."
진욱의 말에 연우가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오늘 밤이죠?"
"응. 오늘 야외 촬영도 아마 그것 때문에 소현 씨 걸리는 씬 위주로 먼저 찍을 거야."
"네. 좋아요. 같이 보면 재밌겠네요."
연우의 대답에 진욱이 휴대폰을 만지며 타이핑을 쳤다.
"준호한테 오늘 저녁에 뭐 하냐고 물어봐야겠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 셋이 뭉쳐볼까."
"준호 형도 만나는 사람 없어요?"
"응, 없지. 내가 알기론 우리 출연진 다 솔로 부대야."
진욱의 말에 정 원장이 웃었다.
"호호. 그건 조금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진욱과 연우는 캠퍼스 배경으로 야외 촬영을 할 연하대학교를 향했다.
***
"야, 준수야. 이 학교 진짜 예쁘긴 하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나라에서 여기가 캠퍼스 제일 예쁘다니까."
"오, 누나들도 예쁜데? 저기 봐."
견학 안내원을 따라 학교 이곳저곳을 따라서 돌아다니는 성식과 준수.
"하···, 와보니까 이 학교 다니고 싶긴 하다. 너네 누나 친구도 그냥 동기부여 되어서 돌아간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건 그거대로 좋지 않냐, 이제 고3인데 공부해야지."
"하긴 해야지."
준수와 성식은 맨날 게임만 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다.
수시로도 서울 중상위권 대학은 충분히 노려볼 만한 성적.
"6월 모의고사까지 성적 보고 도전할 만하면 수시 포기하고 정시로 노려본다. 연하대학교."
"야, 근데 너 솔직히 말해. 연하대 오려는 거, 홍유리 누나 때문이지?"
"아, 몰라. 알면서 왜 물어봐. 가이드 누나 말이나 듣자 여기가 자연대학이래."
준수는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가이드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홍유리를 사실 1학년 때부터 짝사랑해 온 김준수.
최근 홍유리가 연하대에 수시 합격하면서 목표가 생긴 준수다.
"에이 씨, 그럼 나도 한다. 연하대. 친구의 사랑을 위한 도원결의다."
성식도 목표 의식을 가지고 한번 고3을 불태워 보기로 결심했다.
"야, 근데 도원결의는 유비, 관우, 장비 셋이 하는 거 아니냐. 우린 둘인데?"
"몰라. 연우를 넣자. 발로 풀어도 여기 합격하지 않을까.“
"연우가 이름이 비슷하니까 관우라고 치면, 우리 둘 중에 유비는 누구냐?“
"거울 보면 모르냐. 유비가 누군진 몰라도 니가 장비인 건 확실하지.“
성식의 말에 준수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뭐래. 그런데 연우는 한국대에 가지 않을까?"
"하긴, 연우는 한국대도 해볼 만할걸. 근데 배우 활동으로 바빠서 내년에 공부할 수나 있겠냐."
시험 기간에만 잠깐 학교에 나왔다가 다시 촬영장으로 서둘러 돌아간 연우를 생각했다.
"흠, 걔는 괴물이니까?"
"그치···?"
"야. 근데, 유리 누나가 연우 좋아하는 거 알지?"
성식은 준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 성식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준수.
"나도 젤리즈 누나들 좋아해."
"아, 그런 개념인가?"
"그치. 연우는 경쟁 상대가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는 준수와 성식.
"아, 근데 계속 연우 이야기하니까 연우 보고 싶은데?"
짝짝!
계속 뒤에서 잡담하는 준수와 성식을 보며 박수를 쳐서 주의를 끈 가이드가 말했다.
"여러분, 여기가 인문대학입니다. 건물 전체가 유럽 양식으로 지어져서 연하대 내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사진 명소예요."
웅성웅성.
언덕 아래에 있는 인문대학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오늘 같은 휴일에는 각종 촬영을 하러 많이 오기도 하는데, 오늘도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하네요."
그 뒤로 인문대학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던 가이드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