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명절
"아이구, 내 새끼들 왔누. 어여 들어와.“
반갑게 연우와 가족들을 맞이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연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큰아버지 내외분은 연우가 어릴 때부터 복스럽게 잘도 먹는다며 연우와 소현이를 예뻐했다고 한다.
"오메, 이게 진짜 연우여? 물론 테레비에서는 봤는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소란스런 소리에 주방에서 나온 큰어머니가 연우와 소현이를 보고 박수를 치며 반겨줬고 연우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어머, 형님. 어깨 수술 회복도 아직 안 되신 분이 벌써 음식을 하고 계셨어요?"
연우의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팔부터 걷어붙였다.
"아이고, 연우 애미야. 좀 쉬었다 혀. 방금 왔는디 시간 많아."
"제 성격 아시잖아요, 후딱후딱 끝내면 좋죠."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연우도 먼저 도착한 어른들께 인사를 한 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현아, 따라와. 음식 도와드리게."
"알았어."
연우의 부름에 소현도 따라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연우를 보며 철웅에게 속삭이는 큰아버지.
"어떻게 저렇게 확 바뀌었데? 참말로 잘 컸구만."
"형님, 애들은 금방금방 바뀌고 크잖아요. 하하하."
올곧게 자란 아들을 칭찬하는 큰형님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류철웅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게 이어서 다른 친척들도 도착하고 단연 가족의 화제는 연우였다.
류씨 집안에서 인물이 나왔다며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을 꺼내어 어색한 포즈로 다들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연우가 말 한마디만 해도 그 말에 귀를 쫑긋하는 친척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류씨 집안의 빌런 '작은아버지 내외'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류정웅은 류철웅의 막내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대체로 공부를 잘했던 형들과 다르게 꼴통 짓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사십 줄에 들어서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동대문의 의류 도매가 나름 잘 풀리면서 꽤 큰돈을 만지게 됐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는 늘 공무원인 그의 형을 보고 '나랏일을 하느라 고생한다'면서 먼저 챙기기 일쑤였다.
'내가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가장 많이 내놓는데, 왜 맨날 철웅이 형만 챙기시는 거야? 나랏일은 개뿔. 무슨 대통령이라도 돼? 그냥 평범한 공무원인데 무슨 나랏일이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날이 갈수록 반감은 커져갔고 류정웅은 그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 했다.
철웅의 뚱뚱한 아들이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고 어딘가 음침해서 명절에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반면에 자신의 딸은 착하고 예뻐서 어른들의 예쁨을 독차지 하는 것이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매년 설이나 추석 때마다 괜히 철웅의 아들 연우를 트집 잡으며 살 좀 빼라, 인사를 제대로 할 줄 모르냐며 괜스레 구박하는 것으로 형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런 정웅의 내외가 얄밉게도 음식이 다 끝나갈 즈음 맞춰서 저녁 늦게 등장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막내로 자라서 버릇이 없어진 거라 생각하며 류씨 집안에 모인 친척들은 싫은 내색 안 하며 반겨줬다. 그래도 명절이 아니던가.
"여기 선물세트 받아요, 형님. 에헤이, 야 인마. 그 정종은 비싼 거니까 조심해서 다뤄야지. 그게 얼마짜린데. 쓰읍."
들어오자마자 무거우실까 봐 달려가서 선물을 받아드는 큰아버지의 둘째 아들 류진우에게 싫은 소리로 시작하는 정웅.
자연스레 진우도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때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던 소현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작은아버지, 정종은 잘못된 표현이에요. 일본의 잔재랬어요. 선생님이 청주라고 쓰래요."
"···뭐? 쪼꼬만 게, 정종이나 청주나."
정웅의 아내 염숙경이 소현을 째려보며 제 남편을 거들었다.
'하여튼 저 집안은···.'이라고 중얼거리며 거실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연우 녀석은 어디 갔어? 이 녀석은 테레비 좀 나왔다고 작은아버지가 왔는데 인사도 안 나오는 거야?"
제 딴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웃으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정웅이지만 모여 있는 친척들은 영 듣기가 싫었다.
그때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아픈 팔다리를 주무르며 큰어머니가 나왔다.
"야 이 녀석아, 누구랑은 다르게 일찌감치 와서 요리 도와주고 지금은 베란다에서 기름 떼 벗기고 있다."
시선을 피하는 류정웅과 염숙경을 째려보며 말하는 큰어머니.
"아이고, 형수님. 일이 바빠서 그런 걸 어떡합니까? 뭘 또 그런 식으로 말을 하셔."
"에잉, 싹퉁바가지 없는 놈의 자식. 내가 열아홉에 류씨 집안에 시집와서 네 도시락 챙겨가며 키웠어."
큰어머니는 연우를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과는 정반대로 혀를 찼다.
"또, 저 이야기 하시네."
고개를 흔들며 베란다로 향하는 류정웅.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하곤! 하여튼간 류씨 집안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성격이 약해 빠져가지고 저놈을 저렇게 내버려 둬?"
큰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는 류씨 형제들을 향해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자 다들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한편, 베란다에서 전을 부친 팬의 기름때를 벗기고 수세미로 씻고 있던 연우는 베란다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오자 문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아마 작은아버지였지. 소현이 표현으로는 재수 없다는 그 사람.'
어제 예습했던 사진 속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우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작은아버지."
"오호, 그 전 모습이랑은 전혀 달라서 누군지 못 알아보겠네."
정웅은 뭔가 트집 잡을 게 없나 위아래로 눈을 굴려봤지만, 마땅히 찾을만한 흠이 없었다.
"분명히 네 어머니가 큰어머니 부추겨서 네 작은엄마 흉봤지? 늦게 온다고. 음식 하면서 너도 들었지?"
"···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음식을 하면서 작은아버지 내외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조차 안 했지만 지레짐작하며 뱀눈을 하고 쳐다보는 류정웅.
"그리고 어른이 들어왔으면 얼른 뛰어나와서 인사를 해야지. 하여튼, 싸가지 하고는."
"아, 죄송합니다. 설거지하는 데 집중해서 오신 줄 몰랐네요."
"모르기는, 모른 척했겠지."
연우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 후, 수려한 외모 때문일까 모두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다 보니까 이런 뚱딴지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적의가 신선했다.
"어이구? 이 녀석이 요즘 좀 잘나간다고 작은아버지를 눈 똑바로 쳐다보네? 작년처럼 한대 쥐어박아야 눈깔에 힘 풀지?"
어이없는 상황에 연우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작은아버지와 류연우의 관계는 소현이가 아는 것보다 더 일방적인 관계였던 것 같다.
연우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랜만에 느껴본 이유 없는 적의에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전쟁터를 구르던 시절의 무저갱 같은 눈동자로 고개를 모로 꺾고 물끄러미 류정웅을 쳐다봤다.
이건 정철민과의 첫 연기테스트에서 보여줬던 노(怒)의 표정 연기와는 또 다른 것이다.
마치 개장수가 나타나면 동네의 가장 사나운 개도 오줌을 지리듯이, 수많은 경험으로 쌓인 그 사람의 아우라.
"으, 으힉!"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온몸을 덮쳐서,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치다 화분 받침을 밟고 뒤로 넘어지는 류정웅.
와장창!
"흐음, 괜찮으세요? 작은아버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저 없는 톤으로 묻는 연우.
베란다에서 류정웅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지자 집안 어른들이 다들 몰려왔다.
"뭐여? 베란다는 왜 나가서 혼자 넘어져? 다친 데는 없냐?"
연우의 아버지 류철웅이 동생을 살폈다.
그때 베란다로 뛰어온 큰어머니가 얼굴이 붉어져서 삿대질을 했다.
"이 육시랄 놈이! 하다 하다 이제 내가 가장 아끼는 화분까지 깨 쳐먹어?! 시집올 적부터 가져온 40년도 더 된 화분인디. 너 시방 오늘 나랑 드잡이질 한번 하자는 거여?"
"아, 아니. 방금 연우 저놈이."
류정웅은 억울한 듯이 연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본인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연우는 그저 일어나서 인사했을 뿐이니까.
"이 썩어 문드러질 놈아! 내가 네놈이 연우한테 또 뭔 짓거리 할까 봐 계속 보고 있었는데 어딜 또 연우 핑계를 대?"
아주 크게 화가 난 큰어머니는 아픈 팔을 무릅쓰고 베란다에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고 집안 어른들이 모두 총출동해 뜯어말렸다.
그리고 넘어지면서 화분에 있던 흙을 뒤집어쓴 정웅은 일단 씻고 옷도 갈아입는다며 아내와 함께 나갔고 다음 날 아침 차례를 지낼 때가 되어서야 소리 없이 돌아왔다.
연우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차례만 지내고 도망치듯 다시 나갔고 연우는 친척 어르신들께 준비해 온 용돈이 든 봉투를 나눠드렸다.
연우의 부모님은 집안 어른들께 용돈을 드리는 아들을 보며 언제 이렇게 컸냐며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
3월의 첫날.
국경일 삼일절이면서 동시에 연우에게도 개인적으로 특별한 날이다.
1월 3일부터 방영한 '여름의 옷장' 종방연이 열리는 날.
종방연 참석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들었고 개학일인 내일 등교에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 학교에도 미리 알려놓았다.
두 시쯤 집 앞으로 연우를 데리러 벤이 도착했다.
연우는 오랜만에 공식 스케줄을 소화하러 집을 나섰다.
연우가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서서 차에 다가가자 벤의 자동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류연우 배우님. 오늘부터 함께하게 된 매니저 김민수입니다."
연우가 올라타자 뒤를 바라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민수 형.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저 괜찮으시면 저는 말을 높이는 게 편해서····."
민수의 말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아하, 그럼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서울로 가서 샵부터 들리겠습니다."
"넵!"
김민수는 부드럽게 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다 연우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