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스터 플랜 – 함선
"마 배우님이 여기서 가장 신세대이신 것 같습니다."
"에이, 뭘 또."
라이브를 켜면서 연우에게 말하는 석도.
"연우야, 나는 원래 고기만 굽지 별말은 안 하니까 네가 소통해."
"아하하. 알겠습니다."
별말 없이 조용히 고기를 굽고 먹는 방송을 하는 석도의 라이브는 나름 마니아층이 있는 먹방 컨텐츠다.
그런 석도의 SNS 라이브에 평소보다 다섯 배 이상 많은 수의 시청자가 몰렸다.
"어, 안녕하세요. 여러분."
처음 해봐서 다소 어색하게 화면을 보며 인사하는 연우.
채팅이 너무 빨리 올라와서 읽기 힘들 정도다.
"아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시청자가 들어오며 올라오는 채팅과 하트에 계속 인사하는 연우.
"꼭 너튜버나 인터넷 방송인이 된 것 같네요. 하하."
"이쪽은 이 라이브의 주인이신 마석도 선배님. 네, 저도 아직 못 먹어봤어요."
마석도가 구워준 고기는 먹어봤냐는 질문부터 눈이 아프게 올라오는 질문들에 최대한 차례차례 대답하는 연우.
"이거 혼잣말을 계속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 Janis UK : 오우, 나의 천사. 해외 팬들을 위해서 인사를 해주길 바래.
- Danis Y: 그래,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여름의 옷장'이 아직 해외판권 계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외국인 팬들이 많이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반 가까이 영어로 올라오는 채팅들.
"해외에서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도 많이 들어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류연우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완벽한 발음으로 외국인 팬들과도 소통하는 연우.
"이야, 너 영어도 잘하는구나? 이태리어도 할 때도 신기했는데."
고기만 굽다가 처음으로 입을 여는 마석도.
- p_yoyo : 발음 미쳤다리. 근데 방금 이태리어도 할 줄 안다고 한 건가? 연우갓···.
- deli_03 : 아 녹을 것 같다. 물론 석도찡이 굽고 있는 고기 말하는 거임.
- felianD : 근데, 마석도랑 류연우 조합은 신기한데? 어떻게 친하지. 이태리어는 뭐고.
"아아,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곧 기사로 만나보실 수 있을 거예요."
고기 구우면서 어떻게 채팅을 보는 건지 곧바로 대답하는 마석도.
촬영도 후반부라 이제 슬슬 기사가 나갈 타이밍이기도 하고 업계에선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 뒤로 올라오는 질문들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는 연우.
20분 남짓한 라이브 방송이지만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한다는 게 재밌게 느껴지는 연우다.
"연우야, 이제 슬슬 편하게 식사해야지. 팬들한테 인사드려라."
"아, 네. 그러면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뵐게요. 여러분 좋은 밤 되세요!"
석도와 연우가 손을 흔들었다.
채팅창도 제각각 인사를 하느라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글과 하트들.
딸칵―.
석도는 라이브를 종료하고 삼각대에서 스마트폰을 뺐다.
"라이브 하는 동안 말도 못하고 힘들었죠."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수연과 민수에게 묻는 연우.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고 맛있다고 표현을 못해서 그게 힘들었습니다."
"그래? 하하하. 많이 먹어."
넉살 좋은 민수의 대답에 석도의 입이 귀에 걸렸다.
"류 배우님 얼른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습니다."
"연우야 얼른 먹어봐. 선배님 고기 최고야."
민수와 수연이 함께 엄지를 세우며 고기를 권했다.
"그럼 석도 형. 감사히 먹겠습니다."
연우가 고기를 한 점 집어서 입에 넣었다.
빈말이 아닌 걸 바로 느낄 수 있는 맛.
"와. 이게 무슨 부위예요? 진짜 맛있네요."
"소 갈빗살이야."
역시 고기도 비싼 게 맛있다.
맛있는 걸 먹으니 자연스레 가족들이 떠오르는 연우.
이번에 대전에 내려가서 가족끼리 소고기를 구워 먹었지만 맛있는 걸 먹으니 또 먹이고 싶은 연우다.
'진짜 가족 다 됐네.'
옆을 바라보니 수연이 맛있게 오물오물거리고 있다.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도 있고.'
이것도 같이 먹으라며 무말랭이랑 이것저것 연우 앞으로 가져다주는 민수.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소중한 사람들도 생기고.'
"행복하네요."
연우의 말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캠핑장의 밤은 깊어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캠핑장 근처를 한 바퀴 조깅하고 동네의 대중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온 연우.
정수연은 어젯밤 식사를 마치고 김민수 매니저가 집에 잘 데려다줬다고 연락받았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텐트의 지퍼가 내려가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오는 마석도.
"흐아암. 어디 갔다 왔냐."
"안녕히 주무셨어요. 새벽 운동하고 요 앞에서 대충 씻고 왔습니다."
"아, 요 앞에 금성목욕탕? 씻으러 갈 거면 깨워서 같이 가지 그랬어."
석도의 말에 연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깨우긴 했는데요. 한 20분 정도···."
연우의 말에 석도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냐. 원래 내가 한번 자면 엄청 못 일어나거든."
아닌 게 아니라 연우가 흔들어서도 깨워보고, 뺨만 안 때렸지 별 수를 다 써도 도통 일어나질 않았었다.
"출발해볼까."
"씻으러 갔다 오셔도 시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연우의 말에 석도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씻으나 안 씻으나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그리고 어차피 나 오늘 계속 복면 쓰잖아."
오늘 촬영내용을 상기하고 연우가 끄덕였다.
"그래도 매너상 요 앞에 가서 세수만 하고 오마."
석도가 휘적휘적 걸어갔고 그동안 연우가 캠핑용품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석도의 차에 실었다.
전생에서는 사막을 달리는 험비 차량에다 장비를 안전하게 싣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에, 연우가 팔을 걷어붙이자 순식간에 석도의 차 트렁크에 캠핑 물품들이 완벽한 각으로 쌓여갔다.
세수를 마치고 온 석도가 순식간에 사라진 텐트와 캠핑용품들을 보고 놀라며 다가왔다.
"아이고, 벌써 다 실었네? 같이하지 왜 혼자 했어. 무거웠을 텐데."
"괜찮아요. 맛있는 것 잔뜩 먹여주셨는데 밥값은 해야죠."
트렁크에 차곡차곡 쌓인 짐들을 보고 석도가 감탄했다.
"이야, 원래 올 때보다 훨씬 잘 정돈해놨네. 아주 칼각을 맞춰놨구만. 미필 맞냐."
"아하하…."
연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흐음, 한 시간 남았네. 촬영지 요 앞이더라. 할 일도 없는데 미리 갈까?"
"네, 가시죠."
연우와 석도는 차를 타고 촬영지로 향했다.
"드디어 찍네요. 우리 영화 엔딩."
"그러게, 제작비 중에 여기 들어간 게 제일 큰 거 알지?"
극 중에서 국내 마약 거래의 권한을 손에 넣기 위해 무리해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돈을 융통해 온 박강우가 피에르 최의 일당과 거래를 하는 씬.
이 후반부 촬영을 위해 스턴트맨들도 최다로 투입되고 꽤나 복잡한 동선의 액션씬도 있다.
다행히 주연 배우들이 소화해야 할 액션은 간단해서 촬영 중간중간 무술 감독을 통해 지도받는 걸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
연우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직접 액션을 소화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지만, 스토리상 그럴 수는 없기에 다음 작품은 액션이 조금 가미된 작품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인천 외곽의 시골길을 달려 촬영지인 항구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위용.
"···이게 박찬홍 감독님 스케일인가."
"확실히 대단하네요."
이제 퇴역하는 낡은 여객용 페리호를 해체하기 전에 잠시 빌린 영화팀.
촬영에 필요한 옆면과 함교의 일부만 도색하고 개조해서 특수세트팀이 꾸민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란 걸 실제로 보니 대단하다.
연우와 석도의 눈에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군용 함선이 보였다.
차를 몰고 항구 앞에 도착한 연우와 석도.
아직도 준비가 한창인지 배 안으로 수많은 촬영 장비들을 나르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린 연우와 석도는 무언가 바쁘게 지시하고 있는 박찬홍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석도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박찬홍 감독.
"둘 다 일찍 왔구만."
"배가 대단한데요."
박 감독이 석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보이는 면만 그런 걸세. 그것보다 더 공을 들인 건 이쪽이지."
연우와 석도를 촬영장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 구조물로 안내하는 박 감독.
"한번 들어가 봐."
박 감독은 마치 공부 잘하는 자식을 소개하듯 뿌듯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이야, 군선에 타본 적은 없지만 완벽한데요?"
"정말 그렇네요."
전생에 군용 함선을 많이 봤던 연우라 바다에 떠 있는 배는 그렇게 크게 감흥이 없었지만, 오히려 이번엔 놀랐다.
전자장비로 보이는 것들까지 정말 완벽하게 구현해 놓은 군용 함선의 실내.
석도의 목소리를 듣고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이주석 대표.
"배우님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으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 이쪽은 특수세트 전문 회사 이 대표님이시네."
박 감독의 소개를 듣고 인사하는 석도와 연우.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번 씬은 재촬영이 어렵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는 이렇게 정교하게 꾸며놓은 내부가 엉망이 될 예정이라 재촬영이 힘들다고 들었다.
"그래도 CG 처리하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더 리얼하기도 하고, 비용도 오히려 적습니다."
이 대표의 말에 끄덕이는 박 감독.
그 뒤로 곧 현장에 도착한 출연 배우들과 스턴트 팀까지 마지막 동선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오늘 촬영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함교 내부 세트에서 촬영하는 액션과 저 밖의 바다에 떠 있는 실제 배에서 하는 촬영.
석도와 연우가 세트에서 동선을 맞추는 동안 배 위에선 다른 배우들이 열심히 촬영 중이다.
"액션!"
박찬홍 감독의 사인과 함께 배 위에서 돌아가는 카메라.
정보통 '고물상' 역할을 맡은 한지상 배우가 페인트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다.
"후딱 칠해야 혀. 네 시간 안에는 끝내야 해."
"아이고 팀장님 팔 떨어져유. 피에르는 왜 꼭 당일에 일을 시키는거여."
여객용 페리호의 흰색 부분을 군선처럼 회색으로 칠하는 고물상의 팀원들.
"어쩔 수 없잖어, 오늘밖에 시간이 없는디."
"광식아 기름 좀 더 쳐라. 바로 말라야 해."
이건 영화 속 설정이기도 하고 실제 촬영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영화 속 박강우가 마약 거래를 위해 피에르의 부름으로 방문하는 날.
그리고 현실에서 그 씬을 촬영하는 지금 이 순간.
둘 다 반나절밖에 없는 타이트한 일정이다.
"어허, 그 상자는 조심해서 올려. 까딱하면 우리 다 죽는다."
"예, 팀장님."
상자를 든 사내들이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면서 박 감독이 외쳤다.
"오케이. 컷. 갑판 촬영 종료."
박 감독의 말에 환호하는 스탭들.
"아이구 살았다. 갑판이 죄다 철판이라 구워지는 줄 알았네."
"자자, 내려갑시다."
정오를 지나 해가 높이 뜨자 내리꽂히는 뙤약볕에 스탭도 배우도 달궈졌다.
달궈진 것은 배 팀만은 아니다.
도착한 '박강우' 역의 정하균 배우까지 합류해서 동선의 합을 맞추는 컨테이너 팀도 잔뜩 열기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