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영화 「마스터 플랜」 (2)
삐빅─.
"다 해서 8,700원입니다. 카드는 앞에 꽂아주세요."
"수고하십쇼."
카운터에 있는 먹을 것들과 소주를 비닐봉투에 넣어서 편의점을 나서는 곽지철.
피폐해진 얼굴에 눈은 퀭해서 영락없이 사업에 실패한 백수의 몰골이다.
"하,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냐 꼬여."
신세를 한탄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곽지철이 허름한 여관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다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이 서서히 깔리면서 곽지철이 들어가는 방문을 불안한 앵글로 잡았다.
관객석에서 정수연은 영화 초반부에 곽지철이 집 문을 열어줬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속으로 외쳤다.
'안 돼! 들어가지 마아.'
긴장감이 고조되는 음악이 절정에 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 곽지철이 불을 켜자 침대엔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당신이야? 나한테 의뢰 넣은 곽지철?"
바로 의뢰를 받고 등장한 해결사 피에르 최가 침대에 누워서 지철이 어제 먹다 남은 과자 안주를 집어 먹고 있었다.
"휴우."
관객석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편 객석의 반응과는 반대로 스크린 속에서의 곽지철은 피에르 최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애 떨어질 뻔했네."
곽지철이 커다란 덩치로 놀라며 심장을 부여잡고 우스꽝스럽게 벽에 기대자 관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덩치는 곰 같은 게···, 당신이 떨어질 애가 어딨어?"
한심한 듯 쳐다보며 무미건조하게 뱉는 피에르 최의 대사가 들리자 다시 관객석에서 터진 웃음.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듯 문 손잡이를 붙잡고 눈썹을 씰룩거리며 곽지철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이 피에르 최입니까?"
"그럼 누구겠냐. 여관방이 싸구려라 의자가 없더라. 여기 눕든가."
능청스럽게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자세를 요염하게 옆으로 고쳐 눕는 피에르 최. 그러자 곽지철은 결국 눈치를 보면서 침대 끄트머리의 모서리에 처량하게 앉았다.
그 능청스런 모습과 덩치에 안 맞게 처량한 모습의 대조에 관객석에서는 잔잔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뒤로도 류연우와 마석도가 피에르 최와 곽지철 그 자체가 되어서 서로 내뱉는 티키타카가 작품 초반부터 곽지철의 시점으로 감정이입을 해서 달려온 관객들의 긴장감을 부수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반전시켰다.
유명한 영화 평론가이자 씨네플랜의 기자인 유강진은 영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주연배우인 류연우의 등장이 늦었군. 일부러 약자인 소시민이자 지킬 게 있는 가장의 입장으로 극의 긴장감을 충분히 끌어올린 다음에 최고조에 달했을 때 등장시킨 거야. 역시 박찬홍 감독인가.'
스크린에서 자연스럽게 곽지철이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뺏어서 과자를 꺼내며 이야기하는 피에르 최.
"과자나 먹으면서 좀 기다리자고. 이 바닥 타짜들 불렀으니까. 사슴이 먼저 올라나?"
"사슴이요?"
피식 웃으면서 과자를 하나 꺼내 들고 와삭 씹어먹는 피에르 최의 얼굴이 마치 첫 등장씬을 연상시키려는 듯 크게 잡혔다.
류연우가 나오는 스크린을 보면서 감탄하는 유강진 평론가.
'박찬홍 감독은 그렇다 치고, 저 배우가 가지는 흡인력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그 기대가 한 점에 몰린다는 건 그만큼 그 자리를 살려내기 어렵다는 건데, 극 전체를 잡아먹는 카리스마다.'
어느새 작은 모텔방으로 피에르가 부른 전문가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고 방이 꽉 찼다.
"피에르. 왜 이런 곳으로 모이라고 하는 거야? 으, 불결해."
"오우 고물상 아재요. 살이 좀 붙었네. 망치 들면 딱 그건데? 드워프."
"너는 안 본 사이에 머리가 더 벗겨진 것 같다. 머리는 못 그리냐."
잠입, 유혹, 연기 담당인 '사슴'.
정보 수집과 기술담당인 '고물상'.
설치미술과 분장 담당인 '피카소'.
그리고 설계자 피에르 최.
‘사슴’ 제니퍼는 불평하느라, 다른 이들은 저마다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하느라 바빴고 그 가운데에 뻘쭘하게 앉아서 침대 모서리에서 눈치 보고 있는 곽지철만 이리저리 치이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때 피에르 최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방구석에 있는 서류 가방을 들고 그 안에서 유치원생이나 쓸 것 같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자 주목."
스케치북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하는 피에르 최의 음성에 모두 모두 말을 멈추고 주목했다.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주님 캐릭터가 그려진 핑크색 아동용 스케치북이 화면에 잡히자 관객석에선 웃음이 터졌다.
"아아, 저 인간 취향은 왜 저렇게 특이한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제니퍼.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피에르 최가 스케치북의 첫 장을 넘겼다.
외관과는 다르게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빽빽한 자료와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 작전 브리핑.
"판 한번 크게 키워볼까."
예고편의 마지막에 나왔던 류연우의 그 대사다.
그 뒤로 유쾌한 반격을 기대하게 만드는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작전을 설명하는 피에르 최와 서로 의견을 나누며 더 완벽하게 작전을 고쳐나가는 멤버들의 모습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화면에 고혹적인 붉은 립스틱과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제니퍼가 나올 때마다 남성 관객들은 침을 꼴깍 삼켰고, 셔츠의 팔을 걷어붙이고 잔근육과 힘줄을 내비치며 설명에 열중하는 피에르가 나올 때마다 여성 관객들은 괜히 뺨에 옅은 홍조가 올랐다.
그때 곽지철이 제니퍼를 힐끗 보면서 피에르 최에게 질문을 했다.
"눈망울이 사슴 같아서 다들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아니. 남자들의 마음을 다 녹용."
자신을 놓고 대화하는 둘을 보면서 습관적으로 고혹적인 미소를 보내던 '사슴' 제니퍼의 얼굴이 일순 황당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저 인간 또 시작이네. 썰렁한 개그···. 재미없어 피에르."
"푸헤헤. 나는 재밌는데 왜? 녹용녹용."
피카소가 작전에 필요한 분장용 얼굴들을 스마트 패드에 스케치하다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리고 모텔방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각자의 일에 착수하는 멤버들.
손진욱도 영화에 집중하며 관람을 하고 있었다.
'연우는 연기가 완전 물이 올랐네. 첫 드라마 촬영할 때랑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성장했어. 그리고 소현 씨는 진짜 연기 변신이네. 평소 하던 캐릭터랑 정반대야. 이 영화 재밌다. 작은 여관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영화 내의 세계관이 더 크게 확장되는 걸 노린 거겠지. 역시 박찬홍 감독님.'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 영화의 흥행 성적을 점쳐보는 손진욱.
'이 정도면 보수적으로 사백만···? 아니, 후반부 내용만 좋다면 육백만 관객이 들 수도 있겠다.'
후반부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내용도 흥미롭고 캐릭터들도 살아 움직이는 듯 톡톡 튀었다.
그 뒤로 영화 내용은 시원하게 전개되며 관객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거칠게 몰아쳤다.
"아니, 안녕하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네요. 선배님!"
"음? 내가 그쪽을 알던가?"
"59기 김지훈입니다. 지난번에 총동문회에서 뵙고 인사 한 번 드렸습니다."
"아아, 그랬나?"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노 회장의 심복인 구 실장에게 접근해서 음성 샘플을 녹음하는 피에르.
"흐응,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공에 힘이 안 실리지."
"아가씨, 내가 좀 알려줘 볼까?"
"어머, 그러시면 저는 좋죠. 분명 배웠는데···, 잘 안되네요?"
골프연습을 핑계로 박강우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유심칩을 바꿔 끼우는 제니퍼.
그리고 그걸 작은 창고에서 모니터로 지켜보며 피에르가 곽지철에게 주머니에서 라이터 권총을 꺼낼 때 관객석에서 조용히 관람하던 매니저 김민수는 인형뽑기 가게를 떠올리며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을 느꼈다.
'뭔가 촬영에 일조한 것 같아서 뿌듯하네.'
그리고 스크린은 다른 멤버들을 비췄다.
"야야, 그건 저쪽에 가져다 놓고. 사람들 섭외는 끝났어? 어중이떠중이는 안 돼. 확실한 사람들로만 넣어."
"예 팀장님. 우리랑 작업 맞춰봤던 프로들로만 다 불렀심더."
고물상의 팀원들이 동분서주하며 세트장을 꾸미고 사기꾼들을 섭외하고 있다.
그때, 구석에서 피카소가 식기를 들면서 인상을 썼다.
"아재요. 이거 식기들 싸구려 쓰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노르웨이산으로 가져다 놓자니까. 노르웨이."
"야 임마 그게 노르웨이산이다."
"···맞지? 어쩐지 표면에 윤기가 좔좔 흐르더라. 내 다 알고 시험해봤다."
그런 피카소를 보며 고개를 젓고 다른 곳을 손보러 바삐 움직이는 고물상.
"하여튼 저 등신. 요 앞에 시장 가서 사 왔다. 노르웨이는 개뿔."
티격태격하지만 오래된 공장을 개조해서 파티장으로 완벽하게 꾸며내는 고물상과 피카소.
영화의 빌드업이 쌓여갈수록 관객들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그건 영화 전문 주여울 기자도 마찬가지.
'박강우에게 사기를 치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준비를 하지? 그 노 회장이라는 사람을 움직일 수가 있나? 아닌데, 그럼 류연우가 몰래 접근해서 음성 샘플을 딸 필요가 없잖아.'
그 뒤로 변조된 목소리를 사용해 구 실장을 연기하며 박강우를 꾀어내는 데 성공한 피에르 최.
그렇게 스크린 속에서 결전의 날이 밝았고 꾸며진 거짓 파티장으로 박강우가 도착했다.
고급스런 대문을 지나 높은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서 입장한 파티홀.
"어머, 골프 프로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셨군요?"
"아니, 그 골프장의 레이디?"
우연을 가장한 두 번째 만남으로 다가간 제니퍼가 이번엔 유채연이라는 인물인 척 행세하며 박강우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른 채 박강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샴페인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신이 나서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때 화면에 등장하는 피에르 최.
"아잇, 씨···. 뭐야?!"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런 곳이 처음이라 신기해서 두리번거리다 보니."
작전대로 박강우에게 부딪히고 화를 내도록 유도했다.
스크린에 비치는 한없이 비굴한 표정의 류연우를 보면서 팬카페 매니저 이진아는 깜짝 놀랐다.
'내 배우가 저런 표정도 할 수 있구나.'
「여름의 옷장」과 「가람 너머 별」에서의 캐릭터는 생각보다 흡사하다.
부잣집 도련님이고 여주인공에게 처음엔 까칠한 태도로 대하다 나중에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되는 클리셰적인 인물.
'차우주와 서희한테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야. 너무 신기하다.'
팬으로서 류연우가 등장하는 모든 영상물들을 몇 번이고 찾아보고 돌려본 이진아는 영화에 피에르 최가 등장한 순간부터 매 장면마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표정에 깜짝깜짝 놀라고 소름이 돋았다.
그 뒤로 이어진 장면은 박강우가 피에르 최를 화장실 쪽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가는 부분.
여기서 제니퍼와 서로 눈짓하면서 끌려가는 와중에도 박강우의 눈길을 피해 익살스럽게 표정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이 교차 편집되어서 나왔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연출을 한 박찬홍 감독과 연기를 한 류연우가 동시에 생각했다.
'이 장면은 딱 한 가지 이미지를 노렸는데···.'
둘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이 극장 내에 있는 수많은 관객들이 연우를 보며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
피에르는 그 이름 때문만이 아니라, 술에 살짝 취한 듯 붉게 메이크업한 코도 그렇고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 안에는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숨긴 절묘한 표정 연기가 어우러져서 익살스럽지만 한편으론 무서운 사람.
마치 광대 '삐에로'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피에르의 멱살을 잡고 모퉁이를 돌아간 박강우는 몽둥이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는 화면이 암전됐다.
암전과 동시에 모든 관객들의 머리에 물음표가 뜨는 듯했다.
'이게 뭐지? 이렇게 공들여서 사기를 쳐 놓고 기절을 시킨다고? 그러면 처음부터 그냥 납치하면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