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육교와 옥상
- 「스케치」 베를린 영화제 상영에서 5분 넘게 기립박수 쏟아져.
-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히다. 「스케치」.
- 서지은을 추천한 건 한소현? 베를린 영화제 「스케치」.
- 류연우가 「스케치」 영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LN엔터테인먼트 김주성 대표가 흡족하게 웃었다.
정례회의에 참석해서 영화 「스케치」의 국내상영 일정에 대해 논의를 나누는 관계자들.
"골든미디어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네. 2주 후부터 상영관 확보 가능하다고 합니다."
"호오, 그렇게 빨리?"
"아무래도 우리 류 배우가 지금 치트키이지 않습니까. 뭐든지 해주겠다는 기세입니다."
김주성 대표는 윤미연 팀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에 있는 임 실장을 쳐다봤다.
"임 실장. 파인엔터 쪽은 어떤가?"
"그게···, 이쪽은 의외로 생각보다 시큰둥합니다. 지난번에 「가람 너머 별」 때문에 물먹었던 「발두르」가 파인엔터에서 투자를 꽤 많이 했잖습니까. 그 뒤로 이상하게 비협조적인 느낌입니다."
골든미디어와 파인엔터가 대부분의 국내 영화 배급을 담당하고 있다. 둘의 점유율을 합치면 80%에 육박하기 때문에 둘 중 한 곳과 함께 가는 게 필수다.
"흐음. 그래도 설마하니 그런 이유로 그러겠는가. 우리가 훼방을 놓았던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흥행했던 것뿐인데. 그쪽이 작품 보는 눈이 없는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손을 깍지 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김주성 대표.
확실히 그 이후로 LN엔터가 손대는 작품마다 견제를 하듯 비협조적인 건 맞았다.
지이잉─.
그때 김주성 대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음? 내 전화기인가. 미안하네."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스마트폰을 들어 수신 거절을 하려다 액정을 보고 표정이 바뀌었다.
"이건 받아야겠군. 류 배우 전화라서."
김주성 대표의 말에 회의실의 직원들이 관심을 보였다.
지금 정례회의에서 다루고 있는 메인토픽이자 현재 국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기에 당연했다.
"연우 군. 그쪽은 지금 새벽이 아닌가요?"
- 하하. 맞습니다. 새벽 두 시예요. 아무래도 기사화되기 전에 미리 좋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출근하실 시간에 맞춰서 전화했습니다.
"새벽에 전화해도 괜찮습니다. 마침 정례회의 중이라 잘됐군요. 좋은 소식이라 함은?"
김주성 대표의 입에서 나온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회의실의 직원들이 숨을 죽였다.
스피커폰이 아님에도 수화기 너머로 연우의 목소리가 들릴 것처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 네. 우리 영화 「스케치」가 수상이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박찬홍 감독님이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으셨는데 아직 무슨 상인지까지는 모릅니다.
"오오오!"
"이얏!"
수화기 너머로 연우의 작은 목소리가 회의실의 직원들에게 명확히 들렸고 회의실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마치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은 것 같은 반응이다.
김주성 대표도 입꼬리가 올라가서 웃음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내 통화를 이어서 하기 위해 직원들을 보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아아, 연우 군. 고생 많았습니다. 그럼 귀국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 아무래도 시상식이 끝나고 출국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체류해야 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김주성 대표가 연우와의 통화를 끊고 정 팀장을 바라봤다.
"정 팀장. 지금 당장 출발하게. 티켓은 준비되어있지?"
"예. 물론 스탠바이 상태였습니다."
곧바로 정혁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시 회의실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김주성 대표.
"파인엔터가 시큰둥하다고 했나? 이렇게 되면 아쉬운 건 그쪽이겠지."
***
연우가 베를린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
따로 한해운을 불러내서 몇 가지 지시를 내렸었다.
"예? 백노야에게 20억씩이나요? 연예인들이 돈 잘 버는 거야 알고 있지만, 나중에 갚으려면 부담되지 않으시겠어요?"
놀라며 묻는 한해운을 보고 연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그걸 왜 내가 갚아? 당연히 백노야가 쓰는 거지. 그냥 그렇게 전달하면 군말 없이 처리할 거야."
"아, 그렇습니까?"
그제야 끄덕이던 한해운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며 연우를 바라봤다.
"그런데 팀장님. 베를린에 그런 게 있습니까? 암흑가의 정보 상인이라니···. 저도 정보요원이었지만 처음 듣는데요."
그런 한해운을 보며 피식 웃는 연우.
"최소 10년 이상은 굴러야 알 수 있지."
"으으, 해외파트에서 10년이요? 그렇게 오래 나가 있는 사람이 팀장님 말고 또 있습니까?"
보통 해외파트는 4년 이상 근무하기 어렵다.
원래 해외공작이라는 게 국내파트를 10년 정도 맡아야 나갈 수 있고, 그쯤 되면 승진해서 방첩과 관련한 요직으로 발령난다.
대부분의 요원은 긴장의 연속인 해외 임무를 못 견디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고 귀국하는 편이다.
만약 요직을 거부하고 연우처럼 해외에서 남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에 정체가 한 번이라도 탄로 나면 국내로 불러들이기에 해외파트를 전생의 연우보다 길게 맡은 사람은 은퇴한 사람들까지 포함해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 작전을 굳이 위험하게 팀장님이 직접 할 필요 없이 백노야의 부하를 시키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한해운의 말에 연우가 입을 열었다.
"물론 내 명령이 있었지만 백노야가 너에게 협조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저번에 들은 대로 손녀 때문이 아닙니까?"
"글쎄, 물론 백노야의 말대로 은혜를 갚기 위한 도의적인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백솔이 이 땅에서 사라지면 가장 이익을 얻는 게 누굴까?"
연우의 말에 한해운이 깨달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가 추측하는 대로 백솔이라는 자들이 국내의 마약 유통을 잡고 있다면, 그들이 없어져서 생긴 암흑가의 무주공산을 백노야가 차지하겠군요."
한해운의 말을 듣고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노야가 암흑가의 정보 상인과 거래를 하도록 물꼬를 터준다면 갈수록 컨트롤하기 어려워질 거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지."
***
출발하기 전 한해운과 나눴던 대화를 회상하던 연우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일찍부터 홀로 호텔을 나섰다.
- 오늘 처리하는 게 좋겠다.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한해운의 답장이 날아왔다.
- 한해운 : 현지에서 섭외한 자가 티어가르텐 안에 있는 전승기념탑에 대기하겠답니다.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연우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노란 지하철에 올라탔다.
'전승기념탑이라···. 나름 좋은 선택인데.'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이동한 연우.
그리고 한자플라츠(Hansaplatz) 역에서 내려서 저 멀리 보이는 전승기념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한국에서 한해운을 통해 백노야에게 지시를 내린 건 자금운반이었다.
150만 유로 정도 되는 자금을 베를린으로 전달해달라는 부탁.
백노야가 한화로 20억 원 정도 되는 돈을 깔끔하게 세탁했고, 그 돈은 유로화(EUR)로 바뀌어 연우의 입국과 맞춰 독일 국경을 넘어서 들어왔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전승기념탑 근처까지 도착했다.
"역시 저 탑은 여전히 아름답네."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동그랗게 만들어 놓은듯한 구조물 위로 높게 솟은 탑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빅토리아 여신상이 티어가르텐 공원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전승기념탑(Siegessaule)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전쟁을 승리하고 세운 기념비다.
물론 장소를 정한 브로커는 근처가 공원이라 유사시에 도주하기 좋아서 고른 장소이겠지만, 의미를 부여하자면 '백솔'과 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로도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전승기념탑 아래로 가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저마다 사진을 찍고 있었고, 연우는 조용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저 사람인가.'
꽤 많은 인파 속에서도 백노야 쪽에서 섭외했다는 현지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생긴 중년 독일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는 연우.
"교수(Professor)가 보내서 온 사람이 맞습니까?"
미리 전달받은 암구호를 통해 물어보자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바라봤다.
"예? 아! 맞습니다. 여, 여기 물건입니다."
평범하게 생긴 검은 가죽가방이다.
그가 내미는 가방을 받아들고 안을 확인했다.
지시한 대로 500유로권 지폐가 500장씩 여섯 묶음이 들어 있었다.
가장 고액권으로만 준비했음에도 가방의 무게가 묵직했다.
"맞군요. 수고하십시오."
"저기···."
물건을 받고 돌아서려는 연우를 남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몸을 돌려서 쳐다보니 쭈뼛거리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저인 줄 바로 알았습니까? 분명 신원은 확실하게 비밀이라고 했는데···."
연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몇 번 안 해본 초짜인 것 같았다.
"전승기념탑 아래에 왔는데 한 번도 탑을 올려다보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린다는 건 이곳에 관광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왔다는 뜻이니까요."
저 높은 탑 위에서 빛나고 있는 황금색 빅토리아 여신상을 가리키며 말을 하자 남자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탑을 올려다보거나 그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별로 안 해본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라면 상대에게 말을 걸지 마십시오. 언젠간 잡아먹힙니다."
연우의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런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연우도 조용히 돌아서서 다음 장소로 향했다.
'흐음. 역시나.'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방금 대화를 나눴던 중년 독일인이 아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스마트폰의 검은 액정을 통해 반사되는 빛으로 뒤를 확인하니 동양인 남성 둘이 멀찌감치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백노야가 보낸 하수인인가.'
백노야의 입장에서는 20억이나 되는 자금을 맡기고 감시를 붙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마도 위해를 가하려는 목적은 없을 테고, 그저 이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 알아볼 요량일 것이다.
연우가 걷는 속도를 올리자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주변에 있는 건물들을 둘러봤다.
'저건 벨뷔 궁(Bellevue Palace)이군. 그렇다면 저 다리를 건너면 '그 건물'이 있을 텐데.'
옆으로 보이는 독일 대통령 관저를 지나며 그 앞을 흐르는 슈프레강 위의 다리를 건넜다.
그러자 연식이 오래되어서 건물 외벽이 너덜너덜한 5층짜리 건물이 나왔다.
'이 건물 1층에 있던 빵집이 참 맛있었는데.'
폐업했는지 안이 어두웠다.
연우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거리를 벌리고 미행하던 남자들은 연우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빠르게 뛰어와서 한 명은 입구를 지키고 다른 한 명은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미행 대상이 몇 층에 있는지도 모르고, 일을 마치고 내려오다 마주칠 수도 있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건물 계단을 오르는 남자.
한 층씩 조심스럽게 올라갔지만 5층까지 살펴봤음에도 미행 대상이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1층을 빼곤 다 거주용 빌라 같은데 어디로 들어간 거지? 목적지가 이 건물인가?'
다시 아래로 한 층씩 내려가며 살펴보는데 3층의 문 하나만 색이 달랐다.
방화문처럼 생긴 걸 보니 확실히 누군가의 집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계단이 또 있나?'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남자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뒤편의 대로를 건너서 초등학교(Grundschule)와 연결되는 작은 초록색 육교가 나왔다.
"이런 젠장! 무슨 건물 3층이 육교랑 연결되어 있어!"
남자가 계단의 작은 창문으로 밖에서 기다리는 동료에게 외쳤다.
"빨리 올라와! 놓친 것 같아. 뛰어!"
밖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황급히 뛰어 올라왔다.
놓쳐버린 미행 대상을 쫓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서 육교를 건너고 양쪽 계단으로 흩어지는 둘.
연우는 그 건물의 옥상에서 멀어지는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초에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계단을 올라서 5층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의 난간을 밟고 옥상으로 올라왔었다.
연우는 꽁지에 불이 붙은 듯 헉헉거리며 달려가는 둘을 보면서 조용히 건물을 내려왔다.
그대로 미행을 따돌리고 지하철을 통해 이동한 연우는 베를린역의 지하에 있는 무인 물품보관소로 향했다.
두 개의 로커에 나눠서 돈을 보관한 연우.
로커를 열 수 있는 얇은 일회용 카드키를 받고 또다시 장소를 이동했다.
'직접 이용하는 건 처음이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서독이 서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부터 베를린은 세계 첩보의 각축장이었다.
유럽의 중심에서 이념에 의해 둘로 갈라졌던 나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견제하는 최전선이 되었던 독일.
대표적으로 미국 중앙정보국(CIA)부터 시작해서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물론이고 각국의 첩보조직이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했었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이미 독일이 통일된 이후라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십 년간 첩보의 최전선이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도 성장했다.
그게 바로 '지하 정보상'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도서관'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