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새로운 프로젝트
정혁 대표가 공민정이 제출한 보고서를 들고 연우와 함께 3층 카페로 내려갔다.
퇴근할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 카페는 한산했다.
카페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정혁이 보고서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생과일주스를 만들어 온 김주성이 연우와 정혁의 앞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류 배우가 차기작을 하려는 모양이군요?"
김주성 대표의 말에 연우가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둘만 따로 카페에 내려온 건 처음이니까요."
그러자 정혁이 김주성을 보고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대표님. 제가 내려올 땐 귀찮다고 빨리 올라가라고 하시더니, 류 배우가 오니까 테이블에 앉으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카페 바쁠 시간에 내려오지를 말든가. 내려왔으면 설거지라도 하면서 물어보든가."
괜히 장난을 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정혁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다시 보고서를 바라봤다.
보고서에서는 배우 류연우의 성공을 기업론에 빗대어서 설명하고 있었다.
"퍼스트 무버와(First mover) 패스트 팔로어라(Fast follower)···."
정혁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김주성 대표가 물었다.
"기업론 아닌가?"
"예. 맞습니다. 새로 들어온 사원에게 류 배우의 작품들이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 분석해보라고 지시를 내렸거든요."
김주성 대표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군."
"아직 보고서도 안 읽어보셨잖아요?"
"방금 혁이 네가 말했잖아. 퍼스트 무버라고."
"그것만 듣고도 보고서 내용을 다 파악하신 겁니까."
사실 연우도 그 말을 듣고 어떤 내용의 보고서인지 대충 파악을 했다.
'퍼스트 무버라···.'
연우는 펭귄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극 펭귄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결국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바다에는 펭귄을 노리고 있는 바다표범과 여러 천적들이 있기에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바다로 들어갈지 말지 선택을 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펭귄 떼들은 우물쭈물거린다.
이때 한 마리의 펭귄이 먼저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러면 수많은 펭귄이 일제히 따라서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그 첫 번째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하지.'
기업론에서는 퍼스트 펭귄의 역할인 '퍼스트 무버'가 위험을 무릅쓰고 시장 개척에 성공하면 그 후발주자인 패스트 팔로어들이 따라온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처음 개발한 회사가 나오면 다른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그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선 연우의 행보를 그 퍼스트 무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김주성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 배우가 새로운 시도로 성공할 때마다 수많은 패스트 팔로어들이 비슷한 장르와 비슷한 시도들을 따라 했거든요. 하지만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건 언제나 퍼스트 무버지요."
김주성의 이야기를 듣고 정혁이 말을 보탰다.
"류 배우의 커리어를 보면 사실 도전의 연속이었지 않습니까."
주 타깃층이 고연령대인 KBC1에서 로맨스가 가미된 퓨전 사극인 「가람 너머 별」을 시도했다.
그리고 제법 잘나가는 배우가 됐을 때 사회적 비주류인 해외 입양아에 관한 저예산 독립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반대하고 성공확률을 희박하게 생각했던 국내의 판타지 드라마.
그리고 이제는 할리우드에서 찾는 배우가 됐음에도 선택한 소극장 연극무대까지.
연우를 바라보면서 김주성이 미소 지었다.
"시청자들은 그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 말고도, 제작단계에서부터 부딪히는 역경과 그럼에도 '미지의 영역에 첫발을 내딛는 용기'까지 모두 커다란 서사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김주성으로 하여금 류연우라는 배우를 믿고 '새별'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끔 한 이유였다.
김주성 대표가 흥미로운 눈을 하고 연우를 바라봤다.
"그런데 연우 군."
"네."
"아직도 더 개척할만한 시장이 있습니까? 퍼스트 무버로 활약할 시간은 이제 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확실히 이제 새로운 시장은 거의 없었다.
연우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이런 행보를 했던 건 아니다.
그저 마음 가는 작품들을 선택해 왔을 뿐.
"글쎄요. 그건 한번 고민을 해봐야겠는걸요."
연우의 대답이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윤미연 이사님이랑 한번 열심히 고민해보겠습니다."
***
그날 이후로 연우는 매일같이 3층 카페로 내려와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요원으로 근무할 때도 추적 중인 타깃에 대해 실마리가 잡히지 않거나 뭔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혹시 SBC 예능국 PD 중에 그 사람 있잖···."
"언니 내가 지난번에 만난다고 했던 그 남자가···."
"내가 지난번에 추천했던 종목 오른 거 봤어? 크으, 요즘 내 감이···.".
연우의 귀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들부터 개인적인 잡담들까지.
참 이상하게도 카페라는 공간은 개방된 공간이라 남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 기울이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데도 여러 사람이 저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공간에 적절한 소음이 더해져서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쉽게 늘어놓기 때문에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훔쳐 듣다 보면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생활 패턴이나 생각의 루트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들려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저 코트 주문했어요. 이거 어때요?"
"와, 예쁘다. 근데 나도 비슷한 거 하나 있는데."
"그래요? 이번 S/S에 이런 스타일 다시 유행이라는데 다시 꺼내 입어요."
스마트폰을 보며 옷 이야기를 하는 두 직원이 연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LN에서부터 있었던 홍보팀 직원들이었던가.'
연우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옷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근데 이거랑 디자인이 비슷하긴 한데, 몇 년 전에 산 거라서."
"에이, 코트는 괜찮아요. 원래 유행은 다 돌고 도는 거잖아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떠오른 연우가 노트북을 켰다.
'유행은 돌고 돈다라.'
노트북에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흐음···. 90년대 국내 드라마,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들, 웹툰과 웹소설.'
너튜브를 통해 트렌드를 살펴보던 연우가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 20대 여성들의 프로리그 팬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라···.'
여러 자료들을 취합하면서 얼추 이 장르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베이스만 이걸로 하고 요즘 트렌드를 조미료 삼아서 잘 버무리면 제법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연우가 노트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4층 정혁 대표실로 올라가면서 스마트폰을 들어 윤미연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류 배우님.
"아, 윤 이사님. 정혁 대표님이랑 셋이서 잠시 회의 가능할까요."
연우의 말에 윤 이사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하고 싶은 작품이 생기셨어요?
"아니요. 우리 회사의 마일스톤으로 괜찮을 것 같은 장르가 떠올랐어요."
전화를 끊은 연우가 4층 정혁 대표실로 가자 곧 윤미연 이사가 올라왔다.
대표실에 있는 원탁에 앉은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정혁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류 배우님. 그 장르라는 게 뭔가요?"
연우가 테이블 한쪽에 있는 공민정의 보고서를 들면서 말했다.
"퍼스트 무버랑 패스트 팔로어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연우의 말에 두 사람이 집중했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 연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슬로우 팔로어(Slow follower)는 어떨까요?"
"네? 슬로우 팔로어요?"
윤 이사의 질문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누가 그러더군요. 유행은 돌고 돈다고. 몇 년간 안 입던 패션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하는 것에는 누군가 처음 옷장에서 그 아이템을 꺼내입은 사람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가장 먼저 물속으로 뛰어드는 펭귄처럼 말이다.
연우의 말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두 사람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전에 유행했던 장르지만 최근엔 잘 보이지 않는 걸 말하는 거군요?"
"음, 그런게 뭐가 있더라···."
지금 새별 엔터에는 젊은 배우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 배우들이 모여서 한 드라마에 출연하기엔 중심배역이 적은 장르인 로맨스는 무리였고, 백솔의 위협으로부터 최대한 문제될 일을 줄이기 위해선 외부의 배우들을 최소화하면서 진행할 수 있는 장르가 필요했기에 사극이나 판타지도 무리였다.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고 그 중에도 젊은 배우들을 잘 기용할 수 있는 장르.
"스포츠 드라마. 예를 들어 아마추어 배구나 농구 같은 소재는 어떨까 싶은데요."
연우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혁이 곧바로 알아들었다.
"아아, 내가 젊었을 때 농구 드라마는 거의 신드롬이었습니다. 90년대 중반이었는데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군요."
잘 안다.
연우의 전생도 그 시절이 학창시절이었으니까.
"흐음, 스포츠물이라···. 듣기에는 옛날에 유행했던 농구 드라마가 생각이 나서 재밌었지만 잘못 건들면 올드할 것 같은데요."
"물론 그냥 평범한 스포츠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의 감성에 맞춰서 세련된 시나리오로 가야겠지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배구나 농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물들이 우리나라 젊은 층에도 남녀 관계없이 인기가 제법 좋더라구요."
연우의 말에 정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메이션이라···. 저도 인터넷에서 관련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올라오기 전에 카페에서 자료를 좀 조사해봤는데 최근에 국내 젊은 여성층 사이에서 프로 농구나 프로 배구가 제법 인기가 좋아졌더라구요."
연우의 말을 듣고 정혁과 윤미연이 성공 가능성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기획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
"회사 차원에서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면 어떨까요. 소속 배우들끼리도 친해지도록 자체 너튜브 예능을 찍어보죠. 우리 배우들 다 등장시켜서."
사실 지금 모인 배우들은 연우를 구심점으로 하고 있지만, 연우가 서로 다른 작품들에서 만난 배우들이라 그들 사이에는 서먹한 감이 있었다.
금세 친해진 한별과 서지은 같은 배우도 있는 반면에 손진욱이나 정수연 같은 배우들은 다른 배우들과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
"너튜브 예능···?"
잠시 고민하던 윤미연 이사가 입을 열었다.
"스포츠물부터 자체 너튜브 채널까지, 둘 다 상상했던 것 밖의 영역이네요."
"일부러 그런 것만 찾은 건 아닙니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저는 따로 영화도 한 편 하고 싶은데요."
연우의 말에 윤미연 이사가 목소리를 높이고 정혁 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에?! 드라마에 예능에 영화까지 하신다구요?"
"아니, 류 배우님. 전생에 일만 하다가 죽으셨나."
정혁의 말을 듣고 연우가 뜨끔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그래도 일만 하다가 죽었냐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서운하지···.‘
연우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