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공놀이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유, 유토입니다! 호소야 유토(細谷 雄士)."
"그렇군요. 유토 상. 그럼 자연스럽게 여러 구도로 마음껏 찍어주세요. 보수는 확실하게 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유토를 뒤로하고 연우가 해변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예은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던 홍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응, 오늘 하루 고용한 포토그래퍼야. 사진 잘 찍더라고."
그러자 홍아윤이 입을 벌렸다.
"우와아. 포토그래퍼도 고용했어? 정말로 포상 휴가에 진심이었구나. 그런데 바깥에 관광도 못 나가고 어떡해. 속상하다 정말."
"···음?"
뭔가 조금 잘못된 것 같지만 대충 넘어갔다.
이예은과 함께 셀피를 찍던 삼각대에 연결된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홍아윤에게 말했다.
"사진 찍을 거면 포토그래퍼한테 손 흔들고 포즈 잡아. 알아서 열심히 잘 찍어줄 거야. 화보같이 잘 나올걸?"
"진짜? 알았어. 예은 언니!"
고개를 끄덕인 홍아윤이 이예은에게 뛰어갔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연우가 하품을 했다.
"흐아암. 아직 살짝 졸리긴 하네."
팔다리를 쭉쭉 펴면서 스트레칭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해안가 한편에서 스탭들이 네트를 쳐놓고 공놀이를 하는 게 보였다.
그때 카메라 감독 중 한 명이 다가와서 연우에게 물었다.
"비치발리볼 하는데 지금 인원이 홀수라 짝이 안 맞아서요. 혹시 같이 하실래요?"
물론 해변가에서 하니 그냥 비치발리볼이라고 부르는 거지 룰은 그냥 배구 룰일 것이다.
비치발리볼은 팀 게임인 배구와 다르게 두 명이 한 팀을 이뤄 펼치는 복식경기니까.
"흐음, 그럴까요? 저도 할게요."
배구든 K-비치발리볼이든 잠 깨는 데엔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니까.
***
"헤이!"
부르는 신호에 연우가 반응했다.
카메라 감독이 네트에 바짝 붙여 띄워놓은 공을 향해 힘껏 점프한 연우가 어깨를 크게 회전시키며 그대로 공을 향해 휘둘러 내리꽂았다.
쇄애액─.
텅─!
공중에서 스파이크를 때린 연우의 몸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의 손을 떠난 배구공이 해변경기장의 모서리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심판을 맡은 이용수가 소리쳤다.
"B팀 1점 추가! 23대 8!"
"아잇! 사기야. 이걸 어떻게 이겨."
상대편에서 들려오는 볼멘소리를 들으며 연우가 볼을 긁적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실수를 해서 점수를 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스! 좋았어!"
팀원들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꽤나 장신인 키에 요즘 「파라볼라」 때문에 농구연습을 하느라 점프력도 좋아졌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원래 배구를 해본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스파이커 포지션은 신체 능력만으로도 제법 할 만했다.
'오히려 서브나 토스가 어렵지 이런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그냥 무식하게 스파이크 때려 넣는 건 할만하니까.'
한편,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연신 셔터를 누르던 파파라치. 아니, 전담 포토그래퍼 유토는 신이 났다.
원래부터 배구는 일본에서 인기스포츠다.
관련한 소년만화도 많을 정도로.
유토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뛰어올라서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연우를 프레임에 담으면서 흥이 올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원래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양질의 피사체를 만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유토보다 더 뒤쪽.
어느새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메신저를 통해 소식을 듣고 빠르게 찾아온 몇몇 파파라치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일행 중에 이미 전담 사진사가 있는데?"
"뭐 하나 건지나 했더니. 제기랄."
파파라치의 사진은 희소성이 생명이다.
그들이 쫓아다니는 연예인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노출, 그게 아니면 화를 내는 모습이라든지.
대중이 알고 싶어 하는 스타의 이면을 담은 사진이 가장 비싸게 팔린다.
만약 그런 사진을 찍기 힘들다면 적어도 혼자서 독점으로 찍어서 팔아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일상 모습이라도 희소성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미 가까이에서 고화질로 촬영을 하는 전담 사진사가 함께 있다면?
멀리서 줌을 당겨 찍는 흐릿한 파파라치의 사진이 값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망할. 뭐 건질 것도 없고 시간 낭비네. 나는 돌아가야겠다."
한 남자가 발걸음을 돌리자 옆에 있던 다른 파파라치가 물었다.
"다카하시. 어디 가려고? 뭐 다른 정보라도 있어?"
"정보는 무슨. 오늘은 그냥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그때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네 시쯤 미나미 유코랑 남편이 휴가차 나하공항으로 입국한다던데?"
"에이 씨. 그걸 왜 말해."
"이야, 다카하시. 집에 가서 쉰다더니 몰래 혼자 공항 가서 찍으려고 했나 보지?"
파파라치들이 경쟁하며 우르르 떠났다.
어리바리한 포토그래퍼의 존재가 천연 방어막이 되고 있었다.
***
유토에게 받은 사진들은 딱히 수정할 것도 없었기에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업로드했다.
우즈는 연우의 개인 SNS와 우즈 카페를 통해 갑자기 쏟아진 사진의 홍수에 정신을 못차렸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멘트도 없이 그저 심플하게 사진만 틱 하고 업로드됐다.
그 양만 무려 40장 정도.
flower_word0 : 허억 갑자기요?!?!?!
happy_kry : 그냥 찍자마자 보정도 없이 바로 올린 거 같은뎈ㅋㅋㅋ 전부 무슨 화보냐규ㅠㅠ
eunbin_04 : 오빠 잘 지내.. 나 수능 만점 맞고 73일 뒤에 돌아올게 일단 사진은 다 저장했으니까 하루에 하나씩 꺼내 먹을게..!
angelawilling :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게 보입니다 몇 가지 변하지 않는 지구상에 From Canada
kim_1_hyuck : @Saantto32 야 이거 너 닮지 않았냐? 보자마자 넌 줄 알고 좋아요 누름ㅋ
└ Saantto32 : 아 미친놈인가 진짜 제발 댓글 지워라
└ kim_1_hyuck : 곧 테러당할 계정입니다.ㅋㅋㅋ
laffiee : 차수현이랑 홍유정이 평행세계에서 신혼여행 간 걸로 망상 중
└ peace0926 : 그건 안 돼
└ laffiee : 단호하시네요
한편 연우의 SNS에 올라온 사진 홍수로 가뭄을 벗어난 건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 뉴스의 기자들은 24시간 스타들의 개인 SNS를 살피다가 렉카처럼 끌고 가 기사화하는 게 일상인데 그중에서도 어리고 핫한데 SNS를 극도로 안 하는 류연우의 소식은 올라왔다 하면 곧바로 기사를 내야 하는 A급 계정이다.
- 류연우 해변서 '만찢남' 비주얼 과시
- 류연우X홍아윤 청량미甲 [화보]
- 등대가 없어도 남태평양을 밝히는 비주얼의 류연우
해변에서 놀고 온 뒤 씻고 잠시 침대에 누워서 서칭을 하던 연우가 땀을 삐질 흘렸다.
'내가 언제 비주얼을 과시했어.'
그리고 등대 대신 바다를 밝힌다니···.
심지어 화보가 아님에도 알아보지도 않고 당당하게 [화보]라고 붙여놨다.
팬들의 사랑도 좋고 연기를 하는 것도 무엇보다 행복하지만 이런 주접 멘트를 볼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연우가 스탭들과 저녁을 먹기 전 잠시 쉬는 사이 올라간 사진으로부터 파생된 커뮤니티 반응과 기사들로 인해 수혜를 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에이픽쳐스의 탁정아 전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포털사이트 검색어 트래픽량을 조회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났지?"
오늘 평소보다 특별히 프로모션을 추가로 진행한 게 없는데 영화 「달」의 검색량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유입 경로와 연관 검색 내용을 조회하면서 어디로부터 비롯된 유입인지 파악했다.
"···허, 대단하네."
그냥 사진을 업로드했을 뿐인데 배급사에서 제법 큰 비용을 지불하며 진행한 SNS 스폰서 프로모션의 유입 효과를 상회하고 있었다.
개봉 첫날부터 27만여 명을 동원하며 상당한 흥행력을 자랑했기에 탁정아도 꽤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미 개봉 일주일간의 관객 수인 초동성적만으로 영화 「달」은 손익분기점(BEP)인 150만 명을 돌파했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흥행한 로맨스 영화는 2012년도에 개봉해 700만 명을 넘긴 「숲의 늑대」인데, 그 뒤로 오랫동안 흥행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었지만 일단 「달」이 첫날 관객동원은 한참 앞서며 기록을 깼다.
"제발 레전드 한번 찍어보자···."
탁정아는 업로드된 사진으로 인한 검색어 트래픽 증가량 그래프를 보면서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별 미디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류연우'와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앞으로 개봉할 차기작들도 담당한다면 지금의 배급사 순위가 역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이튿날 대형 버스를 타고 외진 지역 위주로 관광을 하던 중 김민수가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민수가 연우에게 회사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을 이야기했다.
"배우님. 「파라볼라」팀 멤버들이 농구 훈련을 하는 모습을 찍는 그 메이킹 있지 않습니까."
"네. 나중에 편집해서 후속 예능으로 쓰겠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그 메이킹 팀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친선경기를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냈다고 해서 매칭을 잡으려고 한다는데 회사에서 배우님 의사를 물어보네요."
뜻밖의 이야기에 연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각자 다른 촬영을 하면서도 시간을 맞춰 꽤나 연습을 많이 진행했다.
물론 드라마를 촬영하는 데 실제로 농구경기를 뛸 수 있을 만한 실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풀샷으로 잡았을 때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만 능숙하게 드리블을 할 줄 알고, 오프더 볼 상황에서 전체적인 움직임을 연기적으로 소화할 정도로만 이해하면 되는 일이니까.
다만, 이 정도 서로 호흡을 맞췄고 농구를 배웠는데 그래도 시합이라도 해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향후에 이어질 예능에도 좋은 화면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친선 경기라···. 저는 상관없습니다. 혹시 팀도 물색해뒀다고 하나요?"
"네. 아이돌들이 주로 멤버를 이룬 연예계 친목 팀인가 봅니다."
"아하, 풋살이나 축구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농구팀도 있군요?"
"그러게요.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면 회사 측에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연우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모두 동의하자 메이킹 팀은 신이 나서 곧바로 매칭을 준비했다.
상대로 매칭된 팀은 연예계 친목 농구팀인 '패스트(Fast)'.
"와 그러면 류연우를 실제로 보겠네. 연예계 활동하면서 한 번도 못 봤다."
"나는 엊그제 심야로 이번에 개봉한 「달」 보고 왔어. 재밌더라고."
"형들. 그 드라마 팀에 손진욱 배우랑 진유한 배우도 있다던데요?"
패스트의 멤버들은 류연우와 진유한 같은 유명 배우들과 농구 친선전이 잡혔다고 하니 벌써 신이 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사이에 웃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류연우가 '제이나리'라는 이상한 컨셉으로 음악방송에 출연했을 땐 괜히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탈락한 「화이트 블러드」 오디션에 동하가 합격하고 대흥행을 했을 때는 그저 샘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넘볼 수 없는 월드 스타가 된 류연우가 꺼려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떤 사건'을 몸이 기억하는지 살짝 무서운 감정마저 들었다.
'아, 하기 싫은데···.'
친목 농구팀 패스트의 멤버인 엔보이즈 재윤은 왠지 모르게 사타구니 주변이 아려오는 것 같아서 괜히 팬티의 위치를 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