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시청률 대리전
서바이벌 동호회 닉네임 '해병필승'을 사용하고 있는 추한수는 오늘도 너튜브에 범람하는 류연우의 「서바이벌 아일랜드」 매드무비 영상에 악플을 달고 있었다.
지난주에 첫 방영을 한 뒤로 인터넷은 그야말로 들끓었다.
처음엔 자신이 즐기는 취미인 서바이벌 게임이 대중화되는 것 같아서 반가웠지만 영상에 나오는 7번 플레이어를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으으, 젠장. 또 한기가 드네. 왜 이러지? 창문에 붙였던 문풍지가 다 삭았나?"
너튜브에 재생되는 7번 플레이어. 즉, 류연우의 영상을 보니 왠지 모르게 몸에 한기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류연우를 보면 몇 년 전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고등학생들에게 휘파람으로 조리돌림 당하며 개망신을 당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젠장, 프리즈까지 당해서···."
그때 창고로 몰이를 당하다 결국 프리즈(Freeze)까지 당했는데, 예능 「서바이벌 아일랜드」의 규칙으로 따지면 서렌더(Surrender)에 해당하는 항복이었다.
그 뒤로 근 일 년을 넘게 고딩들한테 뒤를 잡혀서 항복까지 했다고 동호회에서도 놀림을 받았었다.
'이상하네. 왜 류연우 저놈만 보면 자꾸 그때가 떠오르지. 연기짱이니 관종왕이니 해괴한 닉네임을 쓰던 고삐리 새끼들···.'
눈살을 찌푸린 공익 출신 '해병필승' 추한수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해병필승(1초 전) : 저게 무슨 무쌍이냐 ㅈㄹ하네 첫킬은 시작하자마자 달려서 우연히 먹은 거고 두 번째 더블킬도 조빱처럼 나무에 짜져있다가 우연히 주워 먹은 건데 걍 킬딸충이지ㅋㅋ
"후우···."
비난을 잔뜩 배설하고 나니 그나마 자신을 자꾸 소름 돋게 만들던 정체 모를 위화감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아, 영상 좀 봤더니 한 게임 땡기네. 자리 있나 물어볼까?'
추한수가 서바이벌 게임장을 운영하는 동호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행님. 한수예요. 오늘 게임 한번 떙길까 하는데 혹시 남는 자리···."
- 아아, 자리 없다. 형 지금 좀 바쁘니까 끊을게. 한수야.
뚝─.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추한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 아재가 노망이 났나. 맨날 사람 모자란 거 뻔히 아는데 자리가 왜 없어? 그리고 파리만 날리는 게임장에서 손님 없을 땐 인터넷 맞고만 치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
***
한편, 스마트폰에 '띨빡'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추한수의 전화를 끊은 서바이벌 게임장 주인 하윤식은 입이 귀에 걸렸다.
"하핫, 손님들 이쪽으로 오시죠. 일단 장비에 대해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네에─."
매일 파리만 날리던 서바이벌 게임장이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자 손님들이라니···. 미쳤다.'
하윤식이 눈앞의 손님들을 바라봤다.
평소 서바이벌 게임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었을 것 같은 앳된 얼굴의 여대생들이었다.
지금까지 게임장을 몇 해 동안 운영하면서 여자 손님이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젊은 여대생들이 다섯 명이나 팀을 짜서 배워보고 싶다고 찾아온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더 대박인 건, 이런 손님들이 한 팀이 아니라는 거지.'
이번 주만 해도 예약된 손님들로 서바이벌 게임장의 스케줄표는 빽빽하게 들어찼다.
"오오, 류느님 아멘."
"네?"
"아, 아닙니다. 잠시 혼잣말이 튀어나왔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이게 게임하는 동안 착용하실 방호구입니다.
뜬금없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손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있는 장비들을 보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와아, 이거 류연우가 입은 그거랑 완전 비슷하게 생겼다. 대박."
"서현아 나 좀 이따 입은 거 사진 좀. 업로드하게."
"알았어. 기카 써?"
"아니 기본 카메라는 절대 안 돼. 어플로."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사진을 찍는 손님들을 보고 하윤식의 입이 귀에 걸렸다.
파리만 날리던 자신의 게임장에서 절대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
연우는 스마트폰으로 「서바이벌 아일랜드」에 대해 인터넷으로 정보를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첫방송이 제법 잘 뽑혔네."
초회분 시청률은 6.1퍼센트를 기록했다.
중장년층은 주로 공중파나 종편채널 위주로 시청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TV를 통해 집계하는 방식으론 TVM에서 서비스하는 「서바이벌 아일랜드」가 비교적 낮게 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케이블 예능치곤 굉장히 높은 시청률이었다.
'애초에 TVM 방송국의 컨텐츠를 소비하는 연령층이 거의 이삼십대니까.'
그 대신 컨텐츠 다시 보기 이용률이나 SNS 또는 너튜브에 도는 짧은 클립 영상의 개수는 압도적이다.
각 커뮤니티의 인기글, SNS를 통해 공유되는 클립 영상 등 수많은 인터넷 공간에선 「서바이벌 아일랜드」의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바이벌 아일랜드」에 출연한 이유는 드라마로 시청자층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연우가 인터넷으로 오늘의 편성표를 살펴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오늘 미리 맞붙는군.'
백솔의 자금세탁소로 추정되는 레이크 필름이 제작하는 SBC 드라마 「데이토나」.
드라마 첫 방송이 맞붙는 건 두 달 뒤가 되겠지만, 오늘 미리 대리전을 벌인다.
'주연 배우들이 총출동한다라···.'
오늘 「데이토나」의 주연 배우들이 SBC의 간판 예능 「쇼타임」에 출연하는데 공교롭게도 「서바이벌 아일랜드」와 같은 시간대다.
'내가 서바이벌에 나간다는 기사가 뜬 이후에 저쪽에서 쇼타임을 촬영했으니까 우연은 아니겠지.'
상대편에서도 어차피 예능 출연으로 홍보 활동을 할 생각이라면, 이왕 출연하는 김에 이쪽 예능의 싹을 뽑아놓는 게 좋다고 판단했으리라.
"흐음, 이런 정면승부는 언제나 환영이지. 오늘은 아마 첫째 날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는 부분까진 나오겠지."
저쪽 출연진들이 예능에 출연해서 어떤 활약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이미 촬영한 「서바이벌 아일랜드」의 내용을 아는 연우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우승의 서사를 하나하나 만들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심혈을 기울여 연출을 한 게 괜한 노력은 아닐 테니까.
오늘 방송도 몇몇 사람들이 대회의실에 모여서 본다기에 연우도 김민수 매니저와 함께 사옥을 찾았다.
연우가 대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모여 있는 직원들과 배우들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몇몇인 수준이 아니라 모인 이들이 첫 방송 날과 엇비슷할 정도로 제법 많았다.
"으음, 다들 스케줄 없어요? 친구들이랑 약속이라거나···."
"없어요. 저번 주에 첫방송 나간 뒤로 요즘 이거 보는 게 삶의 낙이거든요."
"이게 스케줄이지."
연우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진욱이 대답하곤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첫방송이 방영될 때는 모여서 다 같이 보는 게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지만, 오늘은 두 번째 방영분인데 제법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이사님 스포 좀 해주시면 안 돼요?"
한 직원의 물음에 윤미연 이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김민수와 연우를 가리켰다.
"저 두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나도 내용 하나도 모르는걸요?"
그러자 방에 있는 직원들이 연우를 잠시 바라봤다가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이 김민수 매니저에게 옮겨갔다.
하지만, 김민수도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에 지퍼를 잠그듯 닫아버리곤 입을 꽉 다물었다.
"에휴, 목마른 시청자는 그저 매주 기다리며 보는 수밖에···."
그때 2회차 방송이 시작됐다.
***
- 에이, 선생님. 이 거리에서 쏘면 아무리 플라스틱 탄이라고 해도 많이 아플 텐데요? 서렌더 인정하시죠.
연우가 29번 플레이어를 미행해 서렌더 킬(Surrender kill)로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이 나왔다.
편집된 장면은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뒤따르는 연우와 앞서가는 플레이어를 실시간으로 교차하며 보여줘 액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었다.
- 개쫄깃쫄깃하네ㅋㅋㅋㅋㅋ
- 아니 저거 어케 했냐 29번은 ㅂㅅ인가? 바로 뒤에 따라오는데 왜 몰?루
- ㄹㅇㅇ광탈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계속 선전하네
- 게시판에 류연우 킬은 어쩌다가 어부지리로 한 거라고 계속 글싸던 해병뭐시긴가 있는데 어디로 버로우탔음?
- 근데 민준경이랑 강학준은 뭐함? 우승 후보라고 엄청 떠들었는데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주로 경기 내용에 집중하거나 '빠' 또는 '까'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는 양상으로 흘러갔고, 팬카페나 일반 커뮤니티는 연우가 활약하는 장면들을 따로 클립으로 따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 저 부분에서 목에 권총 가져다 댈 때 개치인다 그냥 트럭으로 치인다 ㅠㅠㅜ
- 혹시 인천 사는 횐님들 중에 서바이벌 게임 취미로 같이 하실 분 있으신가여?!?! 현재 3/5
- 어떻게 이렇게 갓벽하지?
그런 반응은 대회의실에 모여서 시청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연우가 바로 옆에 있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진짜 대박이네. 배우님 혹시 전생에 특수요원이셨어요?"
"···와, 미쳤다. 근데 뒤에서 저렇게 따라가는데 왜 모르는 거예요?"
실시간으로 연우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화면 속의 당사자가 옆에서 함께 시청하고 있으니 고개만 돌리면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이 늦은 시각에 월드컵도 아닌데 굳이 사옥에 모여서 관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음, 방금 위험한 질문이 하나 들어온 것 같은데···.'
물론 전생을 묻는 게 실제로 의문이 들어서 한 질문은 아니었겠지만, 연우가 애써 무시하며 다른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저 플레이어분이 잔뜩 긴장해서 뒤따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쓰고 있으니까 소리가 좀 안 들리긴 하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헬멧 쓰고 있지."
사실 헬멧을 쓴다고 해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고요한 숲속에 인기척이 안 들릴 리는 없다.
하지만, 연우의 설명에 직원들도 어느 정도 수긍한 듯싶었다.
그때 손진욱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녀석이랑 벌써 수년째 지내고 있잖아? 원래 종특이야."
"···종특이요?"
"종족 특성. 게임용어잖아."
연우도 그 정도는 안다.
요즘 신조어(?)를 제법 공부했으니까.
"어떤 부분이 종특이라는 거예요?"
"몰랐냐? 너 원래 발소리나 인기척이 안 들려. 촬영장에서도 뒤에서 불쑥 나타나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으음···."
아무래도 몸에 밴 습관 때문에 평소에도 인기척을 줄인 채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좀 신경 써서 고쳐야겠네.'
연우가 조용히 홍보담당인 공민정이 있는 근처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민정 선배님. 지금 「쇼타임」이랑 「서바이벌 아일랜드」 분당 시청률 조회 가능해요?"
"네, 가능해요. 안 그래도 지금 체크해보려 했는데 내일 오전에 나오는 시청률하고 좀 차이가 있긴 해도 IPTV로 시청하는 표본가구의 시청률은 알 수 있어요."
공민정이 노트북으로 무언가 조회를 하더니 기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우리가 9.6퍼센트고 SBC 「쇼타임」이 8.1퍼센트예요!"
공민정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첫 방송의 시청률보다 무려 3.5퍼센트 포인트나 상승했다.
드라마의 시청률 대리전은 확실히 선봉장의 목을 꺾은 셈이다.
하지만 이쪽에서 준비한 패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서바이벌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파라볼라」를 촬영하며 찍었던 너튜브 자체 농구 예능도 준비되어 있었다.
'모조리 탈탈 털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