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또 섬으로
졸지에 납치되어 차에 올라타게 된 안준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순간적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한 건지 머리로 이해하질 못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미니버스의 안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어, 하이 헬로우."
손진욱이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안준호를 맞이했다.
"···예?"
바보같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안준호를 보고 가까스로 참아오던 한소현의 웃음이 터졌다.
"푸핫."
"준호 형. 전역 축하해요. 음, 서프라이즈···?"
그제서야 전체적인 상황에 눈에 들어온 안준호가 미니버스의 좌석 위로 스르륵 녹아내렸다.
"으아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러자 좌석에 앉아 있던 주현석 PD가 일어났다.
"자, 안준호 씨?"
"예, 옙?"
안준호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방금 전에 겪었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떠올랐는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곤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에엑? 주, 주현석 PD님 아니십니까?"
"뒤에 류연우, 손진욱, 한소현 배우가 있는데 저를 보고 놀라시는 건가요?"
물론 두 사람은 초면이었지만, 주현석이 워낙 스타 PD이다 보니 안준호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 저 세 사람은 워낙 자주 보던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안준호의 말을 들은 손진욱이 피식 웃었다.
"이거 왜 이래. 우리도 나름 잘 나가는데. 그냥 동네 아는 형 취급이구만?"
손진욱이 그러거나 말거나 안준호는 주위를 둘러보다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차량 안에서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무엇인가에 대한 결정권자가 있다면 분명 그건 류연우였다.
"연우야 뭘 꾸민 거야. 이게 대체 다 뭐야."
"에이, 꾸미긴요. 졸지에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된 준호 형을 구원하기 위해 일자리를 손수 만들어서 찾아온 거죠. 여름의 식탁 시즌2입니다."
그러자 안준호가 연우와 주현석 PD를 번갈아 쳐다봤다.
"여름의 식탁···? JNBC?"
"음, 글쎄요. 시즌1이 그쪽 기획이니까 우선적으로 제안을 해보긴 하겠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송사에서 방영해도 되구요."
그러자 손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새별에 자체 제작능력이 있고 이미 호흡을 맞춰본 최고의 예능PD님도 있으니까 일단 찍는 거지."
그런 손진욱의 말에 주현석 PD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어느 방송사든 절대로 거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당첨된 로또 용지인데 누가 그걸로 코를 풀겠어요."
그제서야 안준호는 미니버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실 웃고 있는 주현석 PD를 바라본 안준호가 물었다.
"그럼 이게 다 이미 예능 촬영을 하고 있는···."
"당연하죠."
"그럼 방금 이 앞에서 제가 바보같이 납치된 것도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하이라이트인데요?"
그러자 안준호가 다시 좌석 위로 녹아내렸다.
"으아아, 혹시 제가 아까 욕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글쎄요. 뭔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뭐 그것도 재미죠."
"어억,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
안준호가 촬영에 조금이나마 적응이 될 때쯤 연우가 주 PD를 향해 물었다.
"PD님 그러면 우린 이제 어디로 가나요?"
"응? 연우 너도 몰라?"
아직도 군복을 입고 있는 안준호가 묻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죠. 그냥 주 PD님께 일임했어요. 저도 평범한 출연자예요."
그러자 주현석 PD가 답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출발해 군산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주 PD의 말에 연우의 뇌리를 스치는 곳이 있었다.
"설마 개야도에 가나요?"
"정답."
그러자 한소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개야도가 어딘데?"
"어디긴요. 우리가 문어 카르파치오 만들어 먹었던 곳이죠."
"아? 개야도가 거기야? 우리 「여름의 식탁」 찍었던 곳?!"
한소현의 질문에 대답한 건 주현석 PD였다.
"맞습니다. 여러분을 데리고 어디로 가면 좋을지 작가진과 회의를 해봤는데, 여러분이 「여름의 식탁」을 촬영한 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났더군요?"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4년이죠."
손진욱의 답을 들으며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4년인가. 하긴, 그땐 중학생이었던 소현이가 벌써 수능을 봤으니까.'
물론 옆에 있는 소현이 말고 동생 이야기다.
그때 옆에 있는 소현이가 손뼉을 쳤다.
"너무 재밌겠다! 그때 우리가 정글 같은 마당 다 치우고 깔끔하게 페인트칠까지 했던 그 집 그대로 있을까?"
한소현의 말에 주현석 PD가 미소 지었다.
제작진이 JNBC 측에 미리 촬영을 위한 이용 허가를 받고 사전 답사를 통해 확인해봤기에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글쎄요. 과연 그대로 있을까요? 가서 한번 직접 확인해보시죠."
안준호까지 태워서 완전체가 된 미니버스는 군산항으로 향했다.
오전 일찍 나왔는데 안준호를 납치하고 군산으로 향하니 도착했을 때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하늘이 점차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항구로 향한 멤버들은 배로 옮겨타고 또 한참을 걸려 개야도에 도착했다.
"음, 그러고 보니 요즘 섬에 자주 들어가네."
연우의 말을 들은 손진욱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여긴 총 쏠 일은 없을 거다."
"맞아. 연우 너 활약하는 거 군대에서 봤어. 아주 어마어마했더만?"
"뭐, 운이 좋았죠."
연우의 말에 손진욱이 질색했다.
"야, 준호야 저 멘트 알지. 꼭 전교 1등하고 한국대가는 놈들이 공부 비법 물어보면···. 아?"
생각해보니 저놈이 그놈이다.
전교 1등하고 한국대 가는 놈.
"뭐야. 이거 종특이야?"
"그러게요? 저도 나중에 뭐 좋은 일 생기면 연우 따라 해야겠습니다. 훗, 운이 좋았죠."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따라 하는 안준호를 보면서 연우가 피식 웃었다.
내가 또 언제 저렇게 재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는가.
아무튼 서로 만난 지 오래되기도 했고, 지금보다 다들 어릴 때, 그리고 경력이 쌓이기 전에 아주 좋은 촬영 분위기에서 만난 사이라 그런지 함께 있는 게 그저 편한 느낌이었다.
"야야, 내리자. 진짜 궁금하다. 그때 그 집 아무도 관리 안 했을 거 아냐. 거기 사시던 노부부는 서울로 이사 가셨다고 했었지."
"그 당시에 방송국이 매입했다고 했으니까 혹시 촬영 장소로 관광지화해서 관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려나?"
"아닌 것 같아. 내가 방금 SNS로 찾아봤는데 그런 건 안 뜨더라구."
배에서 우르르 내린 출연진들이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소현 누나는 멀미 안 해요? 그때는 하늘이 빙빙 돈다고 했잖아요."
"어? 그러네? 오늘은 수다 떨면서 와서 그런지 멀미 하나도 안 했어!"
그런 배우들에게 스탭이 손짓했다.
"여기 타세요. 차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완전 그때 생각난다. 뭔가 설레."
"그러네요. 그때도 이렇게 옛날 승합차 타고 꾸불꾸불한 길을 올라갔었죠."
마치 3년 전 그때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네 배우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카메라에 담기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주현석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때도 각각 나름 유명한 배우였겠지만, 지금은 그 급이 달랐다.
신인 배우에서 월드 스타가 된 류연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그의 커리어와 국제적인 성공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면 다큐멘터리 특집을 편성해야 하니까.
손진욱과 한소현은 그때도 이미 톱스타였지만, 그 뒤로 촬영한 작품들 또한 잘됐다.
그 당시에는 잘 나가는 차세대 배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국민배우 반열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활동이 없던 안준호도 대중의 관심은 확실했다.
불미스러운 사건의 진실은 억울하게 당한 일종의 셋업범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안준호를 향한 동정여론은 꽤나 화제가 될 만큼 컸었고, 종종 안준호는 언제 군대를 전역하냐는 기대 섞인 질문을 하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인터넷에는 왜 안준호만 군대에 3년은 갔다 오는 것 같냐는 밈이 돌았을 정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현석이 다시 류연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송가에 있는 이들이라면 새별이라는 기업이 사실상 류연우의 손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이 배우들이 전부 새별 소속이라는 거지···.'
그래서 방송국과 접촉도 안 한 상태로 미리 예능을 찍어대도 문제가 없었다.
사실 이 대어를 거절할 방송국도 없겠거니와 만약 거절한다 하더라도 새별이 보유하고 있는 너튜브 채널인 새별튜브는 어느새 구독자가 500만을 돌파하고, 최근에는 600만 고지를 넘보고 있었기에 자체 방송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뿐만인가.
'진유한, 정철민, 한별, 정수연, 서지은, 그리고 최근에 발굴한 신인 홍아윤까지···.'
20대 초반에 불과한 류연우가 일궈낸 새별이라는 제국에는 이미 한 명 한 명이 이적시장에 나온다면 FA 대어로 불릴만한 스타들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유망주들이 수두룩했다.
하나하나 떠올려보던 주현석 PD가 그 규모에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몇 년간은 연예계의 흐름을 새별이 꽉 쥘 것 같은데.'
주현석 PD 본인만 하더라도 연락이 오자마자 이것저것 재거나 따져보지도 않고 냅다 수락을 한 뒤 이렇게 촬영을 하러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간 승합차가 어느 폐가 앞에서 멈춰 섰다.
"여깁니다. 내리세요."
"아···."
차에서 내리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네 배우 모두 눈을 의심했다.
"이건 옛날에 왔을 때보다 더 심하잖아···?"
"진짜로 그때 그 집이 여기라고?"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그때는 노부부가 서울에 있는 자녀들의 집으로 떠난 지 6개월 지났을 무렵이었고, 지금은 그 뒤로도 3년, 아니 이제 곧 4년이 될 정도로 방치됐으니까.
"아이, 방송국 놈들. 관리를 하나도 안 했어?"
잔뜩 녹슨 대문과 그 안으로 펼쳐진 밀림 같은 넝쿨 나무.
아니, 그때는 그 정도로 묘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곳은 귀신이 나와야만 하는 비주얼이었다.
만약 귀신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 탓에 귀신들조차 매입 의사를 철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을씨년스럽고 괴기하다는 단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다들 그 모습에 얼어붙은 사이 연우가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겨서 녹슨 대문을 열었다.
'에이, 담장도 있고 지붕도 있는 게 어디야. 2차 예멘 내전 당시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공동묘지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갔던 것과 비교하면 5성급 호텔이지.'
거리낌 없이 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며 연우가 뒤를 바라봤다.
"다들 뭐 해요? 얼른 들어가죠.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요. 스위트 홈에 돌아왔잖아요."
그 모습을 본 다른 세 배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왔다. 류 대장···."
"어느새 잊고 있었어."
그때 안쪽에서 다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병장. 노닥거릴 시간이 있습니까?"
그러자 반사적으로 반응한 안준호가 발걸음을 뗐다.
분명 안에 있는 건 미필 류연우인데 방금은 악마 교관에게 부름을 받은 것 같았다.
"예, 옙! 지금 바로 움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