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자인데요, 망돌 좀 내려주세요-53화 (53/118)

#53화

“메인 PD님이 적.극. 반영하신다고 한마디 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사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잠깐 긴장감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에 짓눌려 잊고 있었을 뿐.

방송에서는 어떻게든 서해든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각을 잘 재야만 했다.

편집점까지 완벽하게 생각해서.

“……맞습니다. 이 프로그램 합류 전에 멤버 해든이랑 잠깐 연락이 끊겼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어떻게 연락이 끊겼는지, 왜 그랬는지. 잠깐은 얼마나 되는 기간인지?”

취조냐? 어차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거면서.

확 쓴 이야기만 해 버릴라(대충 노잼 둘러대기만 반복한다는 뜻)…….

그렇지만 그러면 나는 돈 못 벌어서 열등감에 미쳐 버린 놈으로 나오고 장렬히 살해당하겠지.

“……사실, 저희 팀은.”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위캐니즈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많습니다. 물론 멤버들과 제 목표는 늘 일치했죠. 위캐니즈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여 더 많은 팬분들에게 사랑받자.”

“네에.”

“그런데 최근에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해든이랑 오래 갈등을 빚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해체나 탈퇴를 원하는 멤버가 있었다는 뜻인가요?”

‘네, 전부 다요, 씨발…….’

……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원하는 멤버는 없었으나(아니다, 다 튀었다), 필요하다면 어떤 방향성의 전환에 있어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뭐 이런 의견이 나오긴 했습니다.”

“필요하다면이라……. 어떤 경우에 필요한 거죠? 팬들이 있잖아요, 어쨌든.”

내가 지금 작가랑 배틀 로열을 찍고 있는 건가?

그런데 물어뜯는 폼이 기자일 때의 나와 전혀 다를 게 없어서 현타가 진하게 왔다.

“팬분들께서 더욱 좋아하실 방향이 뭘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입니다. 저희는 절대 팬분들을 배제하지 않아요.”

“팬들이 해체를 원했다는 건가요?”

“해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작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작가를 쳐다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내가 한없이 져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김 PD를 반 협박하긴 했지만, 제가 어쩔 거야?

막말로 협박당해서 위캐니즈 출연시켰다고 털 수도 없고 말이다.

각자 핸디캡이 있다, 이거다.

“……해체는 안 합니다.”

“그럼 해든 씨가 탈퇴를 원했다는 건가요?”

“해든 씨는 아시다시피 댄서입니다. 춤을 잘 만들고 잘 추죠. 그걸 더욱 살리고자 기회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응원해 줬어요.”

“그래서 해든 씨가 연락이 두절됐고, <댄오프>에 나갔던 거군요.”

“서로 싸웠던 건 아니고, 바빴던 거죠. 각자. 하하!”

나는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이는 오버스러운 모션을 취했다.

솜털이 바싹 일어설 정도의 긴장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미친, 김정균보다, 김 PD보다 악랄한 사람이 있었다니.

머릿속이 까마귀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작가는 예의 그 ‘흠~’ 찝찝한 추임새를 넣으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해든 씨가 솔로 욕심이 있었군요.”

“기량을 살리고 싶은 건 아이돌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PR이 중요한 직업이니까요. 그리고 해든이라면 더 많은 사람에게 그 대단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저희 모든 멤버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와, 서해든 이 인터뷰 보면 우는 거 아냐?

감동 작렬인데?

대답을 무난하게 잘한 것 같다.

“음…… 해든 씨는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일단 알겠어요.”

“네?”

“리더 인터뷰 끝났습니다. 유영 씨는 한 번 더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뭐 때가 되면 호출할게요. 나가시면 됩니다.”

“아, 네, 네…….”

서해든이 뭘 모른다고?

안 좋은 예감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내쫓기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어느덧 15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제복이 조금 키치하긴 한데…….”

“난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진짜 국방색 옷을 입으면 칙칙해서 안 돼. 욕먹어.”

하람과 백겸의 대화였다.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이레에게 내 스케치를 넘겨줬다.

이레는 아주 빠르게 바깥의 코디에게 그걸 전해 준 모양이다.

그리고 코디에게 답을 받았다.

당장의 커스텀 핏을 보여 줄 수도 없고.

시간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에 새롭게 옷을 제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있는 의상들을 매입해 빠르게 리폼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입 예정인 의상을 몇 개 골라 제작진 편으로 사진을 보내 줬고, 이레가 그걸 전달해 온 것이다.

옷은 꽤 차분한 톤이었다.

네이비와 블랙, 화이트가 어우러졌다.

각자 색상만 놓고 보면 화려하지 않지만, 적절히 섞여 나름 아이돌 무대 의상 같았다.

특이한 건, 재킷을 아예 생략하자는 코디의 의견이었다.

재킷은 너무 차려입은 느낌이라 곡의 무드와 방향성을 고려했을 때 없는 게 더 낫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조끼와 셔츠, 셔츠 단벌, 셔츠에 넥타이 등등으로 상의가 굉장히 심플해졌다.

이런저런 악세사리를 추가해 포인트를 추가한다는 계획이었다.

뭐 전문가 의견이 당연히 맞겠거니…….

나는 빠르게 수긍했다.

나와는 다르게 하람은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다.

완전히 한국 군복과는 벗어난 톤과 무드에 약간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나 참, 누가 밀리터리 덕후인지.

“군복은 좀 조심해야 해. 아이돌이 입었다고 한국 국방부에서 소송 걸면 어떡해.”

“……국방부가 그렇게 쪼잔하진 않을걸?”

그렇지만 태오의 이상한 말에는 나도 입을 열고 첨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요원, 느낌 나지 않아요? 군인보다는.”

“오오, 그렇다.”

산호의 말엔 모두가 동의했다.

얄쌍하고 단정하게 빠진 핏이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소총 소품이랑 어울릴까?”

하람이 걱정했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약간 옷이 그거 같아. 요원들 권총 사격 연습할 때 입는…… 드라마에 나오는, 뭔지 알지.”

“어어, 맞다. 그렇네요.”

나와 백겸의 말에 하람은 조금 나아진 기색이었다.

흠, 그래도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모두가 마음에 드는 방향이라면 좋을 텐데.

“소총 소품을 잘 다뤄서 안무를 짜 보면 충분히 네가 원하는 느낌이 날 거야.”

“그럴까~.”

“그렇지…… 뭐 우리가 여기서 ARMY 방탄복을 입을 순 없잖아.”

“응…… 응?”

“어라?”

방탄복?

내가 말해 놓고도 이거…….

“……방탄조끼?”

내가 조심스레 중얼거리자.

“시력 보호 고글?”

하람의 핑퐁이 날아왔다.

어라.

그냥 내뱉은 거 치곤 상당히 괜찮은데?

“……서해든. 느낌 어때?”

“대강 오케이.”

됐다.

서해든에게서 저 정도 반응은 ‘지금 삘이 왔다 나만 믿어라’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편곡실은 댄스 연습실과는 달리 24시간 원할 때 사용이 가능했다.

아직 연습실 사용 시간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편곡실로 갔다.

편곡은 하람과 백겸, 해든이 주가 되어 진행했다.

나머지 애들은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는 역할이었다.

산호, 이레, 태오, 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해든, 하람, 백겸이 신디와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람이 제시하면 백겸이 피드백을 주고, 해든이 옆에 앉아 무대 스케치를 했다.

나는 이 모든 걸 바라보며 파트에 대해 고민했다.

곡에는 랩이 너무 많았다.

아이돌 앨범의 랩 트랙은 높은 확률로 중2병에, 노잼에, 실력도 개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웬만해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곡도 그런 경우였다.

낯뜨거운 가사와 단조로운 비트를 어떻게든 살려 내야 했다.

뽕짝을 가미하든 디스코를 가미하든.

“곡 비트 자체는 살려도 좋을 것 같은데, 아예 하우스 댄스로 넘어가 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멜로디를 거의 새로 만들어야 할걸.”

하람의 야심찬 제안에 백겸은 조금 우려를 드러냈다.

“만들면 되지. 탑 라인은 뭐든 중얼거리면 일곱 명 중에 한 명 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형, 멜로디라는 게 그렇게 하나 얻어걸리라는 식으로 짜는 건 아니거든.”

“야, 나도 그건 알아.”

“아는 사람이 왜 그렇게 단순하게 말한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는데.”

“……잔소리 그만 좀 해.”

“잔소리 아닌데…… 걍 말한 건데.”

하람과 백겸의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하람의 표정에 순간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앉았다.

“그만들 싸워. 싸울 시간이 어딨냐.”

“안 싸웠어!”

두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 꽥 소리질렀다.

음, 양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다.

“멜로디가 짜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다 할 논리적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의 머리를 빌리는 게 맞지.”

“그렇긴 하지만…… 한 시간 만에 어떻게 그걸 뽑아내요. 나는 몇 달이 걸린 적도 있었는데.”

백겸이 툴툴거렸다.

내가 하람의 편을 드는 걸 눈치 깐 거다.

“멜로디를 아예 바꾸는 게 아니라, 코드만 좀 바꾸면 되잖아. 백겸이 너 그 정돈 맨날 하는 게임 같은 거잖아?”

“……저 말고 하람이 형한테 얘기해요.”

삐졌군, 저 속 좁은 자식.

“그럼 하람이가 코드 잡으면 백겸이가 검토해 봐.”

“하람이 형한테 한마디 하면 또 잔소리 취급받을 텐데?”

“애냐? 한 번만 더 그러면 너 이번 방송 끝날 때까지 내가 잔소리한다.”

“아, 알겠어요.”

백겸은 사실 하람보다 100배는 더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잔소리를 싫어하는 놈이었다.

내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사실 저번에 <토털> 연습할 때 기강이 잡혀서 더욱 맥을 못 추는 것도 있을 것이다.

길들여 놓으니 좋군.

백겸처럼 속 빈 강정 같은 애들이 다루기가 편하다.

“오, 어때요? C랑 D마이너. 이거 되게 쉬운 코드인데 듣기가 괜찮네.”

하람이 이렇게 저렇게 코드를 잡다가, 한 코드를 반복해서 치며 우리에게 물었다.

“원래 쉬운 게 듣기도 편하지.”

백겸이 또 괜한 지랄을 부린다.

“……이거 괜찮은데?”

나는 가뿐히 백겸을 무시하고 하람에게 대꾸했다.

코드는 아주 듣기 쉬운 느낌이었다.

뽕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난해하지도 않은.

정석적인 후렴구의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음…… 이대로 템포 빠르게 해서 재생해 보자.”

이 얼마 만의 긍정적인 시그널이냐.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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