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자인데요, 망돌 좀 내려주세요-91화 (91/118)

#91화

시간이 오후에 접어들며, 팀별 회의 시간이 됐다.

나는 멤버들에게 혼란스러움을 티 낼 순 없으니, 우선 무대부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는 아마…… 리패키지 무대 2번 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지?”

“네. 저 솔직히 안무 기억 안 나요. 자진 납세하겠슴당.”

백겸이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 꿀밤을 먹여 줬다.

근데 겸아, 애초에 나는 이 안무가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는단다.

“곡 비트가 좀 처지네요.”

하람이 솔직하게 평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가 조금 느려서 댄스인지, 발라드인지 애매한 느낌이었다.

경연에선 최악의 곡이다.

“백겸, 가능하겠어?”

“리모델링은 제 전문입죠.”

백겸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매일 빈둥대고 시비나 걸어도 할 때는 하는 놈이다, 역시.

“<토털>은 나름 서정적인 분위기였고, <리로드>는 굉장히 콘셉추얼했으니까…….”

“해든이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 이 곡 안무 자체가 좀 손봐야 할 게 있을 것 같은데.”

해든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모두가 센터 급이 되어야 해.”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멤버들의 시선이 한 번에 느껴졌다.

“다른 그룹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그룹은…… 솔직히 멤버 간 순위 편차가 크다고 생각해. 우승 팀 조건 생각나지? 그룹 멤버 간 20등 이상 차이 나면 안 되는 거.”

“형…… 우리 우승 노려요!? 읍, 읍, 야!! 윤산호, 왜 입을 막아.”

“미안, 유영이 형이 막으라는 눈빛이었어.”

“아무래도 그렇지.”

윤산호, 나이스 커팅.

백겸이 빽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백겸의 입을 제 손으로 꽉 틀어막았다.

“아니었어?”

나는 멤버들 한 명 한 명을 돌아보며, 힘주어 물어봤다.

의욕 없는 놈은 나를 살인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이고 처참히 응징해 주마.

“당연히, 나왔으니까 댐벼 봐야지.”

“태오야……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태오는 나만큼 눈에 불꽃을 튀기며 다소 적나라한 말씨로 의지를 다졌다.

“아뇨, 당연히 동감이죠.”

“저도요.”

“나두.”

멤버들이 제각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딴지 거는 놈은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서해든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표정 없이 차갑게 쳐다보는 그 눈빛이 뭔가 불쾌해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할 말 있냐?”

“없는데.”

뭐야?

그러나 단답은 이제 익숙하다. 자연스럽게 무시하자.

“여하튼, 그러려면 모두의 순위 상승이 제일 중요해. 솔직히 말해서 상위권 멤버들이 그렇지 않은 멤버를 캐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너네도 캐리당하는 건 싫지?”

나는 하위권 순위를 가진 백겸, 하람, 태오를 보며 물었다.

“존나 자존심 상하지.”

“야야, 방송이다. 태오야.”

“아, 죄송. 겁나 자존심 상하지.”

“얘 욕부터 가르친 애가 누구야?”

“형이 가르쳐 달라고 먼저 그랬어요.”

아, 정신없어.

나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물론 잘하는 한 명이 리드하면 결과적으로는 우수한 무대가 나올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다른 멤버들의 순위는 그대로일 거야. 그러면 우리는 결정적으로 우승을 하지 못해. 이걸 잘 감안해서 안무를 바꿔 보자. 나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 볼게.”

이 정도까지 말한 나는, 나도 모르게 서해든 눈치를 봤다.

현재 그룹 내에서 독보적으로 1등인 서해든에겐 꽤 가당치 않은 조건일 수 있었다.

이호도 나의 이런 제안에 몹시 불편해했었다.

“그렇게 하자.”

이게 웬일? 서해든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포인트 안무를 생각해 오기로 한 후, 우리는 잠깐 휴식 타임을 가졌다.

나는 위캐니즈의 이전 무대를 여러 개 반복적으로 돌려 보는 중이었다.

멤버들이 무대에서 어떤 색으로 빛이 나는지 먼저 파악해야, 각자에게 맞는 색을 정할 수 있으니까.

하람은 박자가 살짝 느려지는 구간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폼이 좋았다.

군인 집안 아니랄까 봐 자세를 유지하고 각도를 살려 멋있는 폼을 잡을 줄 알았다.

오프닝이나 엔딩에 센터로 잡아 두면 멋있게 중심을 잡아줄 것 같았다.

산호는 일단 와꾸부터 먹고 들어가 주기 때문에 웬만한 클로즈업 샷은 다 시선을 사로잡는 편이었다.

그가 와꾸에 비해 순위가 낮은 이유는 오로지 노출도가 적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전 무대보다 더욱 많이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태오는 우선 키가 컸다. 팔다리도 길고 손발도 컸다.

박자감도 좋았지만 키가 큰 탓에 센터로 잘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외국인이니 가사를 소화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춤을 남들과는 좀 다르게 보일 정도로 우아하게 췄다.

다음은 백겸.

키가 크지도 춤 선이 독보적이지도 않았지만, 백겸은 나름 순간 몰입력이 뛰어났다.

무대에서 표정 연기나 가사 소화력이 뛰어나 작은 파트를 줘도 나름 임팩트 있게 잘하는 편이었다.

채이레도 윤산호 못지않게 화려하게 생겼지만.

역시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뛰어난 스탯이 없어 서해든에게 자주 가려지는 편이었다.

채이레와 윤산호를 함께 얼굴로 내건다면 꽤 화려한 무대를 꾸밀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우, 진짜 열심히 보네.”

곰곰이 생각에 빠진 내 옆에 누군가 앉았다.

채이레였다.

“안무는 좀 생각해 봤어?”

“네, 뭐. 제가 해든이 형만큼 춤을 잘 추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키는 걸 못 해내는 편은 아니거든요, 헤헤.”

“그 생각이 너를 막는 거야.”

“무슨 생각이요?”

“‘해든이 형만큼 춤을 잘 추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생각.”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넌 너야. 서해든은 서해든이고.”

“아하.”

채이레는 산뜻하게 대답하며 제 오른쪽 손바닥에 왼 주먹을 탁, 때렸다.

“형형, 그런데요.”

“어.”

“해든이 형이랑 언제 그렇게 다시 친해진 거예요?”

“그야…… 잠깐, 뭐라고?”

나는 패드에서 눈을 떼고 채이레를 쳐다봤다.

“해든이 형이랑 언제 그렇게 다시 친해진 거냐고요.”

“방금 네 말 중에 이해가 되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

“그치만 해든이 형 엄청 신나 하던데요?”

“걔가? 어디서?”

“방금 형이랑 이야기할 때요!”

“……이레 너 독심술도 하냐?”

“아, 뭔 소리야 진짜.”

채이레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해든이 형 아까 형이랑 이야기할 때 진짜 신나 보였다고요. 거의 싱글벙글이었어요. 해든이 형이 연습하거나 팀 회의할 때 그렇게 신나 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난 전혀 모르겠던데.”

“형이 모르면 어떡해요. 해든이 형이랑 연습생 생활도 제일 오래 했으면서.”

“그랬, 그랬구나.”

내가 말을 더듬자, 채이레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저 눈, 위험하다.

“형, 혹시 아직도 기억이…….”

“아니, 아니, 이제 기억나지. 기억나고말고.”

“저한텐 숨기지 않아도 돼요.”

거짓말은 수없이 해 왔건만 왜 얘 앞에선 항상 이렇게 당황하게 되는 거지?

공책 살 돈으로 피카츄 돈가스 사 먹고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초딩이 된 기분이다.

“여하튼, 해든이 형이랑 화해해서 다행이에요. 둘이 그만 좀 싸워요. 동생들 눈치 보잖아요.”

“알겠어, 미안하다고.”

채이레는 그 뒤로 몇 마디 더 종알거리다가, 내가 패드에만 집중하자 휑하니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나 버렸다.

……서해든이 기분이 좋다고?

이게 무슨 소름 돋는 이야기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패드에 코를 처박았다.

* * *

모든 팀이 연습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야심한 밤.

우리 방의 두 사람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침대지만 같은 1층을 쓰는 옆자리, 김문수의 자리를 빤히 바라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잠든 것 같았다.

나는 태블릿 PC와 수첩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한강]이라는 키워드가 아직 감이 잘 오진 않지만, 어떻게든 살펴보긴 해야 했다.

화장실에 도착한 나는 수첩 첫 장을 펼쳤다.

[한강]이라는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범위도 너무 넓고, 연계할 수 있는 다른 단서가 전혀 없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어?”

분명 어제까지는 없었는데?

다음 장에 뭔가 적혀 있었다.

[124.73.529]

정체 모를 숫자였다.

의미 없이 나열된 것만 같은 숫자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수첩을 노려봤다.

“……설마.”

순간 내 머릿속에 뭔가 스쳤다.

나는 태블릿 PC에 검색해 웹하드에 접속했다.

익숙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화면에는 많은 폴더가 떴다.

나는 그중에서 ‘첸스틴’을 클릭했다.

폴더에 사진들이 주르륵 떴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나는 사진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넘겨 가며 확인했다.

그러던 중 어떤 사진 한 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그 사진은 첸스틴의 곡 <러브 어택>과 관련한 자료였다.

당시 제작자가 ‘익명의 사용자로부터 라이선스 구매 문의를 받았다’라며, 구매 문의 내역이 담겨 있는 사이트 캡처 화면을 내게 전달해 준 것이다.

나는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 장을 더 넘겼다.

[124.73.529]

[서울, 청담]

손글씨로 적힌 메모를 촬영한 사진이었다.

내 필체였다.

저 숫자는 당시 첸스틴을 조사하며 알아 낸 라이선스 구매 문의자의 고유 아이피였다.

그리고 장소는, 그 아이피의 대략적인 위치였다.

나는 바로 화면을 전환해 덕포에 접속했다.

<헐 ㅋㅋ 최강아이돌에 마약돌 있음 (사진O)>

문제의 그 게시물을 다시 클릭했다.

예은의 얼굴만이 또렷하게 살아 있는 문제의 그 사진이 떴다.

나는 게시물 가장 하단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덕포는 익명제이나 가입한 사람만 게시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게시글 하단에는 사용자 아이피가 노출되어 있었다.

하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24.73.529]

수첩에 나타난 숫자와.

표절곡 라이선스 구매를 문의한 사용자의 아이피와.

정확히 일치했다.

내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뭔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누가 참여했는지도 모를 저 현장에서 오로지 예은의 얼굴만을 노출시킨 사진.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악랄한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는 그 사진에는.

분명히 첸스틴이 개입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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