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허! 버크 공, 제정신이에요? 고작 뼈다귀에 영혼을 팔다니요!”
“뼈다귀라니! 아닐세! 저건 영지민을 구휼할 검은 현자의 귀한 선물일세!”
“…기가 막히는군요. 좋아요. 이빨 빠진 흰 사자에게 한 수 배워 보죠.”
땅을 박찬 호위 기사 에밀리는 발검과 동시에 기사 단장 버크를 올려 베었다.
“제법! 그래도 같은 은성 등급의 기사라 이건가?”
기사 단장 버크는 재빨리 막아내더니, 곧바로 검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맞섰다.
‘와… 장난 아니네….’
두 사람의 전투는 넋을 놓게 되는 광경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광풍 때문에 공간이 일렁이고 바닥이 파였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멍했다. 너무 현실 같지가 않아서.
그러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때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기겁했다.
‘뭐, 뭐야!’
머리카락이 잘렸어?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벌어진 맹렬한 혈전. 재정관 마론은 다급하게 외쳤다.
“빠, 빨리! 솥을 옮기시오!”
“네?”
“엎어지면 끝장 아니오!”
그리고는 양팔을 벌리고, 솥 앞에 섰다.
“저 둘은 눈이 돌아가면 말릴 수 없소!”
이걸 막겠다고?
미친 사람들이다, 정말.
먹는 거에 미친 사람들이야.
‘스치기만 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우습게 날아갈 텐데?’
나는 조리장과 함께 솥을 멀찍이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혈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CG라고 할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덕분에 솥을 젓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몇 시지?”
출근할 때가 다 되었을 텐데.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 미치겠네. 잠도 못 잤는데. 그대로 출근하게 생겼네.’
안 되겠다.
저 대결의 끝을 보고 싶지만, 돌아가야겠다.
나는 허둥지둥 장작을 옮기는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님, 아무래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버, 벌써 말인가?”
“예. 제 생업 때문에, 더 이상은 안 되겠네요.”
어쩌겠습니까. 저는 월급의 노예인걸.
나는 대강의 레시피를 조리장에게 일러주고는, 영주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꼭 다시 돌아오게.”
“그럼요.”
유전을 두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저런 인생 역전의 기회를 두고.
‘어휴. 늦은 거, 아냐?’
나는 황급히 게이트를 열었다.
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차.
“자네가 반나절 만에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 덕분에… 영지에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네… 고맙네….”
영주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씁쓸함을 느꼈다.
희망이라.
“그게 좀 더 일찍 왔었다면 좋았겠네요.”
아직도 손가락을 잡았던 아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갓난아기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희망이라니. 영주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자네는 짧은 시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네. 말로 다 못할 정도로.”
한 것도 없는데, 많은 것을 주다니.
영지를 돕는 이유 중, 반은 내 욕심 때문인데.
왠지 모를 죄책감과 민망함, 그리고 쑥스러움이 몰려오자 참을 수 없었다.
“이, 일단 가보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제는 나도 마음 놓고 은퇴를….”
응? 뭐지?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순간 뭔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게이트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두운 방안. 시계만이 째깍거릴 뿐이었다.
“뭐여…?”
그런데 이상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건, 9시 33분.
7시 반쯤에 출발했고, 대략 9시간을 있었던 것 같은데.
“뭐야! 아직 두 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뭐지? 뭔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첫날에도 그랬다. 현실로 돌아오고 나자, 시간이 약간 이상하다는 걸 느꼈었으니까.
게다가 아까 게이트 안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들은 마치 며칠이라도 지난 것처럼 말했다.
다음 날 퇴근하고 바로 온 건데.
“첫날에는 술이 덜 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거 설마 다른 건가? 시간의 흐름이? 이건 좀 확인을 해 봐야겠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확인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 * *
일찍 돌아온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상한데?’
너무나도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피로감 같은 게, 전혀 없는 상태로.
‘맑은 공기를 마셔서 그런 건가….’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면도를 하려고 봤는데, 수염이 거의 자라지 않았다.
영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분명 거뭇거뭇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왜 안 자랐지…?”
몇 가지 가설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지금은 출근이 급했다.
나는 허둥대며 집을 나서, 출근길에 올랐다.
* * *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영지에 있을 동안에는 내 육체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나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랬다면,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야 할 텐데.
영지민들의 기운을 받아서인가. 영지만 가면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허기라. 그러고 보니….’
의식의 흐름은 곧 영지의 식량 문제로 흘러갔다.
‘확실히 산양을 잡아야 다들 힘을 낼 텐데.’
월급으로 저 양반들 입에 풀칠하다간 같이 굶어 죽을 게 뻔했다.
어디까지나 환자식에 가까운 묵은 분유 베이스 죽을 계속 먹일 수도 없는 노릇.
현지 조달이 최선이다.
내가 그렇게 막간을 이용해서, 식량에 대해 고민하던 차.
‘아. 산양을 잡으려면….’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이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들었다.
* * *
점심시간.
을지로 입구 역 4번 출구.
“혹시, 노후계획없다님?”
휴대폰을 매만지던 김인석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접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두리번거리면서 다가왔다.
남자의 손에는 커다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몰랐는데….”
“그런가요?”
“으흠, 아이디랑 매치가 안 되어서….”
그래, 그랬지.
지금 아이디는 영지의 원유를 발견하기 전에 만든 거였지.
이제 아이디도 바꿔야겠다. 유전무죄 이런 걸로.
“혹시, 이거 써 본 적은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내 대답에 케이스를 내려놓던 남자가 멈칫했다.
“괜찮겠어요? 쉽지 않은데다가 위험한 물건이라, 아무래도 사용법을….”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인석이 시계를 바라보니 12시 49분이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사용법은.”
유튜브가 있으니까요.
“대신….”
일순, 김인석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 모습에 남자가 꿀꺽하며 긴장을 집어삼키던 차.
김인석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고 되죠?”
* * *
“허어…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 줄이야….”
“배가 터질 것 같습니다.”
웨스트엔드 영지. 성의 안뜰.
영주와 가신들 모두가 황홀한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김인석이 떠난 뒤, 모두들 곰탕과 수육으로 배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내 참. 섭정을 의심했던 게 부끄럽군.”
“저는 처음부터 믿었습니다.”
“마론, 자네가?”
“헤헤.”
“허허.”
재정관 마론과 영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구같이 웃었다.
배급이 이루어지는 영주성 바깥도 마찬가지. 영지민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야…. 이렇게나 양이…?”
“늘어난다고? 허허.”
펄펄 끓는 솥에서는 뽀얀 국물이 계속해서 우러나왔다.
사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산양은 산양이었다.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로 먹일 수 있는 인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뼈를 고아서 먹게 되자, 평소보다 몇 배의 인원을 더 먹일 수 있었다.
물론, 새로 끓일 때마다 뼈를 새롭게 추가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다.
하지만 평소 쓰임이 없다 생각했던 뼈는, 마치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뽀얀 국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며칠에 한 마리만 잡아도 당장 굶어 죽는 자들이 크게 줄어들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
산양 한 마리에 대한 효율이 전보다 확연히 달라졌다.
“영주, 더 잡읍시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던 기사 단장 버크는, 불현듯 배를 퉁 하고 쳤다.
“더?”
영주는 놀란 기색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불룩 튀어나온 배 때문에 거동은 쉽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이거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산양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웨스트엔드의 산양은 특이했기에, 잡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소만한 덩치만큼 각력도 뛰어나, 넓은 바위 사이사이도 쉽게 뛰어넘을 정도였다.
“영지민들을 동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사 단장 버크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처럼, 해결책 또한 내놓았다.
“이미 맛을 알았으니, 모두 눈이 뒤집혔을 겝니다.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서겠지요.”
“오오. 일리가 있는 말이구먼.”
허기만한 조미료는 없다. 그리고 다굴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먹을 것에 대한 영지민들의 집착을 잘 아는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한 마리면 됐다.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서 딱 한 마리만 잡으면 되었다.
하지만 기사 단장 버크의 말에 재정관 마론은 우려를 표했다.
“버크 공. 그렇지만 그건….”
입가에 침이 흐르는 걸 보아하니, 마론 역시 속으로는 기사 단장 버크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영지의 모두가 위험해… 스읍, 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소매로 거칠게 입을 닦아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영지민들이 이걸 만들겠다고 온 산을 휘젓고 다닐 텐데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주는 미간을 구겼다.
만약,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가 놈들이라도 조우하게 된다면.
“큰일 나겠군….”
“그렇겠죠? 아무래도….”
영주와 재정관 마론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차.
“안 돼요.”
의외로 호위 기사 에밀리가 반발하고 나섰다.
“에, 에밀리 공?”
“그러다가 영지민들이 굶어 죽거나, 산양을 잡기 위해 홀로 영지를 이탈하게 되면요? 오히려 더 위험해질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에밀리에게 쏠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그건 섭정의 뜻에 반하는 일이에요. 이 정도로 훌륭한 구휼 음식이 어디 있다는 말이에요? 양도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또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맛이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인데요.”
시선이 쏠린 탓일까?
그녀는 튀어나온 배 때문에 말려 올라가는 옷을, 연신 아래로 잡아 내렸다.
“섭정이 이 조리법을 알려준 이유를, 저는 알 것 같아요. 우리 모두를 가엽게 여긴, 자애의 마음씨 덕분이겠죠. 차라리 호위를 붙여서 사냥에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에밀리 공? 갑자기?”
기사 단장 버크는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태세전환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극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칼을 맞대었었는데.
‘곰탕이 맛있긴 맛있나 보구나.’
저 철혈의 에밀리까지 전향하다니.
의견을 지지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괘씸함을 느낀 버크였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호위 기사 에밀리는 계속해서 재정관 마론을 몰아세웠다.
“가엽지도 않나요? 여기에 끌려온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영지민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어야지요.”
“으음.”
“한시라도 빨리 섭정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서, 가난한 영지민들을 긍휼을 베풀어야….”
“잠깐.”
호위 기사 에밀리의 말에 기사 단장 버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섭정? 훌륭? 뜻을 받들어?
단어 선택이 조금 이상했다.
“언제부터 섭정을 훌륭하게 받아들였소?”
“그, 그건…!”
“그건?”
“하아… 제가 오해를 했던 모양이에요….”
“허어, 그러셨소? 이제 와서 오해라.”
“이익!”
둘의 티격거림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영주가 나섰다.
“좋네. 모두의 의견 잘 들었네.”
영주는 가신들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그 바람에 침이 줄줄 흘러나왔으나, 영주는 알지 못했다.
“한 번 잡아 보세. 내 호위를 붙여 줄 테니.”
식욕.
말릴 수 없는 식욕에 정신이 쏠려 있던 탓이었다.
* * *
퇴근 후.
나는 캐리어를 들고, 게이트를 열었다.
헌데 영지로 넘어오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자고! 빨리!”
“조져 버리자고! 이 새끼!”
“가죽을 확 벗겨 버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내 눈에 들어온 건, 농기구를 들고 어딘가로 몰려가는 영지민들과.
“창, 창을 이어보자고! 그러면 사거리가 늘어나잖아?”
“미친 소리 그만하고, 빨리 따라가기나 해!”
병장기를 들고 그 뒤를 쫓는 병사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신전을 나서서, 영지로 들어서자 제 키만 한 갈퀴를 들고 씩씩대며 달려가는 론을 볼 수 있었다.
“론!”
내가 부르자,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반가움을 표시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섭정 나리! 오셨습니까!”
이 녀석, 침은 왜 흘리고 있어?
무슨 전염병이라도 도는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무, 무슨 일이야. 왜 다들 손에 흉기를 들고 있는데?”
“아, 산양을 잡겠다고 저러는 것 같습니다.”
“산양?”
“예. 나리. 나리께서 전파해 주신 곰탕이 너무 맛있어서….”
곰탕. 그제서야 퍼즐이 맞추어졌다.
배고픔에 굶주린 영주민들.
그들에게는 곰탕이 마치 성수처럼 느껴졌으리라.
‘산양을 쫓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사냥꾼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의 산양은 일반적인 산양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병사들은?”
“아, 질서와 안전을 위해 영주님이 배려해 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영지민들의 호위로.”
질서와 안전이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사냥꾼도 한 마리 잡기 어려운 게 산양이었다.
‘애들 병정놀이도 아니고.’
그런 놈들을 한낱 농기구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휴이 아저씨가 한 마리를 몰아넣었다고 해서요. 모두들 달려가는 길입니다.”
응?
론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아넣었다고?”
산을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놈들을?
한낱 농기구로?
“론.”
“예. 나리.”
“어디냐.”
일단 가서 직접 눈으로 보자.
* * *
숲 한가운데로 들어오니 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막아! 둘러싸!”
“퇴로를 차단해!”
모여 있는 사람들은 대략 50명.
영주민과 병사들 모두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들은 절벽 옆, 홀로 높게 솟은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고.
“꿰엑! 꿰에에엑!”
봉우리의 꼭대기에는 산양이 위태롭게 올라서 있었다.
“일루와! 일루와! 이 새끼야!”
저 위, 절벽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영지민들이 농기구를 휘두르고 있었고.
아래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냥꾼이 활을 들어 산양을 조준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병사들은 안달을 내며, 창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 진짜 그거밖에 못 쏘는 거요?”
“잘 좀 쏩시다. 잘 좀. 명색이 사냥꾼이라는 자가 원.”
“아, 거 참. 아가리 좀! 집중력이 흩어지잖소!”
사냥꾼이 버럭 역정을 내자, 병사들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미 몇 번 실패한 것 같은데?
“화살이 무슨 내 오줌발보다 못해!”
어깨에 화살이 꽂힌 채, 누워서 악을 쓰는 영지민이 있었으니까.
건너편에서 포위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화살에 맞은 건가?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대단한 집념이었다.
아니 보통 판타지 세계라면 엘프 뺨치는 활 실력도 있고 그래야 되는 거 아냐?
“제 말이 맞죠?”
론은 호기롭게 갈퀴를 고쳐 잡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던 차, 론은 냉큼 소리를 질렀다.
“섭정 나리께서 납시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 화들짝 놀랐다.
사냥꾼이 흠칫하며 시위를 놓은 것도 그때.
“오셨습니까요!”
“나으리! 오셨습니까!”
저 너머로 화살이 떨어지면서 아악 하는 비명이 들렸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다 사람 잡겠네.’
어찌 되었건, 다들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분유 때보다도 반가운 모습인 게, 설마 곰탕의 진한 맛에 중독된 건가 싶었다.
“저놈은 어떻게 몰아넣은 겁니까?”
내가 산양을 가리키자, 영지민들은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아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 먹겠… 아니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지 않겠습니까요? 그냥 놈을 쫓아, 죽어라고 달렸습니다요.”
산양을? 저 놈, 굉장히 빠르다고 들었는데.
곰탕을 먹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이 남자를 초인으로 만든 건가?
대단한 식욕이었다.
“때마침 놈을 절벽에 몰아넣었는데, 지반이 약해져서 저곳만 남기고 무너져 내렸죠.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한 입 했을 텐데….”
남자는 산양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공포에 질린 건지, 산양은 다시 꿰엑거리며 울부짖었다.
‘근데 무슨 고라니 같은 소리를 내뱉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냥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섭정 나리. 이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는 낡은 나무 활을 들어 보였다.
와. 이런 것도 활이라 부르는구나. 나는 혀를 내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한번 해 볼게요.”
“나리께서요?”
사냥꾼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활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제 걸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