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몇 십분 전.
서울 모처. 홍방의 임시 아지트.
“으하하하하! 이거 참 미치겠네! 하하하하!”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흥미있게 살펴보던 홍방 방주 곽호범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영진 이 새끼들, 이런 함정을 파놓았었다고?”
조용히 지켜보길 잘 했지.
곽호범은 자신의 조심성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만약 저 자리에 복면을 쓴 남자들이 아닌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일이 크게 꼬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귀찮은 상황은 피했군.”
곽호범이 위험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화면 너머의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검은 양복들은 복면들을 승합차에 싣고 사라져 버렸고.
엄재동과 정웅은 이진명 비서실장과 함께 그대로 퇴장했다.
홀로 남은 김인석은 뒷정리를 하는 듯, 바닥에 떨어진 집기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래. 이놈이었어.”
곽호범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라춘옥과 조철룡을 꺾은 놈. 이놈이 확실해.’
그는 열 명의 복면인을 막아섰던 김인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떨지도, 당황하지도 않고서 태연하게 손바닥을 들어 올리지 않았던가.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때 마침 잘 되었군.”
함정을 파놓았던 영진도 사라졌겠다, 목격자가 될 수 있는 날파리들도 사라졌겠다.
게다가 김인석은 마치 오늘 밤은 회사에 머무르겠다는 듯이 느긋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곽호범은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를 서서히 지우며 명령했다.
“드론 철수시켜.”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호와 함께 현장으로 와라.”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놈을 쳐야겠다.”
겁도 없이 홍방을 건드린 죄. 죽음으로 갚아줘야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곽호범은 위험한 눈빛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버크와의 훈련 덕분에 살기를 감지한 김인석은 자세를 살짝 낮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살기가 확실했지만, 미약한 느낌이었기에 방향과 거리를 특정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퍼억-!
갑자기 사무실 쪽 위편에 매달았던 CCTV가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나버렸다.
곧바로 위를 올려다본 김인석은 CCTV의 각도가 틀어진 채 부서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언가에 관통이라도 당한 듯, 옆구리에 크게 난 구멍에서는 스파크가 연신 튀어 올랐다.
“저, 저거 비싼 건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울상을 짓던 김인석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자,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주먹만 한 돌멩이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돌멩이가 CCTV를 관통했다는 사실에 김인석은 살짝 긴장을 했다.
그런데….
팍-! 파박-! 팍-!
하나둘 전등이 터져 나가더니 급기야는 전기까지 나갔다.
그러자 일순 짙은 어둠이 동석종합상사를 뒤덮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암흑에 김인석의 두 눈이 차마 적응을 하지 못하던 그때.
타다다닷-!
인영 하나가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더니, 그에게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렸다.
살기와 함께 얼굴로 날아드는 재빠른 공격에, 김인석은 황급히 팔을 교차하여 막았다.
공격이 막히자 곧바로 날아든 건, 날카로운 손가락이었다.
‘윽!’
겨우 고개를 숙였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두 눈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관자놀이와 복부, 명치를 노리고 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당황한 김인석은 허둥대면서도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는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오! 씨! 개 아프네!”
느닷없는 공격에 놀란 김인석이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김인석이 팔을 털며 고통을 덜어내던 그 순간, 어디선가 맡아 보았던 체취가 코를 스쳤다.
‘이건… 경산댁에게서 났던 것과 비슷한 냄새인데…?’
하지만 기습당한 김인석보다 더 크게 놀란 건 복면을 쓴 상대방, 홍방의 방주 곽호범이었다.
‘내 공격을 막았다고…?’
사실 곽호범의 각력은 대단했다. 단단한 각목 여섯 개를 묶어놓고 단번에 부러뜨릴 정도였으니까.
하물며 사람의 뼈를 일격에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김인석은 그저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래. 너무 쉽게 쓰러지면 재미가 없지!’
비릿한 웃음을 흘린 곽호범은 다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마치 어둠에 적응이라도 한듯, 이제는 공격을 흘리고 피하기 시작한 김인석 때문이었다.
“이런 미친…!”
수차례 맹공을 퍼붓던 곽호범은 그제야 이를 악물었다.
김인석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기에 마음이 다급해진 탓이었다.
게다가 반격 없이 피하기만 하는 김인석의 모습에 곽호범은 오해를 하고 말았다.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건가!”
좋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건지 보자.
그는 재빨리 허벅지에서 제법 긴 단도를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단도는 빠르게 날카로운 궤적을 그려 나갔다.
“헉!”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까.
김인석은 오감이 더욱 예민해지자 몸놀림이 조금씩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큭!”
그랬기에 처음에는 후드티의 앞섬을 크게 베인 김인석이었지만….
“으억!”
그 다음은 소매의 아주 작은 끝 부분만.
마지막은 손등의 털끝만 살짝 스쳤다.
그때를 기점으로 김인석은 곽호범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해 나갔다.
바싹 약이 오른 곽호범은 미친 듯이 단도를 휘둘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크아아악! 이 새끼!”
목표에게 두 번 이상 칼을 휘둘러본 적이 없던 곽호범은 연신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사실 김인석이 이렇게 선방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영지의 은성 기사 둘 때문이었다.
‘버크와 에밀리에 비하면 이 정도는…!’
둘은 음식을 서로 먹겠다는 욕심에 틈만 나면 검을 뽑아 들며 으르렁 댔었고.
그들의 혈투에 휘말려 죽을 뻔한 게 벌써 수십 번인 김인석은 절로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한 번의 검격으로 갑옷 입은 상대 여섯을 깔끔하게 벨 수 있는 게 은성 기사의 수준 아니던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게다가 인간의 육체를 넘어선 지 오래인 김인석이었기에 곽호범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버크에게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았기에 실력은 더욱 높아져 있었다.
놀란 가슴이 차츰 진정되면서 평정심을 되찾은 김인석은 역공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자세를 낮춰 머리 위로 단도를 흘린 뒤, 김인석은 그대로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날렸다.
“커허억!”
묵직한 통증이 명치에서 느껴지자 곽호범은 얼굴을 한껏 구겼다.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는데도 이런 격통이라니.
일순 다리에서 힘이 풀린 그는 막힌 숨을 억지로 내쉬며 힘겹게 또 한 번 물러났다.
‘스, 승산이 없다. 무슨 놈의 주먹이….’
단 한 번의 일격은 마치 쇠망치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준 교훈은 생각보다 컸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더욱 불리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곽호범은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
그러자 곧바로 양 옆에서 암살자 둘이 튀어나왔고.
“어?”
놀란 김인석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 음성을 터뜨렸다.
단검을 든 둘이 맹렬하게 달려들던 그때, 김인석은 다급하게 뒤편으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달려들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이 새끼들,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그 모습에 셋은 당황했다.
포위망을 좁혀 한꺼번에 공격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나 간단하게 몸을 빼낼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크윽!”
“쥐새끼 같은…!”
곽호범의 부하 둘이 김인석의 움직임을 쫓아 달려가려던 순간.
파앗-!
김인석은 땅을 박차며 다시 달려오는 놈들에게 빠르게 접근한 뒤, 선두의 복부를 거세게 걷어찼다.
“컥!”
선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동시에 몸이 폴더폰처럼 접히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모습에, 선두를 바짝 따르던 다른 놈이 시선을 빼앗긴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부웅-!
허공을 가른 김인석의 오른발이….
퍼억-!
두 번째 놈의 왼쪽 옆구리에 거세게 직격했다.
아찔한 충격이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옴과 동시에, 놈은 그대로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커헉!”
바닥에 한번 퉁 하고 튕긴 놈은 하염없이 바닥을 굴렀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두 놈이 쓰러지자, 홍방 방주 곽호범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 이런 미친…!”
뒤늦게 곽호범은 깨닫고 말았다. 눈앞의 김인석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 재해 같은 놈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었어!’
이런 놈을 제거하겠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던가.
정보가 부족했다. 아니면 자신의 자신감이 과했을지도.
’지금이라도 발을 빼서 훗날을 도모하는 게…!’
순간, 곽호범은 망설였다.
하지만 그 찰나의 망설임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흉기를 든 오른손을 김인석에게 덥석 잡히고 만 것이었다.
“헉!”
멱살까지 붙잡은 김인석은 그대로 괴력을 발휘해 놈을 빙빙 돌리더니 휙 집어 던졌다.
“으어어어억!”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 속에서 주마등같은 기억이 곽호범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던 그때.
공중을 날던 그의 눈에 이미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부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곽호범은 그 순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홍방은…!’
이제 완전히 끝이라는 것을.
* * *
“영주님!”
다급히 영지로 돌아온 나는 손이 무거웠다.
오른쪽 어깨에 둘러멘 놈과 왼쪽 옆구리의 한 놈.
그리고 왼손으로는 한 놈의 목덜미를 잡아 든 탓이었다.
셋 다 정신을 잃은 상태라 그런지 운반은 쉬웠다. 하지만 놈들이 언제 깰지 몰랐다.
“영주님! 빨리요!”
그랬기에 나는 영주의 성으로 향하며 다급하게 영주를 불렀다.
고함을 고래고래 지른 덕분일까.
영지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영주와 가신들도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 무슨 일인가? 그리고 이 자들은 뭐고?”
“일단은 밧줄부터요. 이놈들을 묶어야 돼요.”
급하게 케이블 타이로 양 엄지끼리 묶어 두긴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갑자기 본 모습으로 변한 경산댁을 생각해 보면, 몸이 꽤나 유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곧바로 론이 튼튼한 밧줄을 가져왔고.
“밧줄 여기 있습니다, 나리.”
버크와 함께 세 놈을 묶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영주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놈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
“아마도 지난번에 독을 썼던 놈들이랑 같은 놈들인 것 같아요. 비슷한 냄새가 났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아마 맞겠군. 내가 소리 없이 몰래 뀐 방귀까지 맞추는 게 바로 자네 아니던가?”
“…뭐, 심문해 보면 알겠죠.”
사실, 내가 이놈들을 영지로 데리고 온 건 심문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경찰에 넘길까도 했었는데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지난번에 잡았던 놈들은 자결을 했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심문할 생각에 여기로 데리고 왔습니다.”
경산댁의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둘 수가 없었다. 제대로 심문을 해서 배후를 찾아 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의 감시를 벗어난 영지가 제격이었다.
게다가 이놈들은 위험한 놈들이었기에 사회와 격리시킬 필요도 있었다.
“오, 심문이라면 일전에 내가 알려준 방법이 있지 않소? 잘 달군 바늘로 손톱 밑을….”
놈들을 포박하던 버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자, 나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악! 그런 끔찍한 거 말구요!”
“그럼 물은 어떨까요? 물은 답을 알고 있다고들 하잖아요. 그냥 놈들을 거꾸로 매달아서….”
에밀리까지 미쳐버린 건가?
“마, 마법 같은 걸로요! 마법!”
영주를 다급하게 부른 것도 바로 마법을 이용해 심문을 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놈들은 고문 같은 걸로는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입을 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놈들이었으니까.
“혹시, 심문하는 데에 용이한 마법 같은 것도 있을까요?”
내 질문에 영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거라면 적당한 게 있긴 하네.”
오오, 역시.
“지금 당장 심문을 할 텐가?”
영주의 질문에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