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대리의 비밀영지-54화 (54/250)

<54화>

백작의 말에 모두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잠시만요.”

휴대폰을 꺼낸 나는 카메라의 확대 기능으로 배를 찍었다.

순간 배에 집중되었던 모두의 시선이 내 작은 휴대폰에 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배, 배를 이 작은 상자 안에 가둔 게요?”

“에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순간을 담았을 뿐입니다.”

“수, 순간을…?”

“그게 가능한 건가?”

관문 위에서는 못 봤었나? 고블린도 찍었었는데.

어쨌든, 지금은 휴대폰에 대해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호들갑을 떠는 가신들을 무시한 채, 나는 백작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붉은 돛에 그려진 황금색의 저울. 이건 아델 상단의 배군…. 후우, 다행이군. 펠릭스의 문양이 아니야….”

백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아델 상단이요?”

“본토의 유서 깊은 상회였는데, 귀양을 올 때에는 분명 기세가 사그라지고 있었네. 그런데,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이거 참….”

나는 백작의 말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미 산맥 너머 미지의 존재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는데, 바다에서까지 말썽이 일어났다면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어쨌든, 적은 아닌 거네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그때, 배가 부두에 정박했다.

범선은 한눈에 봐도 고풍스러움이 넘치는, 낡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린 건, 뜻 밖에도 어린 소녀였다.

* * *

대략 한 시간 전.

죽음의 해협, 아델 상단의 배.

망루에서 배의 뒤편을 바라보던 선원은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노, 놈이 도망친다! 으하하! 저 멀리 도망치고 있다!”

기쁨은 곧 갑판 위의 선원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잔뜩 긴장 했던 모두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사, 살았다! 살아 남았어!”

“정말로 그 퇴치제가 효과가 있을 줄이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델 상단의 서기인 페브도 마찬가지.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꼼짝없이 물고기 밥이 되는 줄 알았는데….”

방금 전까지도 배를 맹렬하게 뒤쫓던 해룡의 모습이 떠올라 페브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놈이 아가리를 쩍 벌렸을 때는 정말로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게 정말로 효과가 있을 줄이야….’

그는 고개를 돌려 뱃머리에 있던 소단주, 레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뒤편의 소란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소녀는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단주님, 해룡이 물러갔습니다.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요?”

싱긋 웃은 레아는 페브에게 단망경을 넘겨주며 앞을 가리켰다.

“보세요. 육지에요.”

“예? 정말입니까?”

정말로 죽음의 해협을 건넜구나.

페브는 황급히 단망경을 들어 올렸다가 곧 크게 놀라고 말았다.

고풍스럽지만 매끄러운 성과 그 밑에 들어선 말끔한 가옥들.

그리고 바닷가에 모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저, 저자들은…?”

페브는 크게 당황했다.

“…드워프들이 아닌데요?”

사실 이들이 죽음의 해협으로 향하게 된 건, 신탁 때문이었다.

그 신탁은 ‘기울어가는 상회를 살리고 싶다면 죽음의 해협을 건너라’ 라는 내용이었다.

처음 신탁의 내용을 들은 아델 상단주 아델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의 해협을 건너라니… 대체 누가 그 곳을….”

“그저 허황된 예언일 뿐입니다. 아무리 신탁이라지만, 그 불확실한 예언에 상단의 미래를 걸기에는….”

“무시하시죠. 게다가 누가 나서겠습니까? 아무도 가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아델룬의 아들들을 비롯해 선뜻 나서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단 한 사람, 레아만이 자신 있게 나섰다.

“공을 세우는 것에 눈이 먼 것이냐? 미쳤구나, 레아.”

“뭐, 첩의 자식이니 보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쓸모 있는 데에 써먹어야지요.”

모두의 비웃음에 레아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평소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던 레아는 신탁의 내용을 듣자마자 몇 해 전의 소문을 떠올렸다.

본토에서 도망친 드워프들이 죽음의 땅으로 건너갔다는 소문을.

‘그래, 그건 단지 그저 그런 소문이 아니야. 얼마 전에 확보한 문서 덕분에, 드워프 노예 장인들이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서 추적을 그만 두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모두가 뜬소문일 뿐이라 생각해서 잊어버렸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레아는 그런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찾아서 조합했고, 결국 중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흑갈색의 액체를 바다에 쏟아 붓자, 해룡이 도망쳤다는 정보 또한.

“레아야….”

아델룬은 자신의 딸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막는다면 자신 몰래 배를 띄울 성격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원이라도 넉넉하게 해줘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다 생각되면 바로 뱃머리를 돌리거라.”

레아가 떠나는 날, 그녀를 배웅하던 상단주 아델룬은 눈물을 머금고 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상단을 되살릴 방도를 찾아올 테니까요.”

죽음의 땅에 정착한 드워프들과의 교역.

레아는 자신을 따라나선 상단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했었다.

하지만, 방금 전 단망경에 비친 건 인간들이 아닌가.

페브는 당황하며 단망경을 내렸다.

“소, 소단주님…?”

“틀림없어요. 그 사람들이에요.”

잠시 당황했던 레아의 얼굴에 곧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예? 그 사람들이라니요?”

“있잖아요. 대숙청 시기에 바다를 건넜던, 대마법사 그레이와 이천 명의 죄수들 말이에요!”

“하, 하지만 그들은 전부 죽었잖습니까? 소단주님도 바닷가에 떠밀려왔던 배의 파편을….”

“아니에요! 그들은 살아 있었던 거예요!”

* * *

배에서 내린 어린 소녀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저는 아델 상단의 셋째, 레아 아델입니다.”

뭐야? 이렇게 예의 바른 인사라니….

그동안 보았던 영지의 거주민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당황하며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자, 레아가 눈을 빛내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곳의 영주이시자, 대마법사이신 그레이 님이시죠?”

“예?”

“책에서 본 모습과 똑같아요. 칠흑 같은 눈동자에,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모습. 정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던 나는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던 차에 뒤편에서 백작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섭정에게 대마법사 그레이라니. 으하하하! 영주, 방금 들으셨소? 으하하하!”

뒤를 돌아보니, 다른 가신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모두들 미묘한 표정의 영주를 바라보고 있던 상황.

한숨을 내쉰 영주가 앞으로 나섰다.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하오, 레아 소단주. 내가… 그러니까… 이곳의 영주, 그레이올시다.”

“네…?”

영주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서도, 붉게 달아오른 레아의 얼굴은 진정될 줄 몰랐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나와 영주에게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섭정님.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괜찮소, 괜찮아. 책에 그려진 삽화는 내가 한창 젊었을 때의 모습이니 착각할 만도 하지. 허허.”

대체 삽화가 어떻기에 나랑 착각을 한 거지?

나는 책의 내용도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는 우선적으로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소단주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아델 상단이 죽음의 해협이라 불리는 저 위험한 바다를 건넌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 물음에 레아는 안색을 고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 그건….”

이어지는 설명은 이랬다.

6년 전쯤. 본토에서 드워프들이 도망쳤고.

아델 상단은 신탁에 의해 그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설명을 듣던 나는 버크를 바라보았다.

“그거… 꼭 설명이….”

“맞소. 우리 영지의 드워프들 같소만….”

나와 버크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자, 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거 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무래도 이렇게 곤란한 내용은 대변인이 나서서 말하는 게 맞겠지.

“마론 공. 저희의 대표로 설명을 해주세요.”

“뭐, 뭐를 말이오? 설마… 드워프들 이야기를?”

마론이 당황하며 주춤거리자 에밀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표정을 굳힌 마론은 영지로 넘어온 드워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블린들에게 당한 후,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이 영지에 흡수됐다고.

“아….”

이야기를 듣던 레아는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수가… 상단의 미래가 제 손에 달려 있는데… 흐흑….”

그러다가 말미에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거 참… 왜 애를 울리고….”

“에휴, 쓰레기….”

버크와 에밀리의 눈총에.

“이, 이 분위기는 뭐, 뭐야? 나보고 설명하랄 땐 언제고.”

말문이 막힌 마론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교역이라….’

신탁 같은 불확실한 것에 미래를 걸다니.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지. 드워프들이 건재했다면 또 모르지.’

아델 상단은 드워프들의 놀라운 물건들을 교역하려고 이곳에 왔다고 했으니까.

사실 손재주 좋은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들은 놀라운 게 많았다.

당장에 엄청난 방어력의 갑주만 해도 그랬다.

‘생각해보면 저쪽 세계의 물건들도 그에 비했을 때 밀리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레아를 바라보았다.

“소단주, 교역품으로는 뭘 가지고 오셨나요?”

“예…?”

“그 신탁, 제가 현실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 * *

“처, 철광석은 어떨까요?”

단단한 철광석을 하나 들어 올린 레아는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이 좋아할 만한 걸 찾다 보니, 결국 철광석이었다고 했다.

‘타이밍 참.’

상단과 교역할 물품을 찾느라 가방을 뒤지던 나는 손을 멈칫했다.

이미 제일 환경에 지분 투자를 하면서 철광석에 대한 고민은 끝났는데.

그래도 일단 꺼내려던 건 보여줘야겠지.

“일단은 저희 쪽 교역품부터 보시죠.”

나는 가방을 뒤적거려 물건 하나를 꺼냈다.

“어떻습니까?”

레아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세상에! 이, 이런 건 처음 봐요! 잉크가… 잉크가 끊임없이 나오는 펜이라니!”

내가 처음 교역품으로 내민 건, 모남이 볼펜.

이후 곧바로 꺼내든 메모용 갱지에 내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고는 눈이 뒤집힌 것 같았다.

볼펜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건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어. 그 동안 이런 걸 감추고 있었소?”

“이거 대단하군.”

“호오! 섭정, 자네 명필이었구만. 이렇게 유려한 글씨체라니. 내 다시 봤네.”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런데, 잘생긴 김인석이라니. 이건 자네 이름 아닌가? 허허, 엄청난 자의식이구만.”

“아악!”

나는 화들짝 놀라며 노트에 쓰인 글씨를 보았다.

한글로 적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 세계의 문자였다.

‘어휴, 이런 젠장! 이런 흑역사를!’

나는 황급히 글씨가 적힌 부분을 찢으며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불을 붙여 공중에 흩날려 버렸다.

잘 가라, 흑역사.

“허엇! 저 아까운 글씨를! 그, 그보다 손에서 불이…!”

“어머머, 그거… 마법인가요?”

백작과 레아는 놀라움을 토해냈지만, 다른 가신들은 여유가 넘쳤다.

“허허. 이래서 신규 유입은 안 된다니까.”

“지난 번 고블린과의 공성전 때 썼던 거 아니오. 화염병에 불을 붙이던 거.”

“으흠! 그만들 놀리시오.”

마치 뉴비를 바라보는 고인물들 같은 표정에, 백작은 헛기침을 했고.

“세상에….”

레아는 건네받은 라이터를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워요… 방금 전에 그 상아로 만든 펜도 그랬지만… 이렇게 화려한 색깔이라니….”

상아? 아무래도 모남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색깔은 라이터의 반투명한 녹색 몸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정말로 저 라이터라는 건 있으면 아주 편리할 것 같군. 내가 야생에 있을 때에도 불을 피우느라 매번 곤욕을 치렀었는데….”

옛날 일을 떠올린 백작은 눈시울을 붉혔다.

“자자, 아직 끝이 아닙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물건들을 꺼내 놓았다.

패딩과 핫팩. 그리고 마론이 미칠 듯이 아끼는 붉은 내복이었다.

“어떻습니까?”

“괴, 굉장해요! 이렇게 촘촘하고 아름다운 옷감이라니! 게다가 따스한 온기를 머금는 옷이라니요! 이런 물건들이라면 분명 본토에서도 통할 거예요!”

“그런데, 철광석 말고 다른 교역품은 없나요?”

“네? 처, 철광석은 필요가 없으신가요?”

“예.”

전혀요.

“그렇다면 생필품은 어떠신….”

“그것도 필요하지는 않네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있으니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자, 잠시만요. 다른 것도 있어요.”

이윽고 레아가 배에서 내린 건, 푸른빛이 감도는 돌이 가득한 자루였다.

“4등급 마석이군….”

영주의 혼잣말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돌의 정체가 4등급 마석이라는 것을.

상단이 가져온 4등급 마석은 제법 많았다.

부두 한편에 자루를 가득 쌓아 둘 정도였으니.

“혹시 이거라면 거대 닭을 더 생산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동안 알게 된 바로는, 거대 닭은 생식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타조알보다 큰 알을 낳긴 했지만, 부화에 성공한 알은 없었기에 그저 식량으로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마석이 있다면 거대 닭의 수를 늘릴 수 있겠지.

하지만 내 간절한 눈빛에도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못해도 3등급 이상, 안정적으로 하려면 2등급은 되어야 하네.”

“흐음….”

내 얼굴이 어두워지자, 레아는 교역이 어긋날까봐 다급해진 표정이었다.

“2등급 마석도 있어요. 1등급도 있구요.”

다급히 외친 레아는 곧바로 다른 마석을 꺼내왔다.

하지만 2등급을 비롯한 상급 마석의 그 숫자가 적었다.

밤톨만 한 1등급 마석 하나와 10개의 2등급 마석뿐이었다.

“이거라면 거대 닭을 10마리 정도는 키울 수 있겠구만.”

영주의 말에 나는 다시 4등급 마석을 주목했다.

“4등급 마석으로는 뭘 할 수 있죠?”

“글쎄, 마법사에게는 필수적인 마석이지만, 섭정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대단한 걸 할 수는 없네.”

뭐야, 그럼 예쁜 쓰레기 아냐?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하지만… 지난번에 말했던 화약이라는 거….”

영주가 나직이 속삭였다.

“어쩌면 그 대용품은 만들어 낼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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