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영진그룹, 장태삼 회장의 집무실.
“거 참, 김 대표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겐가?”
장 회장은 초조한 목소리로 비서실장 이진명에게 물었다.
“예….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요새는 태영해운의 그 비서가 연락을 담당하고 있지 않나? 그 쪽에다가 한 번….”
“태영해운의 지연수 비서도 모른답니다. 그저 장기간 자리를 비운다는 말만 남겼다고 합니다. 엄 대표도 같은 말을 했구요.”
얼굴을 굳힌 이진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초조함을 참지 못한 장 회장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하여간….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겐지. 김 대표, 이 친구는 항상 급할 때에는 이렇게 함흥차사라니까.”
“정 급하시면 미국 쪽의 심장 전문의를….”
“아닐세. 태산에서도 이미 다 알아봤겠지. 소용없을 걸세.”
지금 이렇게 장 회장이 안달을 내는 건, 한국대병원으로 옮긴 태관석 때문이었다.
이번에 태관석에게 병원을 옮기라고 권유했던 것은 비단 김인석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장 회장은 영진이 지분을 가지고 있던 한국대병원의 의료 시스템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간 후원금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한국대병원은 설비와 의료진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자신의 아내가 잘못될 뻔한 사건 이후로는 시설을 더욱 업그레이드 시킨 상황이었다.
“이거 참…. 태관석이한테 면이 서질 않는구만. 내 고집으로 병원까지 옮겼는데….”
그러나 이곳에서도 태관석의 병에 대한 진단은 태산의료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의료진은 최선을 다 해보겠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다는 부정적인 말만 되풀이 했다.
‘김인석 그 친구가 또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벌여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기적을 두 번씩이나 바라는 건 무리겠지.
‘게다가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고….’
태관석, 이 친구를 어찌하면 좋을지.
라이벌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오랜 시간 티격태격 했으면 친구나 다름없었다.
경영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같은 위치에 앉아있었기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것도 사실.
태관석과의 우정 아닌 우정을 떠올린 장 회장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지이이잉-!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장 회장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을 들여다 본 장 회장과 이진명 비서실장은 동시에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허, 이 친구 양반은 못 되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 * *
신논현의 동석종합상사 신사옥.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장 회장의 차가 입구에 도착하자, 김인석과 엄재동은 한 걸음에 달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거 참.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는….”
차에서 내린 장 회장은 김인석에게 눈을 흘기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간만에 보는 김인석이 반가운 듯한 얼굴이었다.
“흐흐. 그간 별일 없으셨죠?”
“별일이 없기는 왜 없었겠나.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으흠.”
태관석을 떠올린 장 회장은, 지금은 이런 말을 꺼낼 타이밍이 아니라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그리고는 이진명 비서실장이 트렁크에서 내린 캐리어를 가리키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아, 느닷없이 여행 채비를 해오라니. 게다가 효도 관광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김인석과의 지난번 통화가 이해가 되질 않는 장 회장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급히 여행을 떠날 수 없겠냐는 말을 꺼냈으니까.
그래서 준비한 게 바로 저 캐리어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것만큼 큰 별일은 없을 걸세. 바쁜 와중에 딱 하루만 시간을 내달라니….”
“흐흐.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하루가 아니라 더 묵고 싶다고 하실 걸요? 그리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바로 댁으로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바로? 아니 여행에서 바로 돌아올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예. 그러니 여행에 대한 건 걱정 마시죠.”
“마음 푹 놓으십쇼, 회장님. 흐흐.”
미소를 띤 김인석과 엄재동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덕분에 장 회장은 황당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지만….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러는 게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여행과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자, 곧 의구심 가득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어디로 뭘 타고 여행을 간다는 게야? 뭐 아무것도 없는데.”
리무진이나 고급스런 승합차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관광버스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동석의 신사옥 입구에는 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장 회장의 손을 잡아 이끈 건 김인석이었다.
“자자, 일단은 안으로 드시죠.”
“아, 안으로? 바로 출발하는 게 아닌 겐가?”
“아이,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엄재동이 장 회장의 캐리어를 받아 안쪽으로 끌고 가자….
“…그럼 저는 일단 차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이진명 비서실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놀란 김인석과 엄재동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예? 아니, 실장님도 같이 가셔야죠. 회장님의 분신이나 다름없으시잖아요.”
“예? 다시 나오시는 거 아닙니까? 여행을 가신다면서요.”
“네. 지금 가는 건데요, 여행?”
김인석의 말에 이진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차에 김인석이 두 사람 앞에 양피지로 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뭔가?”
장 회장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지금까지 실실 웃던 것과는 달리 김인석이 긴장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제 허락 없이는 그 어떠한 곳에도 여행지에 대한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입니다.”
“각서요?”
그 말에 이진명 비서실장이 먼저 나서서 양피지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양피지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자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내용도 알 수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이진명 실장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걸 내민 당사자가 김인석이기에 더 따지고픈 마음을 애써 억누른 모습이었다.
그 순간, 장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거… 자네의 그 신비한 일과 관련된 것인 겐가?”
정곡을 찌르는 장 회장의 질문에 김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저뿐일 겁니다. 내용은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으음.”
점점 알 수 없는 말에 장 회장은 그저 침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이건, 마나의 서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맹세하는 순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 허락 없이는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누설할 수가 없게 되실 겁니다. 만약 그럼에도 여타 다른 방식으로 발설을 시도하게 되면… 그 즉시 오감이 마비될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내용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오감이 마비된다니!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랬기에 이진명 실장은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맹세는 어찌하면 되는가?”
“회장님!”
이진명 실장과는 달리, 장 회장은 덤덤한 기색으로 되물을 뿐이었다.
말리듯이 팔을 잡는 이진명 실장의 모습에, 장 회장은 너털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이 친구들을? 날 해하려 했다면 이미 해하고도 남았을 걸세. 알잖은가?”
“하지만….”
“오히려 날 믿기에 이 여행에 초대한 거겠지. 안 그런가?”
장 회장의 말에 김인석과 엄재동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장님과 이 실장님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초대하는 겁니다.”
“믿음에는 믿음으로 보답해야지. 그게 장사꾼 이전에 사람으로서 가질 기본적인 마음가짐 아니겠는가?”
“…죄송합니다.”
장 회장의 말에 이진명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이 양피지에 손바닥을 대 주십시오.”
김인석이 양피지를 세로로 들어 보이자, 장 회장은 그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김인석 역시도 반대편 양피지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 부드러운 양피지가 끼워졌다.
“이로써 진심으로 마나의 맹약을 맺겠습니까?”
“맺겠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장 회장의 대답에 김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로써 맹약은 이루어졌습니다.”
순간 양피지에 푸른빛이 감돌더니 두 사람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엇!”
“헉!”
담대해 보이던 장 회장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란 모습을 보였다.
이진명 실장 역시도 마찬가지.
이후 그 또한 김인석과 마나의 맹약을 맺었다.
“이, 이게…!”
이 실장은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양피지가 푸른빛으로 변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 눈을 끔뻑였다.
김인석은 그제야 긴장된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두 분. 신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하시지요.”
“따라 오십시오!”
김인석이 먼저 발길을 돌리자 엄재동이 마치 가이드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을 인도했다.
“응?”
장 회장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여행을 간다면서 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그것도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김인석은 여전히 머뭇거리는 이진명의 모습에 재동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야, 재동아. 뭐 하냐? 얼른 모셔라. 얼른 가야 1분이라도 더 쉴 수 있지.”
“자, 가시죠, 진명 형님. 가시면 다 아시게 될 겁니다.”
“지, 진명 형님…. 그나저나 엄 대표님, 저는 세면도구도 없는….”
“저 아래 내려가면 다 있습니다. 얼른 오세요, 얼른.”
* * *
“허어, 거 참…. 이 넓은 지하실에 이런 걸 다….”
동석의 신사옥 지하로 내려온 장 회장과 이진명 비서실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창고형 마트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많은 물건들이 선반에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런 물건들을 왜? 그것도 이렇게 대량으로?
그게 영지에 필요한 물건들을 빠르게 조달하기 위함이라는 걸 두 사람은 몰랐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김인석은 멋쩍게 웃었다.
“놀라셨죠? 저희가 필요한 게 조금 많아가지고, 이렇게 쌓아 두었네요.”
아무리 필요한 게 있다고 해도, 이렇게나 많은 물건을?
설명을 들은 장 회장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전혀 놀라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다.
“이 사람아, 내 나이쯤 되면 놀랄 것도 없네.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란다고. 허흠.”
점잔을 빼던 장 회장은 슬쩍 물었다.
“그보다, 이 물건들은 대체 다 뭔가? 그리고 여행을 간다면서 왜 또 이런 지하로 내려 온 게야?”
“아, 그게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김인석이 살짝 고민을 하던 그때, 엄재동은 이진명에게 생필품을 잔뜩 안겨 주었다.
“자, 치약하고 칫솔. 그리고 속옷이랑 수건이에요. 편한 옷은 이걸 입으시고, 혹시 면도기는 전기면도기를 쓰시나요?”
“아, 아닙니다. 카트리지 면도기를 씁니다.”
“잘 되었네요. 자, 일단은 이것들 받으시고. 잠시만요, 침구류도 챙겨야 해서….”
이진명에게 물건을 넘긴 엄재동은 지하 한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 모습에 김인석은 주머니에서 청심환 두 개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
“청심환… 아닙니까?”
“자자, 일단은 크게 놀라시면 안 되니 하나씩 드시죠.”
“거 말하지 않았나. 내 나이쯤 되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못 이긴 척 청심환을 받아 입에 넣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김인석은 그냥 직접 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기에 그는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직사각형을 만들고는 명치에 가져다 댔다.
“자, 그럼 가실까요, 여행?”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뒤쪽에 커다란 게이트를 생성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장 회장과 이진명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자….
“으악! 으아악!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뭔가? 대체 어떻게 한 게야!”
장 회장은 펄쩍 뛰며 경악하고 말았다.
반면, 눈을 동그랗게 뜬 이진명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실장님? 괜찮으세요?”
동공이 풀린 채로 진동하는 이진명의 눈빛에, 김인석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 순간 이진명의 몸이 뒤로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어어?”
“이, 이 실장!”
콰당-!
그대로 놀라서 나자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