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총장의 예상은 정확했다.
소문은 빛보다 빠르다고, 이미 저잣거리에는 아델 상단의 용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이번에 아델 상단에서 희귀한 약초를 들여왔다던데?”
“응, 나도 들었어. 그 희귀한 약초를 먹으면 마력이 증가한다면서?”
“뭐? 마력이? 그렇다면 마법사들이 환장을 하겠군.”
저잣거리의 소문은 아델 상단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짜로 마법사들이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다던데?”
“한 뿌리에 금화가 2,000개인데도, 아주 그냥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다는구만.”
“그 뿐만 아니라, 백색 아카데미에서는 거금을 들여서 남은 약초들을 전부 사들였다더군!”
“그, 그럼 대체 얼마나 쓴 거야?”
“이런 염병할 것들. 우리는 먹을 게 없어서 잡초를 캐서 먹고 있는데….”
“마법사가 벼슬이야, 벼슬. 에이 썩을 것들.”
그렇게 점점 불어나는 성난 민심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톨레스는 레아에게 현 상황을 보고했다.
“정말 섭정께서 예상하신 대로 되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소단주.”
“후우…. 그렇다면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요.”
레아는 긴장된 표정으로 상단 건물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김인석이 일러주었던 계획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 * *
한국대병원. VIP 입원실.
반송장이 된 태관석 회장은 자신의 비서실장 고명환에게 물었다.
“이것봐, 고 실장. 장 회장은 아직도 연락이 없나?”
태관석의 물음에 고명환은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진명 비서실장과 연락이 닿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휴대폰도 연결이 안 되고, 사무실에 찾아가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태관석과 마찬가지로 고명환 역시도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회장님의 병을 치료할 의료진을 섭외하려고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짐짓 표정관리를 하며 태관석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미 장 회장이 태관석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태관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고명환에게 태관석은 날벼락 같은 말을 던졌다.
“고 실장…. 유언장 작성을 준비해 주게. 지분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급한 대로 작성은 해둬야겠군.”
“예?”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고명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회, 회장님! 지금 그게 무슨….”
“내 남은 목숨은 내가 잘 알아.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선명하게 보이는구만. 고 실장,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내 말대로 해주게….”
“회장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분명 장 회장님이….”
고명환은 한국대병원에 떠도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신윤심 여사의 이야기를.
그랬기에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 태관석은 달랐다.
“자네가 기대하고 있는 건, 이 병원에서 떠도는 그 이야기 때문인가?”
“예? 어떻게 그걸….”
“흐흐. 이렇게 산송장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고는 해도, 나 태관석이야. 내 눈과 귀는 아직 멀쩡하단 말이지.”
잠시 옅은 미소를 지었던 태관석은 입이 마르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으면 진즉 장태삼이가 내게 말해줬을 걸세. 그 형님이… 생긴 건 그래도 정이 많으니 말일세.”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뜻이겠지.
“유언장 작성을 준비해 주게….”
그렇게까지 말하니 고명환도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윽고 태관석 앞에 캠코더 한 대가 놓였다. 서류가 아닌 녹화로 유언장을 갈음하기 위함이었다.
A4용지로 된 서류를 받아 든 태관석은 천천히 용지를 넘기며 자신의 유언을 담담하게 읊었다.
“태산 자동차와 전자는 장남인 태맥동에게….”
긴 시간 동안의 유언장 작성이 끝나가던 차에, 태관석이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끝인가?”
“저… 회장님, 아직 하나가 남았습니다.”
고명환 비서실장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쳐 주었다.
“허….”
그 순간, 태관석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건 세월에 밀려 잊고 있었던 오랜 꿈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 * *
웨스트엔드 영지의 이른 저녁.
테이블에 앉은 장 회장은 당혹감 가득한 얼굴로 허리를 넙죽 구부렸다.
“이, 이거 큰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저는 장태삼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떠버리우스의 나이가 천 살이 넘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천 살이 넘은 나이라니.
인간인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이가 아니던가.
“잉, 그려. 그 짝이 여신의 사도가 데리고 온 친구여?”
“예, 예. 어르신.”
또 한 번 허리를 굽히는 장 회장의 모습에 떠버리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구, 젊은 친구가 예의도 참 바르구먼. 누구와는 다르게. 허허.”
그리고는 김인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야? 왜 나를 봐.
불만이 피어오르는 김인석의 얼굴을 가볍게 무시한 떠버리우스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렇게 예의가 바르니 용돈이라도 챙겨줘야것네. 가만있어보자…. 돈은 없고, 대신….”
“아, 아닙니다. 어르신. 용돈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장 회장이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난색을 표하자, 김인석이 재빨리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회장님, 그냥 받으세요. 그냥.”
“응?”
“무려 엘프족 수장이 주는 거잖아요. 어떤 귀한 게 나올지 모르는 건데.”
“그, 그런 건가?”
“아, 그럼요.”
김인석의 말에 장 회장은 기대감을 가졌다.
하지만 정작 떠버리우스가 내민 건 볼품없는 구슬 몇 개였다.
“자, 이거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놀어.”
뭐야, 지금…. 구슬치기라도 하라는 건가? 진짜로 애 취급을 하는 거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김인석과는 달리, 장 회장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허허, 이거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내가 볼 때는 지금도 애기여, 애기. 저 피부 뽀얀 것 좀….”
“아니, 수장님. 장난도 정도껏 치셔야죠. 아, 제가 어렵게 모신 손님인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떠버리우스가 장 회장을 바라보며 귀엽다는 표정을 짓던 그때, 김인석이 한숨을 쉬며 나섰다.
“잉? 아니 왜? 뭐가 문제여?”
“나이가 일흔셋이신데, 구슬치기가 뭡니까, 구슬치기가.”
“일흔셋이면 까마득하게 어린아인디 뭐가? 뭐가 잘못된 거여? 그리고 그 구슬은….”
“아, 엘프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죠. 장 회장님은 인간이신데.”
“아니, 거 보자보자 허니께!”
소매를 걷어 붙이는 떠버리우스의 모습에 김인석은 아차 하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손님도 오신 좋은 날인데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그때 영주가 황급히 나서며 중재를 했다.
손님이라는 말에 무안해진 떠버리우스는 자리에 앉더니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어흠, 여신의 사도라고 자꾸 까불면 앞으로 재미 못 볼 껴. 이제 고만 까불고 술이나 한 잔 따라봐. 건배라도 해야 허니께.”
김인석은 순순히 잔을 채우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예. 자꾸 그러시면 앞으로 저도 술 안 드립니다. 이게 수장님 건강에 그렇게 좋다면서요?”
지금 김인석이 따르고 있는 술은 바로 자이언트 호넷으로 만든 노봉방주였다.
그 말에 떠버리우스는 흠칫 놀랐다.
‘저 술이 희한하긴 희한혀.’
지난번에 김인석의 담금주가 통증에 효과가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떠버리우스였다.
김인석한테서 받은 한 통을 다 비우자, 몸에 통증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떠버리우스는 자이언트 호넷을 몰래 잡아다가 본인이 직접 술을 담갔었다.
하지만 김인석의 담금주 같은 효과는 얻을 수 없었다. 그저 기분 좋게 취할 뿐이었다.
‘분명 저 담금주가 다른 재료들과 만나 무슨 반응을 일으킨 거여.’
담금용 소주가 아니면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떠버리우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 한 마디로 떠버리우스를 격침시킨 김인석의 모습에 장 회장은 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김 대표. 그건 대체 무슨 술이길래…?”
“아, 이거요? 직접 한 번 드셔 보세요.”
곧바로 김인석이 잔을 채워주자, 장 회장은 그 달콤한 향기에 절로 눈을 감았다.
“향이… 굉장히 좋구만.”
“맛도 좋으실 거예요. 자, 이렇게 모인 기념으로 건배!”
이윽고,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장 회장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것이 입안을 감돌다가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알코올 특유의 열감이 화악 식도를 자극하자, 장 회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거 굉장하구만! 내가 마셔본 그 어떤 위스키보다도 더 감미롭고 구미가 당기는군! 김 대표, 이거 대체 무슨 위스키인가?”
위스키가 아니라 담금주인데. 그것도 벌레로 담근.
김인석이 머뭇거리던 차에, 떠버리우스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약술이여, 약술. 그냥 약술도 아니고 굉장한 약술. 아, 여기 여신의 사도가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만들어낸겨.”
“레시피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보다 약술이라고 하시니 생각난 김에 말씀 드리는 건데요.”
안색을 굳힌 김인석은 오늘 이렇게 떠버리우스를 초청한 이유를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태관석의 심장암.
“말하자면, 수장님이랑 같은 곳에 암이… 그러니까 저주가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이야기를 들은 떠버리우스는 펄쩍 뛰고 말았다.
“뭐여? 마띠아스의 저주 말여?”
“아이, 아직 그 저주가 암이랑 똑같은지는 모르잖아요. 저희가 그럴 거다~ 하고 예측만 한 거지.”
“아녀. 분명 같을 겨. 그 무지막지한 증상이 완전히 똑같잖여!”
떠버리우스의 격한 반응에 김인석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암을 치료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아는 김인석이었다.
게다가 그게 희귀한 암일수록 더더욱.
‘아무리 꿀에 절인 용삼이 있다고는 해도, 그게 먹이기만 해서 될 일인지는 모르지….’
그랬기에 태관석의 치료에는 이미 해주 경험이 있는 떠버리우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잘 됐네요, 그럼.”
그랬기에 김인석은 떠버리우스에게 직접 가서 태관석을 살펴봐 달라고 했다.
하지만 떠버리우스는 눈을 살포시 감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겨. 나 같이 마력이 월등한 사람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겨. 인과율이 또 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여.”
또 인과율 타령이시네.
“그럼 저는요? 저도 여기에 차원을 넘어서 온 거잖아요.”
“하이구. 개미 코딱지만 한 마력으로 뭘 어쩌려고. 그 정도 마력으로는 인과율이 틀어진다는 건 어림도 없는 겨.”
아오. 무시당하니까 은근히 열 받네.
김인석은 엄재동을 예로 들려고 하다가 문득 영주의 경우가 떠올랐다.
“그럼 영주님은요?”
“허엇! 섭정! 지금 무슨…!”
당황한 영주는 간절한 표정으로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김인석은 떠버리우스에게 따지듯 묻고 있었기에 영주의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영주님도 예전에 한 번 저희 쪽으로 오셨었는데요? 안 그래요, 회장님?”
“아, 그 자동차 성능시험 때 말인가? 덕분에 우리 영진이 큰 덕을 보았지.”
“아니, 뭐여? 진짜여?”
김인석의 말에 떠버리우스는 영주를 바라보며 도끼눈을 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인과율을 또…. 어이구, 미쳐. 자네 같은 마력을 지닌 자가 차원을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려?”
떠버리우스의 타박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영주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