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또 뭔데?”
신논현의 동석종합상사 신사옥.
지하 3층.
엄재동은 김인석의 손짓에 불안함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또, 또 뭘 하려고 그러는 건데?”
요사이 너무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영지에 들를 시간조차 없었던 엄재동이었다.
그랬기에 김인석이 또 무언가를 벌였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내용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걸 보면, 또 마루타로 써먹기 위함이라는 건 넘겨짚을 수 있었다.
그에 김인석은 인상을 썼다.
“아, 거 자식. 뭘 그렇게 경계를 하고 그래? 내가 맨날 너한테 뭐 이상한 거 시키냐?”
“맨날은 아니고 몇 번. 아니, 자주.”
엄재동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셈을 시작하자, 김인석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랬긴 해도 이번에는 아니야.”
“…진짜지?”
“그래. 이거나 받아.”
의심 가득한 시선을 던지는 엄재동에게 김인석은 세면 바구니를 들려주었다.
“이건 왜?”
“와 보면 알아.”
김인석은 곧바로 게이트 문을 열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머뭇거리던 엄재동은 그대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떻게 더 북적거리냐?”
처음 보는 얼굴들에 엄재동이 고개를 갸웃하자, 김인석은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몇 주 전에 사람들을 더 데려왔어.”
“어? 설마 본토? 지난번에 사와서 개조했던 중고 버스 그거 타고?”
“응. 너도 한 번 타볼래?”
“미, 미쳤냐?”
엄재동은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번에 영주의 차를 탔다가 사고를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룡이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인석이 수면제의 효과에 대해 역설을 했는데도 엄재동은 요지부동.
고개만 세차게 저을 뿐이었다.
“뭐, 오늘 부른 건 그거 때문은 아니고.”
김인석은 엄재동을 끌고서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아니, 대체 어딜 가는 건데? 왜 바닷가 쪽으로 가는 건데? 나 안 탄다니까? 해룡이 무섭다니까?”
엄재동은 불안감을 느끼며 연신 칭얼댔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처음 보는 건물이 해변 근처에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어? 뭐냐?”
간판대신 붙어있는, 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듯한 심벌은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인데?
“들어가면 안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엄재동의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카운터와 좌우 남녀로 구분된 입구에 엄재동은 펄쩍 뛰었다.
“이, 이건 대중목욕탕이잖아!”
이 미친놈! 하다하다 이번에는 대중목욕탕까지 만들어놨어!
그것도 완벽하게 똑같이.
현실의 목욕탕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의 카운터에는 드워프가 앉아 있다는 정도였다.
경악하는 엄재동의 모습에 김인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목욕탕이 아니라 해수탕이다, 해수탕.”
“해, 해수탕? 바닷물로 목욕물을 만들었다고?”
“그래. 영지에 시설들이 하도 많이 들어서서, 목욕탕을 건설할 자리가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널찍한 해변에 지었지.”
김인석은 곧바로 해수탕에 대해 설명을 했다.
탕 속의 물은 바닷물이지만, 샤워기의 물은 민물인 담수라고.
마법진을 이용해 일종의 전기 분해 형태로 담수와 소금을 얻게 된다는 부연 설명도 곁들였다.
“그보다 이제는 자리 확보 때문에라도 원유를 퍼올려야 될 것 같다.”
그 말에 엄재동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하나도 안 됐잖아. 태산 플랜트를 인수하긴 했지만….”
원유를 퍼올린다고 해도 당장에 현실에서 그걸 팔아 치울 수는 없었다.
이걸 어디에서 캐냈는지 증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 증빙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했던 게 태산 플랜트였지만, 아직은 준비할 부분이 많았다.
최근에 영진과 계속해서 논의를 하고 있는 것도 전부 다 이런 준비 때문이 아니던가.
“알아. 하지만 건물을 지을 곳이 없잖아. 당장 주거지도 모자랄 판국이야. 본토에서 계속 사람들을 데리고 올 생각인데 말이지.”
엄재동이 걱정하는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김인석이었다.
그럼에도 김인석은 원유를 퍼서 저장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들어 설 건물들을 위해서.
갑작스러운 화두에 엄재동이 고민에 잠기려던 그 때, 김인석은 그의 등을 탕 쳤다.
“야,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감상평을 얘기해 줘.”
“어? 감상평?”
“네가 첫 손님이니까. 너한테 먼저 개시하는 거야.”
그럼 그렇지. 이번에도 또 날 마루타로 써먹으려는 거구만!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며 엄재동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혀를 내둘렀다.
카운터 뿐만 아니라, 라커에 탈의실에 대기실까지.
동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목욕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타일까지 완전 한국식이네….”
탕 안으로 들어간 엄재동은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완벽한 K 목욕탕의 모습이었으니까.
샤워기도 그렇고, 뜨끈한 탕도 그랬다.
“어흐, 어흐. 좋다. 시원하다.”
탕 안에 몸을 담근 엄재동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움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후끈한 열기가 몸속 구석구석에 닿자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목욕을 즐기는 엄재동의 모습에 김인석은 씨익 웃었다.
“어때?”
“좋다, 좋아. 나 해수탕은 처음인데 느낌이 좀 다른데? 뭔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랄까?”
“흐흐. 해수탕이 몸속 붓기를 빼는 데에 그렇게 좋다더라. 그리고 이게 또 바닷물을 퍼올려서 쓰는 거라, 물 걱정할 필요도 없더라고.”
“이런 건 처음부터 만들었어야지. 나 데려오기 전에 말이야. 얼마나 좋냐? 이렇게 뜨끈하게 마음대로 몸을 지질 수 있다는 게.”
만족스러운 표정인 엄재동의 얼굴에 김인석 역시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이런 시설이 있으면 빈민들의 쩐내를 때와 함께 싹 벗겨낼 수 있겠지.
김인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엄재동은 김인석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야, 너는 근데 안 들어와? 그리고… 왜 가방을 메고 있어?”
옷은 다 벗어 놓고 가방만 메고 있다니.
저게 무슨 해괴한 차림이지?
“아, 이거. 이건 이렇게 하려고.”
씨익 웃은 김인석은 텅 비어있던 냉탕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고 냉탕 바닥을 향해 거꾸로 들어 올렸다.
“어? 어어?”
엄재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때.
촤라라라라라-!
수백 개의 금화가 가방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어! 어어어!”
그 광경에 엄재동은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 검지로 금화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인석의 기행은 멈출 줄을 몰랐다.
“너, 너 이 미친놈! 설마!”
“흐흐.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 거다.”
냉탕에 금화가 얼추 차오르자, 김인석은 그대로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금화로 된 탕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돈이 얼마나 더러운 건데!
엄재동은 경악했지만 김인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코올로 다 소독했다. 걱정마라.”
이제는 목만 내민 채, 싱글벙글 웃으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저, 저 미친놈! 이 지랄을 하려고 지금까지 악착같이 금화를 긁어모았던 거였어!”
엄재동은 경악한 표정으로 탕에서 나와 냉탕으로 달려갔다.
중간에 한 번 미끄러질 뻔도 했지만, 교묘하게 중심을 잡은 그는 그대로 금화탕에 몸을 던졌다.
웃으며 뛰어든 금화탕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철퍽-!
“어억! 내 갈비! 동전이 세워져 있었어!”
“이 새끼. 동전에 몸을 던지는데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거냐?”
“어후, 아퍼. 아픈데, 이상하게 기분은 좋네?”
아하. 사람이 찡그리면서도 웃을 수가 있구나.
조금씩 사부작대며 몸을 금화에 파묻는 엄재동을 보고 김인석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쨌든 엄재동은 조용히 김인석의 옆에서 금화탕을 즐기기 시작했다.
“…돈에 파묻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아아….”
사실 탕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엄재동은 기분이 좋았다. 기분만큼은 찢어질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김인석이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냐. 이건 아니야.”
“어? 왜?”
좋기만 하구만.
“아니, 좀 부족한 것 같아. 옛날에 만화동산에서 보면 오리 할배가 막 금화로 된 산에서 수영하고 그러잖아. 커다란 금고탑 안에서.”
“마, 만화동산? 너 설마…?”
“그런데 이건 고작 수조일 뿐이잖아. 살짝 큰 정도의 수조.”
“야, 야, 인석아….”
“탑을 쌓아야겠어. 적어도 오리 할배보다는 더 큰 걸로.”
“야, 야! 이 미친놈아!”
당황한 엄재동은 재차 김인석을 불렀으나, 그의 두 눈에 광기가 차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할 거면 그 할배보다는 더 크게 만들어야지. 안 그래?”
“어…? 어어?”
“야, 일단 얼른 담아봐. 나중에 다시 쏟아 붓게.”
* * *
“이런 젠장. 이런 마법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
백색 아카데미의 태거튼 총장은 학부의 교수들에게 번역 마법을 만들어 오라고 주문했었다.
이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마치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관계와 비슷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뭔 내용이야?”
양피지에 적힌 글자는커녕, 단어 하나 조차도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었다.
“돌겠군. 이거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마법이었다.
언어라는 건 의미 전달을 위한 수단.
음성같이 그 의지가 생생한 것은 해독할 수 있었으나, 이런 글자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좌판에 주욱 널어놓은 상한 생선 같은 걸로.
태거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플레거는 어쩌면 그래도 그럴싸한 마법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그랬다.
약속된 기한이 되자 태거튼은 궁정으로 향했고, 거기서 플레거의 마법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불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그건….
자신과는 달리, 그래도 제법 효율적인 마법이었다.
정말로 번역을 해내다니! 상한 생선으로 요리를 해낸 건가?
“불? 그렇다면 역시 이게 글자는 맞는다는 말이겠군요?”
“예, 왕비마마. 계속해서 반복되는 글자들을 우선적으로 번역해 보니, 문장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논리적이기까지 했다.
‘야, 약간 어설프긴 하지만… 효과가 있긴 있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태거튼은 병풍 취급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그저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하던 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플레거의 마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그럼 이건 무슨 내용인가요?”
카리나는 신이 나서 플레거를 다그쳤다.
“불을 따라가라. 해석하면 그런 뜻이 됩니다.”
“불을 따라가라니?”
“변혁의 여신이 상징하는 바가 불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기에 여신을 따르라는 일종의 기도문 같습니다.”
플레거는 뿌듯함을 내비치며 태거튼을 바라보았다.
보아라.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그런 눈빛으로.
태거튼은 굴욕감에 입술을 씹었으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요?”
“아, 이건 아무래도 방향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카리나가 관심을 보인 덕분에, 자신의 마법이 실패한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불똥이 튀지 않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음에도, 불똥은 곧 태거튼에게 튀고 말았다.
“방향이요?”
카리나가 귀를 쫑긋하며 플레거에게 되묻던 때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
“예. 아무래도 어딘가로 향하라는 지시문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직접 가보도록 할까요?”
“예?”
플레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말입니까?”
“그럼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왕비마마. 마력으로 쓴 글씨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게….”
“제 밑에 있는 자가 양피지에 글씨를 베껴 쓸 때, 위치를 기억해 두었어요. 그럼 가실까요?”
플레거는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지만,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원하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꼴좋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그 모습에 태거튼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총장께서는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거죠?”
그런 태거튼에게 불똥이 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예?”
“총장께서도 같이 움직여 주셔야죠.”
“저 말입니까? 하지만….”
“어머, 이번에는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시지 못했잖아요.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현장에서는 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실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카리나의 모습에, 태거튼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년.
하지만 곧, 그 역시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걸음으로 플레거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