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비행 전함이 본토의 검은 호두나무 숲에 착륙하던 그때.
의상을 매만지던 나는 순간 당황했다.
착륙 지점을 미리 살핀다던 톨레스가 허둥대며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섭정 나리, 큰일 났습니다.”
“큰일요?”
“예. 지금 이 자리에 카리나가 와 있습니다.”
“카리나? 라이오너의 왕비요?”
“…맞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톨레스를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아무래도 대거 성을 빠져나간 백성들을 직접 잡으러 온 것 같은데….’
그러다가 불만을 가진 백성이 흉기라도 휘두르면 어쩌려고.
카리나의 대담한 행보에 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사실, 카리나가 이렇게 직접 나올 거라는 건 예상했던 상황 중에 하나였다.
물론 가능성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플랜 B로 가야 되는 건가?’
플랜 A는 간단한 쇼를 벌여 아델 상단과 그와 관련된 이들을 데려가는 게 그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라이오너 왕국에 경고 아닌 경고를 남겨, 전쟁에 대한 야욕을 저지하려 했었다.
‘그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여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반대하는 신하들이 생기겠지.’
생각보다 이 세계에서는 변혁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제법 세게 먹히는 것 같았다.
지난번 의도치 않았던 한글 전파도 여신이라는 이름 때문이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런 점을 노려 국론을 분열 시킬 생각이었다.
그 후에 다른 작전들을 곁들여 왕국을 서서히 말려 죽일 생각이기도 했고.
‘그런데 카리나가 이 자리에 있다니….’
밸런벅이라는 무가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
왕비치고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섭정나리, 어쩌면 좋겠습니까?”
“에이, 이런 경우도 미리 염두에 두었었잖아요. 걱정 마세요.”
불안해하는 톨레스와는 달리 나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조명을 조작하던 재동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재동아, 작전 변경이다.”
“어?”
“플랜 B로. 음향이랑 시각효과 빡세게 넣어 달라고.”
“너 설마… 진짜로 그걸 하려고?”
“카리나가 왔다잖냐. 흐흐. 빡세게 부탁한다.”
당황하는 녀석에게 당부를 한 나는 다시 한 번 의상을 점검했다.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슈트 한 벌에, 같은 색으로 반짝이는 중절모까지.
‘여기 이 세계는 붉은색을 미친 듯이 좋아하니까.’
그 안에 입은 검은색 와이셔츠와 흰색 넥타이는 포인트를 주기 위함이었다.
“좋아. 간다.”
점검을 마친 나는 내려진 계단위에 섰다.
그리고 뒤편에서 조명이 켜지던 그때, 빠르게 아래를 둘러보니 인원이 꽤나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들 경외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막을 알고 있던 엘프들만 빼고.
아직 아델 상단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시간을 벌어줘야 할 터.
“섭정 나리. 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카리나입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톨레스의 음성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저게 카리나구나. 예쁘기는 했지만 성격은 더러울 것 같은 인상이었다.
좋아. 그럼 플랜 B의 1단계에 들어가 볼까?
나는 무선마이크를 조정하며 한 발을 내딛었다.
“아아. 쏘쏘. 마이크 테스트.”
곧바로 뒤편에서 재동이가 음향을 조작한 건지 성스럽기 그지없는 음악이 들려왔다.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편곡하여 작사한, 리베라 합창단의 상투스였다.
싸 아 아 아 아 아 아~.
“오오! 누, 누군가 내려온다!”
“시, 신탁이라는 게 정말이었던 건가?”
“트, 틀림없다! 이렇게나 거룩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다니!”
음악 덕분인지는 몰라도, 모두는 땅으로 내려가던 내 모습에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이게 바로 여신의 사도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지.
매번 영지의 가신들만 상대하던 나는 사람들의 반응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그런데 이거… 다른 종교의 노래를 변혁의 여신의 이름을 팔면서 이용해도 되는 건가?
여신이 알게 되면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오늘 이 복된 자리에 많은 어린 양들이 모였구나! 변혁의 여신께서 너희들의 갸륵하고 기특한 마음에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나는 최대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 느낌을 내려고 했다.
뉴스나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이비 교주들을 떠올린 것.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내가 연기를 잘 한다지만 찐 나쁜 놈의 흉내는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기만술의 반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오오!”
“여, 여신의 사도시다! 정말 여신의 사도시다!”
“저리도 아름답게 빛을 내뿜는 붉은색의 옷이라니!”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지면에 발을 디디던 그 순간, 때마침 배 위의 재동이가 나를 향해 조명을 쏴주었다.
그러자 모두의 입에서는 또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 옷뿐만이 아니다! 저 머리카락… 검은색이다!”
“지, 진짜다! 검은 머리 현자다!”
그래그래.
여기 이곳은 검은 머리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특한 곳이었지.
날 반기는 게 이정도로 격하니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흐흐흐.
“오라, 어린 양들이여. 여신께서 직접 하사하신 복음을 너희에게 전해줄 터이니! 하하하하!”
“오오오! 저리도 인자하신 미소라니!”
“여신의 사도시여! 오오!”
내 얼굴에 서린 미소를 오해한 인간들이 또다시 감격해 하던 그때, 떠버리우스와 엘프들이 앞으로 나섰다.
“천만 엘프들의 수장, 떠버리우스가 여신의 사도께 인사를 드려… 드려유.”
이거, 아무래도 존댓말이 어색하신 건가?
삑사리를 낸 떠버리우스는 당황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기란 무릇 뻔뻔해야 하는 법.
그에 당황하지 않고 나는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신께서 하사하신 신탁에 답하기 위해 이곳에 왔구나. 천만 엘프들의 수장이여. 복되고 복되도다!”
“…예, 그래유. 지가 인사를 드리러 왔쥬.”
떨떠름한 표정의 떠버리우스는 뒤편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기 저거는 여신께 바치는 저희 엘프들의 공물이어유.”
곧바로 세계수의 숲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앞에 온갖 금은보화를 쌓아놓았다.
반짝이는 옷감 원단은 물론, 금송아지와 금거북이도 있었다.
게다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분청사기도.
당연하게도 이 물건들은 엘프들이 준비한 게 아니었다.
이번 쇼를 위해 내가 동묘시장에 가서 깡그리 긁어 모아온, 잡동사니이자 짝퉁이었다.
‘뒤집어 보면 MADE IN CHINA가 적혀 있는 것도 있을 텐데.’
또한 송아지와 거북이도 전부 도금이었다.
이거 퀼리티가 살짝 떨어지는데, 눈치 챘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 나는 카리나와 기마대를 힐끗 살폈다.
“저, 저런 금은보화를!”
“처,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들이다….”
“에, 엘프들이 저런 보물들을 선뜻 바치다니!”
…반응을 보니 눈치 못 챘네.
아마도 엘프들이 짝퉁을 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이건 엘프건 권위와 이미지가 중요한 거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다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으하하하! 좋다! 좋아! 내 세계수의 숲 엘프들에게 여신의 축복을 내리겠노라! 복되고 복된 날이도다!”
순간 내가 양손을 번쩍 들자, 배 위에서는 팡파르가 터져 나왔다.
“가, 갑자기 저런 장엄한 음악이 흘러나오다니…!”
그리고는 곧바로 비행 아머들이 내려와 동묘 시장의 잡동사니들을 싹 들고 가버렸다.
“가, 가만! 지금 여신께서 사도를 통해 축복을 내리시려나보네!”
모두의 소란 속에서 나는 두 눈을 까뒤집으며 왼손을 떠버리우스를 향해 뻗었다.
“변혁의 여신 가라사대! 세계수의 숲 엘프들의 여신을 기리는 그 기특한 마음에 답하고자, 친히 하이 엘프라는 이름을 하사하겠다고 하셨다! 앞으로 세계수의 숲 엘프들은 고고한 하이 엘프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리라!”
“…하이 엘프? 고작?”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속삭이는 떠버리우스 때문에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또, 또한 하이 엘프들에게 이천 살을 살아갈 수 있는 장수의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하셨다!”
거 참, 대충 좀 넘어가시지. 이거 다 쇼 아닙니까, 쇼.
“잉? 아니 지금도 평균 수명이 이천 살인디? 뭐 당장 죽으라 이 말이여?”
이 영감탱이가… 지금 이거 쇼를 망칠 생각인 건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한 떠버리우스에게 나는 보일 듯 말 듯 손짓을 했다.
“사, 삼천 살! 삼천 살이라고 하신다!”
가라고. 딴말 말고 빨리 가라고.
그제야 떠버리우스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 여신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감사 드려유! 아이구, 이렇게 장수의 축복을 내려 주시다니!”
떠버리우스가 당황하며 물러나자, 인간들 사이에서 또 한 번 웅성거림이 일었다.
“무, 무려 천 살이나 수명이 더 늘어나다니…!”
“부, 부럽구만…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내일 하는데….”
“여, 역시 여신의 힘은 엄청나구만?”
이게 바로 엘프가 인정한, 여신의 사도가 가진 권위의 힘이다.
이런 개소리도 저렇게 찰떡같이 알아듣다니. 흐흐.
그렇다면 카리나한테도 먹혔을까? 나는 그녀를 살짝 살폈다.
경외심과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눈빛을 보니 의구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실체가 없는, 말뿐인 보상이라 그런 것 같았다.
안되겠네. 실체가 있는 대단한 보상을 보여줘야지.
“찬미 하나이다! 변혁의 여신이시여!”
떠버리우스와 엘프들은 그대로 길을 떠났다.
그래. 가는 게 돕는 거다.
다음은 보세우스와 그린우드 엘프들의 차례였다.
“그, 그린우드 엘프들의 촌장 보세우스가 여신의 사도께 인사 올려유.”
이들이 가지고 온 건, 거대한 가죽 주머니 수십 자루.
사람 반만 한 크기의 자루가 내 앞에 쌓일 때마다, 쩔렁쩔렁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덕분에 이를 지켜보던 인간들의 입에서 경악 섞인 탄성이 튀어 나왔다.
“서, 설마…!”
“그, 금화다! 저게 다 금화야!”
“뭐? 저, 저렇게나 많은 게 다 금화라고?”
“저, 저 소리 안 들리나? 저 쩔그렁 쩔그렁 하는 소리! 저건 금화가 확실하네!”
“세상에… 저게 다 금화라면, 작은 성도 살 수 있겠구만….”
아닌데. 백 원짜리인데.
이번 쇼를 준비하면서 나는 백 원짜리를 잔뜩 긁어 모아왔었다.
원래는 십 원짜리로 하려고 했지만, 구권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가볍디가벼운 신권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백 원짜리로 자루를 채웠다.
“오오! 이렇게나 많은 금전을 준비하다니! 하하하! 여신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하하하하! 복되고 복된 날이도다!”
내가 흡족한 표정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자….
“저, 저건! 단순한 금화가 아니라 엘프들의 금전! 금전이지 않나!”
“저, 저렇게나 많은 금전을 공물로 바친다고?”
모여 있던 기마대원들은 또 한 번 경악했다.
이번에는 카리나도 마찬가지.
흠칫 몸을 떠는 게, 아무래도 공물의 양이 엄청나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그런 그들을 힐끗 살펴본 나는 다시 두 눈을 까뒤집었다.
“여신께서 사도의 몸을 통해, 이 갸륵한 엘프들에게 축복을 내리노라!”
그리고는 곧바로 보세우스를 가리켰다.
“기뻐하거라!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는 자네들에게는 우드 엘프라는 이름을 내려주신다 하셨다!”
“잉? 아니, 지금도 우리는 그린우드인….”
“또한!”
중요한 건 지금부터지.
보세우스의 말을 막은 나는 재빨리 가방을 뒤적거려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지금은 용삼밭에서 밭일에 매진하고 있을 중국 애들이 동석을 습격했을 때 가지고 있던 권총이었다.
“다크 엘프들과 혈전을 치루고 있는 자네들에게 여신의 분노라는 엄청난 무기를 하사하겠노라!”
내가 권총을 높이 치켜들자, 또다시 기마대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실망의 웅성거림이었다.
“뭐야… 저렇게 작은데 여신의 분노라니….”
“…여신께서 자애로우시니 화가 많이 없으신 게지.”
“끽 해봤자 소리 한 번 빽 지르는 수준 아니겠나?”
그래. 지금 많이 떠들어 놔라.
실체가 있는 대단한 보상이 어떤 건지 내가 보여주마.
그런 생각을 하며 소음기를 제거하던 그때.
<준비 되었습니다. 마스터.>
비행 아머는 조금 떨어진 곳에 가죽 갑옷을 걸친 마네킹을 단단히 장치했다.
“자! 보아라, 여신의 분노를!”
탕-! 타앙-! 탕-! 타앙-!
마네킹을 정조준한 나는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했다.
퍽-! 퍼벅-! 퍽-!
쾅쾅 울리는 권총 소리 직후에 마네킹은 퍽퍽 터져 나갔다.
“어떠냐! 이게 바로 여신의 분노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마총을 알고 있던 엘프들은 가만히 있었지만, 인간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백성들과 기마대는 물론, 카리나조차도 똑같이 뒤로 드러누워 있었다.
딸꾹-! 딸꾹-!
그 중에서 누군가 딸꾹질을 시작하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카리나의 눈빛이 위험한 욕망의 빛을 띠는 것을.
전쟁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카리나에게는 충격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장면이었겠지.
‘걸려들었어!’
나는 똑같이 위험한 눈빛을 띠며 씨익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