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라이오너 국경에서 조금 떨어진 두 번째 관문.
“성문이 열린다! 성문이 열려!”
“항복의 백기가 내걸렸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갈드 왕국군은 갑작스러운 항복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 오오! 지, 진격하라! 진격하라!”
직접 전군을 진두지휘하던 아크타르 왕은 뿌듯함을 느꼈다.
엄청난 무기를 손에 넣은 것도 모자라, 이렇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다니.
‘역시, 여신의 분노가 보여준 위력 때문인가?’
이게 다 타노쓰 님 덕분이다.
이윽고 관문을 지키고 있던 라이오너군의 지휘관이 포박당한 상태로 아크타르 왕 앞에 끌려왔다.
“흐흐. 그래, 너는 아주 현명하구나. 피를 흘리는 대신 고개를 조아리는 걸 택하다니.”
아크타르 왕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돌아온 건, 라이오너군 지휘관의 살기 어린 핀잔이었다.
“흥! 더러운 전술로 이긴 주제에 건방 떨지 마시오.”
“으, 으응? 더러운 전술?”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당신이 국경을 공격하는 그 사이, 여신의 사도가 수도를 습격해서 전하를 사로잡지 않았소!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겁한 양동 작전을 쓰다니…”
지휘관의 두 눈에는 분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보았다면 이 레인디어 관문은 물론, 국경도 함락당하지 않았을 게요.”
“뭐, 뭣? 펠릭스 2세가 잡혔단 말이냐?”
지휘관이 건넨 놀랄만한 내용에, 아크타르를 비롯한 갈드군은 한 걸음에 수도로 향했다.
그런데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서 전투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언질을 받은 건지, 관문들이 하나같이 문을 활짝 열어주었으니까.
덕분에 아크타르는 라이오너의 수도까지 무혈입성 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수도의 광장에서 커다란 칼을 찬 펠릭스 2세와 카리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게 지금 무슨…?”
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신하들과 관료들이 엉망인 모습으로 똑같이 칼을 차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키려던 전범들이 느닷없이 속박당한 채로 무릎을 꿇고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아크타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대체 저들을 감시하는 저자들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양식의 갑옷들인데…?’
비행 아머들의 삼엄한 모습에 진군을 멈춘 아크타르는 입을 벌린 채로 말에서 내렸다.
“으흠, 자네가 아크타르 왕인가?”
그러던 차에, 어떤 한 젊은이가 그의 앞으로 나섰다.
“응? 지금 뭐라고…?”
천부장, 아니 백부장도 안 될 것 같은 젊디젊은 젊은이가 감히 자신에게 반말을 하다니.
“귓구멍이 막혔나. 자네가 아크타르 왕이냐고 물었다.”
그에 아크타르는 눈썹을 꿈틀 댔다.
“허, 허허. 허허허.”
말세도 이런 말세가 없었다.
라이오너의 왕이 저런 꼴이 된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갑자기 나타난 젊은이가 대놓고 하대를 하다니.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미친 것이냐! 여봐라! 지금 당장…!”
아크타르 왕은 인상을 굳히며 추상같은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허,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감히 여신의 사도에게!”
“헛, 여신의 사도?”
그 말에 아크타르 왕은 멈칫하며 젊은이를 유심히 살폈다.
검은 머리 현자를 떠올릴 법한 머리카락이었지만, 그게 여신의 사도라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었다.
검은 머리야 사막 쪽 유랑민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니까.
물론 저 정도로 짙은 검은색은 아니었지만.
“네, 네놈이 여신의 사도라는 증거가 있느냐?”
“허어, 네놈에게 여신의 분노를 쥐어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허, 허허!”
이거 웃기는군. 아크타르 왕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허리띠에 꽂아 둔 여신의 분노가 태양빛을 받아 일순 번쩍였다.
“내게 여신의 분노를 쥐어주신 분은 범우주적 존재이신 타노쓰 님이시다! 설마 네놈이라고 할 생각이었느냐?”
하아… 이거 또 찌찌파티를 해야 하는 건가.
시간을 벌 생각이었던 젊은이, 김인석은 한숨을 내쉬며 웃통을 훌렁 깠다.
“자, 보아라! 여신께서 KS 인증마크처럼 박아 놓은 이 문장을.”
“어…?”
양팔을 활짝 벌린 김인석의 모습에 아크타르는 고개를 앞으로 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여신의 사도임을 입증할 만한 문장이 원형의 형태로 그 명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잉크로 써 놓은 것도, 문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법도 아니었다.
푸른 불빛 같은 이질적인 무언가가 글자의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건…?”
아크타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로 여신의 사도가 맞는다면 자신은 불경죄를 저지른 셈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순간.
“이, 이 상처는 뭐냐?”
그의 눈에 글자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붉은 빛 흉터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여, 여신의 사도라더니, 그걸 인증하는 문양에 이런 상처가 웬 말이냐!”
김인석은 순간 아차 싶었다.
지난번에 마검 에이마가 훑고 지나갔던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당혹스런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건 마검 에이마와 싸우면서 얻은 영광의 상처다!”
이럴 때는 오히려 강하게 나가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 김인석은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효과는 있었다.
그 말에 아크타르가 당황하며 흠칫 뒤로 물러섰으니까.
“마, 마검 에이마라고? 그렇다면 그렌델과 싸웠다는 말인가?”
“그래, 그렇다. 저기 보이지 않느냐? 포박당한 그렌델이?”
“저, 저게 그렌델이라고?”
“그렇다.”
“…퉁퉁 불어터진 저 호박 덩어리가 그렌델이라는 말이냐?”
아차, 내가 너무 두들겨 팼나?
그렌델의 얼굴은 이제 원판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네놈! 지금 감히 짐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한숨을 내쉬는 김인석의 모습에 아크타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봐라! 지금 당장 이 놈을…!”
명령을 내리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아크타르는….
“타, 타노쓰 님…!”
빠르게 날아오는 비행 버스의 모습에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 * *
“…여신의 사도께 이 건틀렛을 바치나이다.”
버스에서 내린 톨레스가 나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건틀렛을 건네주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이럴 수가! 타, 타노쓰 님이 무릎을…?”
방금 전까지 이놈 저놈 하던 아크타르 왕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내 앞에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그걸 시작으로 갈드 왕국의 병사들도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 모두 내 앞에 엎드렸다.
“저, 저 건틀렛은 모두를 먼지로 만들어버렸던 그 엄청난 건틀렛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저렇게 넘겨주다니…!”
“저, 정말로 여신의 사도가 맞는 모양일세!”
그 모습에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일 처리가 쉬워진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태맥경이 제대로 합성을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뭐, 보나마나 돈 주고 사람을 사서 만든 것이겠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 그럼 진짜 여신의 사도시란 말씀이십니까?”
그 순간, 넙죽 엎드렸던 아크타르가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 눈빛에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의구심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래 임마! 확 그냥. 건틀렛 맛 좀 볼래?”
“히이익!”
어휴, 이 의심 많고 소심한 인간 같으니. 기만술의 반지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나 소심할 줄이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톨레스에게 미리 날아오라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설득에 한 나절은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바람에 톨레스가 또 타노쓰 분장을 하게 되었지만.
“아아. 테스트. 테스트.”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을 억누른 나는 마이크의 전원을 켰다.
“오오! 장하고 또 장하도다! 여신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니!”
“아이고, 예예.”
“가, 감사합니다. 여신의 사도시여.”
내 말에 엎드렸던 갈드 왕국군 모두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게다가 이렇게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이 먼 타지까지 달려오다니! 여신께서 너희들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격하실지어다!”
우퍼 스피커 덕분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그런 걸까?
모두는 진심으로 감격한 것처럼 목소리를 잘게 떨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가, 감사합니다! 여신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다들 돌아들 가거라.”
잔치는 끝났다. 이제 모두 해산.
“예, 그럼 이제 돌아가겠… 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리던 모두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못 들었느냐? 다들 돌아가라는 말이다.”
이에 나는 다시 단호한 축객령을 내렸고, 아크타르 왕은 당연하게도 강하게 반발했다.
“하, 하지만 여신의 사도시여! 저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그럼 뭐, 여기를 점령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그, 그렇지요! 저희가 승리했으니까요!”
내가 가신들한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 건 바로 이런 모습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의심 많은 아크타르가 욕심도 많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놈의 소심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
“뭐 임마? 점령? 확 그냥 손가락 한 번 튕겨줘? 먼지 맛 좀 볼래? 저 새끼들을 먼지로 만들어서 네 폐 속을 두둑이 채워줄까?”
“히이익!”
“저, 저는 일개 병사일 뿐입니다! 여신의 사도시여! 저는 죄가 없습니다아!”
그러나 이렇게 윽박만 지르는 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소통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과정.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런 소통이 필요했기에 나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네…?”
“생각해 봐라. 여신께서 네게 여신의 분노를 하사하지 않으셨다면, 네가 과연 이 라이오너의 수도를 밟을 수나 있었을지를. 여신의 분노가 없었다면, 지금 갈드 왕국의 수도에 펠릭스 2세가 서 있었을지도 모르잖냐?”
“헙…!”
아크타르는 순간 숨통이라도 막힌 듯이 양손으로 입을 감쌌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 말은 사실이니까.
“자! 능력 밖의 욕심은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평생 명심하거라! 갈드 왕국의 아크타르 왕이여!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씨익 웃으며 건틀렛을 낀 손의 엄지와 중지를 살살 비비기 시작했다.
“알지? 갈드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린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러자 아크타르는 창백해진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빠질 정도로.
크으. 역시 소통만큼 좋은 건 없다니까.
그 모습에 나 역시 만족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런데 아크타르의 바지를 적시고 있는 저건 뭐지?
* * *
짧은 전쟁이 끝난 뒤, 라이오너 왕국의 전역은 소란스러워졌다.
“으응? 전쟁이 끝났다고? 아니 전쟁세를 마련하느라 쌔가 빠질 지경이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끝났다고?”
“그렇다더군.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그냥 끝나버렸다는구만.”
“어어, 나도 들었네. 여신의 사도라는 자한테 그렌델이 뒤지게 맞았다던데?”
“뭐? 그 피투성이 그렌델이? 그 자는 대륙 최강자 아니었던가?”
“그것뿐만이 아닐세. 갈드 왕국의 아크타르가 수도까지 들어갔다가 그냥 돌아갔다던데?”
“그래, 그랬다더군. 여신의 사도한테 펠릭스 2세가 잡혔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냥 돌아갔다더군.”
“어어! 들었네, 나도 들었어! 그저 말 한마디로 그 아크타르 놈을 돌려보냈다는 말을!”
“허어, 세상에… 그렌델을 이긴 것도 모자라, 아크타르를 그냥 돌려보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문은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라이오너의 백성들은 연신 놀라움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해졌던 믿기지 않는 소문은 한 가지 중요한 의구심을 심어주었다.
“펠릭스 2세가 잡혀버렸다면….”
“…그럼 그 다음 왕은 누가 된다는 말인가?”
* * *
“당연히 여기 계신 섭정, 인석 공께서 왕으로 취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법공학부의 바인은 가슴을 탕탕 치며 강하게 주장했다.
“암, 그렇고말고. 여기 섭정의 정치력은 내가 보증할 수 있네. 내정을 다루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일세.”
뒤이어 이든 백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그러나 라이오너의 관료들과 성직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 하지만 여신의 사도께는 라이오너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다만…!”
“라이오너의 이름을 갖지 못한 분께서 라이오너를 통치하신다니요!”
그건 맞지. 나는 라이오너 사람도 아닌데.
김인석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는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섭정 노릇하기도 바쁘고, 현실의 일도 바쁜데 왕은 무슨.’
어차피 김인석은 라이오너의 전후 처리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자신을 추종하는 두 사람이 저렇게 열을 내는 중이니,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콰앙-!
“아직도 그런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다니! 이 왕국은 전혀 발전한 게 없구만!”
백작은 답답하다는 듯 강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난리통에 반쯤 부서져버린 왕좌를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