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묵혼풍뢰검, 천풍경도(天風驚濤).’
유한백은 자신이 펼친 묵혼풍뢰검의 초식이 만들어 낸 광경을 바라봤다.
삼아채의 채주인 수왕귀가 일격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예상보다 더한 위력이다.’
묵혼풍뢰검은 상당히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반부인 바람의 결은 세 가지의 초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천풍경도의 초식이었다.
하늘의 바람이 마치 물결치듯 신속하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검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쾌속검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실전에서는 유한백 역시 처음 써보는 것이었기에 이 정도의 위력이 나올 줄은 몰랐다.
‘문제는 위력만큼이나 반발력이 크다는 것.’
묵혼풍뢰검 자체가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내공의 양이 많은 편이었다.
천풍경도 초식 역시 단숨에 쾌검식을 내질러야 하기 때문에 한 번의 검초에 내공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이런 쾌검식을 버틸 육신이 중요했다.
유한백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애써 감추며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한 번에 팔의 근육이 마비되어 버릴 줄이야.’
약주로 몸을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유한백의 육신은 여전히 약골이었다.
아직 묵혼풍뢰검의 초식을 감당할 만큼 육신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였다.
유한백의 몸이 단번에 거덜 날 만큼 반발력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위력은 놀라웠다.
절정고수인 수왕귀가 단 일격에 사지의 힘줄이 끊기고, 온몸에 격자무늬로 상처가 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것이었다.
괴물이나 다름없었던 수왕귀가 쓰러진 것을 보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아채의 수적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유한백은 그런 수적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도적놈들은 입만 살았다니까. 네놈들도 이놈처럼 가죽을 포로 떠주마.”
그의 허장성세에 놀란 수적들 중 몇몇이 허둥지둥 도망치며 곧장 강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수적들도 겁을 먹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조금씩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자세를 잡았다.
‘빌어먹을.’
사파 놈들은 눈치로 먹고사는 놈들이었기에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금세 눈치챈 것이었다.
그러자 유한백이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쿠우웅!
무리해서 진기를 끌어 올린 뒤 갑판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그러자 배 전체가 흔들렸다.
동시에 최대한 힘을 모아 검을 뽑아 들었다.
“와봐라 수적 새끼들아. 오늘 내가 네놈들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주마.”
유한백이 검까지 뽑아 들자 수적들이 다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허장성세가 어느 정도 먹히는 듯하자 유한백은 쓰러져 있는 수왕귀를 발로 짓밟았다.
우두두둑!
유한백이 밟은 곳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났다.
그는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수적들에게 소리쳤다.
“크흐흐, 아주 소리가 듣기 좋군. 너네들한테서는 더 좋은 소리가 날 것 같은데 말이야.”
삼류 마두에게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유한백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수적들이 어금니를 꽉 물며 유한백을 비난했다.
“비, 비열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정파냐!”
유한백은 자신을 비난하는 수적들을 향해 일갈했다.
“닥쳐! 원래 나쁜 새끼들한테는 더 나쁜 짓 해도 돼!”
그러면서 다시 수왕귀의 팔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콰드드득!
다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수적들은 유한백의 잔인한 손속에 경악했다.
“잔인한 놈!”
“우리도 잡은 포로에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수적들의 원색적인 비난에 유한백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놈들. 대충 하다가 이제 그만 가라. 피곤하다.’
유한백은 어차피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파 놈들이니 이놈들도 대충 이러다가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츠츠츠-
놀랍게도 배에 있는 수적들 중 몇몇 놈들에게서 수왕귀와 같은 사기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한백을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 감히 누구를 건드린 것이냐!”
‘어라, 뭐야?’
유한백은 당황하며 사기가 흘러나오는 놈들을 광명심결로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 자식들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구나.’
수왕귀가 자신의 애인으로 삼은 수하들에게 금기공을 나누어 알려 준 것이었다.
유한백은 괜한 도발을 해서 수왕귀의 애인들을 자극한 셈이었다.
쿠구구구!
거센 사기를 일으킨 채 가까이 다가오는 수적들을 보며 유한백이 수왕귀를 일으켜 세우고서는 검을 목에 갖다 댔다.
“다가오지 마라. 이 새끼 목 날아간다.”
사실 살려서 데려가 관아에 넘긴 뒤 현상금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유한백이 수왕귀를 인질로 잡자 그의 애인들이 광분하며 더 사기를 내뿜었다.
“네놈!”
“갈기갈기 찢어 주마!”
‘젠장.’
유한백이 어쩔 수 없이 수왕귀를 버리고 강으로 뛰어들려 한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공중에서 검초가 수를 놓았다.
차자자장!
정확한 검격을 내지르며 조명환이 유한백 앞에 섰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파리한 얼굴로 힘겹게 검을 들었다.
“후우, 한백아. 여긴 내가 막으마. 어서 도망…… 우에엑.”
여전히 뱃멀미로 고통받는 조명환이었다.
유한백은 그런 조명환을 보며 혀를 찼다.
‘조 사형, 도움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애매하잖아.’
찰팍!
그때 난간 위로 푹 젖은 백무흔이 불쑥 튀어 올랐다.
경공으로 날아오다가 착지를 잘못해 강에 떨어져 헤엄쳐서 배를 기어오른 것이었다.
촤악!
다른 사람이었다면 초라해 보였겠지만 백무흔은 잘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올라와도 멋있었다.
유한백은 그런 백무흔을 보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빌어먹을 불공평한 세상.’
백무흔 역시 도를 뽑아 들고 유한백 앞에 섰다.
“청성을 건드린 놈들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피와 죽음뿐이다.”
흑도나 마교도들이나 할 법한 살벌한 말을 남기는 백무흔이었다.
수적들은 삼지창을 쥐고 함성을 내지르며 조명환과 백무흔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라아아!”
배 위에서 치열한 결전이 벌어졌다.
조명환은 울렁거림을 참으면서도 정확하게 검격을 날렸다.
촤아아악!
백무흔은 다가오는 수적들을 향해 도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콰콰콰콰!
조명환과 백무흔의 공격에 밀린 수적들은 갑판에 나동그라지거나 강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뒤에 있는 유한백은 수왕귀의 등 뒤에 걸터앉은 채 이를 지켜봤다.
“이야, 잘 싸운다.”
유한백은 열심히 두 사람을 굴린 보람을 느꼈다.
그때 걸터앉아 있는 수왕귀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 했다.
“으으으으…….”
이를 본 유한백이 허리춤에 꽂아 둔 옥피리를 꺼내 들었다.
“자식아 일어날 생각하지 말고 누워 있어라. 현상금 바꿔 먹어야 하니까.”
그는 옥피리를 치켜들고 정신을 차리려던 수왕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억!
옥피리에 맞은 수왕귀는 곧장 다시 기절했다.
* * *
의창은 호북성에 위치한 장강 연안의 항구 도시였다.
무림맹이 있는 무한으로 들어가기 전 들러서 가는 도시로 항구 도시답게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곳이었다.
그 의창의 선착장 안으로 배 몇 척이 들어왔다.
그런데 배에 달린 깃발을 보고 선착장에 있는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
“사, 삼아채!”
펄럭이는 깃발에 선명하게 새겨진 삼지창 모양을 보고 선원들이 놀라서 도망갔다.
악명 높은 장강수로채 중 삼아채가 대놓고 의창의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선원들의 신고를 받고 급하게 무장한 관병들이 선착장 앞에서 진열을 맞추며 경계했다.
곧 배가 들어오고 돛을 내렸다.
관병들이 긴장하며 창을 쥐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새끼들아, 빨리빨리 안 내려가? 콱 씨!”
무장 해제당한 수적들이 밧줄에 묶인 채 줄줄이 항구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를 본 관병들이 깜짝 놀랐다.
“뭐지?”
“분명 삼아채 수적 놈들인데…….”
그때 뒤에 있던 관군 측 책임자가 부랴부랴 앞으로 달려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관군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삼아채 수적들이 끌려온 것을 보고 입이 쩍 벌어진 것이었다.
수적들을 데리고 내려온 조명환과 백무흔이 관군 측 책임자 쪽으로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고생하십니다. 저희는 청성파의 삼대제자들로 제가 인솔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조명환의 말에 책임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포권을 취했다.
“청성의 도인들이었구료. 그런데 이건……?”
옆에 있던 백무흔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강을 지나는데 수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책임자가 입을 쩍 벌렸다.
“수적들을 역공해서 모조리 소탕했다는 것이오?”
조명환과 백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책임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두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사천 쪽 출신이시라 이쪽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 삼아채의 채주는 수왕귀라는 무시무시한 고수로 아무도 건드리지를 못하오. 놈이 복수를 한답시고 이곳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쿠웅!
책임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배에서 뭔가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꽁꽁 묶인 거구의 사내였다.
책임자는 자신의 옆에 떨어진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히이익! 수, 수왕귀?”
휘이익!
배 위에서 몸을 날린 유한백이 수왕귀의 몸 바로 위로 착지했다.
퍼억!
수왕귀의 몸체를 밟고 선 유한백이 책임자를 보며 말했다.
“자식이 겁나게 무겁네. 아, 그쪽이 관군 쪽 책임자예요? 이놈 그래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수적인 것 같던데 현상금 얼마예요?”
다짜고짜 수왕귀의 현상금을 먼저 묻는 유한백이었다.
설마 삼아채의 채주인 수왕귀가 붙잡혔을 것이라 생각지 못한 책임자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것이…… 관아로 가봐야 정확히 알 것 같…….”
“에이 귀찮게. 그냥 여기서 주면 좋은데.”
유한백은 수왕귀의 발에 묶어 둔 밧줄을 붙잡고 말했다.
“그럼 가요 관아로. 돈 받고 가게.”
그리고서는 수왕귀를 짐짝처럼 질질 끌고 먼저 나서는 것이었다.
이를 본 관병들은 물론 선원들까지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항구에서 워낙 본 사람들이 많아 청성의 무인들이 악명 높은 삼아채를 완전 소탕했다는 소문이 강호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까르르르륵!”
유한백은 은자가 가득한 주머니를 보고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수왕귀는 물론 삼아채의 수적 중 현상금이 붙어 있던 놈들의 몫까지 챙겨 오니 액수가 상당했다.
그는 두둑한 주머니를 보고 신나서 어깨춤을 췄다.
“이 돈이면, 좋은 데 가서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가락도 듣고, 옷도 좋은 걸로 싸악 빼입고. 아이고 좋다!”
무림맹 가기 전에 실컷 풍류를 즐겨 볼 생각에 유한백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 유한백을 보며 조명환이 고개를 저었다.
“한백아,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구나.”
그의 말에 유한백이 눈에 불을 켰다.
“안 되긴요. 뭐가 안 돼요 조 사형.”
“이미 일정이 많이 늦어졌잖니. 성도에서 시간을 너무 끌었어.”
신룡무관 입관 시험 날까지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의창에서 무한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말을 타고 가면 이틀이면 이를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말을 빌려서 타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상선이 본래 무한까지 가기로 했던 것인데 수리가 필요하여 일주일은 여기 정박해야 한다고 하니 말이야.”
유한백은 조명환의 말에 분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으으으윽! 여기서만큼은 풍류를, 풍류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자 백무흔이 유한백에게 말했다.
“놀 거면 여기보다는 무한이 나을 거다. 유명한 동호도 있고, 이름난 객잔도 많다.”
백무흔의 말에 유한백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시험을 후딱 보고 거기에서 놀면 되겠네.”
그때 유한백이 백무흔을 힐끔 보면서 말했다.
“근데, 백 사형.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강호에 대해 아는 것이 되게 많은 것 같네? 놀 만한 곳도 잘 알고 말이야. 백 사형 원래 집이 뭐 하던 곳이라고 했었지?”
백무흔은 유한백의 말에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평범한 장원이다.”
“에이, 그런 것 같지가 않은데. 솔직히 말해 봐. 사형, 예전에 좀 놀았지? 맞지?”
유한백이 백무흔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과거를 캐내려 할 때였다.
“혹시 청성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한 노인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노인의 옷은 상당히 더럽혀져 있었으나 재질 자체는 고급스러운 옷감이었다.
조명환은 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넙죽 엎드리더니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