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신룡무관 2학년에 재학 중인 공동파 출신 오상우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 미친…….’
자신과 합을 맞춘 동료들이 모두 온몸이 마비된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으으으으…….”
그냥 마비된 것만이 아니라 대가리가 깨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오상우는 이제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입이 신들린 듯이 옥피리를 휘둘러 이들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을 목격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퍼억! 퍼억!
와룡각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유한백 일행을 노리고 수많은 다른 관생들이 달려들었지만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
조용하던 모용후가 달려드는 관생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장법을 펼치며 막아서고 있었고, 월소청 역시 면사를 쓴 채 월륜을 휘두르며 한껏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 잘한다! 저쪽, 저 자식 도망가잖아!”
유한백은 희희낙락하며 두 사람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후기지수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모용후는 그렇다 치더라도 월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월소청의 실력은 의외였다.
하지만 유한백은 그녀가 흑존의 손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으윽! 유 소협! 숫자가 너무 많아요!”
와룡각 바로 앞에서 상대하다 보니 이들을 노리며 달려드는 관생들이 너무 많았다.
모용후의 장법이 워낙 강해 어떻게든 방어가 되고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지칠 것이 분명했다.
뒤에서 여유롭게 이를 지켜보던 유한백이 옥피리를 휙휙 휘두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귀 막아.”
유한백의 말에 모용후와 월소청이 뒤로 물러나더니 곧장 귀를 막았다.
그러자 유한백이 옥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삐이이이이익-
엄청난 불협화음이 옥피리에서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악!”
“아아악! 내 귀!”
달려들다가 갑자기 일어난 날카로운 소음에 이들은 귀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유한백은 괴로워하는 관생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옥피리에서 입을 뗐다.
“……나름 그래도 연주를 한다고 한 건데.”
저번 회식 때 옥피리를 잘못 불었다가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 옆의 식당과 옆의 옆의 식당에 있던 사람들까지 기절시켰던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음공을 자신도 모르게 습득한 유한백은 혹시나 해서 다시 재현을 해본 것이었는데 마비독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와룡각 앞에 수십 명의 관생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월소청이 말했다.
“지금이에요! 어서 들어가요!”
유한백과 모용후는 월소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와룡각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오상우는 먹먹해진 귀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으으, 엄청난 놈이 나타났다. 이를 빨리 상부에 알려야 한다.’
그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가려 할 때 공중에서 무엇인가가 휙 날아드는 것이었다.
퍼억!
“커헉!”
오상우의 등을 걷어찬 것은 다름 아닌 백룡각에서 와룡각까지 밧줄을 연결해 타고 내려온 제갈소소였다.
제갈소소는 쓰러진 오상우를 단숨에 점혈해 제압하고는 다른 황룡관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안전해요! 빨리 와요!”
조명환과 백무흔, 당무혁 역시 밧줄을 타고 곧장 와룡각 바로 앞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그들은 몇 시진 동안 백룡각 벽에 매달려 있어서인지 얼굴이 파리해져 있었다.
“으윽, 다리에 쥐가 나는…….”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가 않습니다.”
겨우 허리를 펴고 몸을 푸는 이들이었다.
그런 황룡관 일행을 보며 제갈소소가 손짓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럴 시간 없어요. 수강 신청은 와룡각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이란 말이죠!”
그녀의 말에 조명환은 벌써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갈 소저, 그냥…… 남는 강좌를 신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수강 신청에 실패하거나 필수 강좌를 채우지 못하면 강제 퇴관 당하는데 괜찮아요?”
제갈소소의 말에 조명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강좌를 신청 못 한다고 퇴관까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아까와 달리 다급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갑시다. 얼른.”
조명환은 물론 백무흔과 당무혁까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갈소소를 따라 와룡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흐음, 저 녀석들 신입 관생 맞아? 뭐가 저리 능숙해.”
그는 다름 아닌 홍정광이었다.
유한백의 나태함을 깨부수고 진정한 협객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뒀다.
그런데 유한백이 대놓고 와룡각 앞에 돗자리를 펴놓고 있었을 때부터 그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고 말았다.
본래라면 그의 지령을 받고 은밀하게 숨어 있던 관생들이 유한백이 와룡각 근처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 수강 신청을 실패하도록 만들려 했다.
수강 신청에 실패해 초조해진 유한백에게 미끼를 던져서 내기를 한 뒤 자신의 뜻에 따라 수업을 짜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요상한 방법으로 이렇게 치고 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여간 예상대로 되는 법이 없네.”
홍정광은 그럼에도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다음 단계로 가보자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휘이이익-
마치 새처럼 공중을 활공하여 와룡각 쪽으로 향했다.
* * *
“막아! 저 자식 막아!”
와룡각 내부는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모용후를 앞세운 유한백은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진로를 방해하는 고학년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콰콰콰쾅!
방패를 들고 있던 산동악가 출신 관생들이 모용후의 장법 한 방에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다.
‘대단하다.’
뒤에 있던 월소청은 모용후의 장법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밖에서도 강력한 장법을 수십 합이나 내질렀는데도 모용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내공이 깊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유한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곧장 모용후에게 잔소리를 했다.
“짜샤, 내가 아까부터 얘기했지. 건곤무적장(乾坤無敵掌)은 상대방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대기를 뒤흔들어서 더 범위를 넓혀야 한다니까.”
놀랍게도 모용세가 사람에게 모용세가의 무공을 훈계하는 유한백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기분 나빠 할 수 있었겠지만 모용후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충고를 해주는 유한백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했다.
월소청은 그런 모용후의 표정만 보고서는 기분이 상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한백은 그의 감정을 곧장 알아챘다.
“짜식 고마워하기는. 앞으로 내 말 잘 들으라고. 그럼 누워 있다가도 떡고물 받아먹는 거야.”
모용후는 유한백의 말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건곤무적장을 펼쳤다.
그런 모용후를 보며 정작 유한백이 고민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왜 이 녀석은 검이 아니라 장을 쓰는 거지. 용춘이 녀석의 뇌룡검은 어따 팔아먹고.’
옆에 붙어서 슥 보아하니 분명 모용춘처럼 모용후 역시 뇌력을 견딜 수 있는 체질이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뇌룡검을 전수받아 익힐 수 있었을 텐데 검은 휘두르지도 않고 내공 소모가 상대적으로 심한 건곤무적장만 줄곧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유한백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련하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나중에 물어보겠지. 그나저나 나도 곧 뇌력을 얻으러 가야 하는데. 이번 학기가 끝나자마자 일단 형산부터 가야겠네.’
묵혼풍뢰검법의 풍결식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은 유한백이었다.
육신의 회복 속도를 보았을 때 형산의 영약과 뇌정을 흡수한다면 뇌력을 개방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유한백은 달려드는 관생들을 열심히 막아 내는 모용후와 월소청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좋아, 애송이들 주제에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네. 사형들이랑 몇 명 추려서 데려가면 충분히 형산의 비동을 뚫을 수 있겠어.’
지금 실력으로 형산의 비동에 설치된 기관을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키워 낸 사형들과 새로운 수하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비동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듯싶었다.
유한백이 일부러 모용후와 월소청을 끌고 온 이유도 이들의 실력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해라. 이번 학기 빡세게 굴려서 실력을 키워 주마.’
뒤에서 사악하게 웃고 있는 유한백의 계획은 모른 채 모용후와 월소청은 몰려드는 선배들을 치고 나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행정실로 올라가는 길목을 거구의 사내가 막아서는 것이었다.
“셋 중에 누가 유한백이냐. 앞으로 나와라.”
그는 바로 일도회의 부회주인 팽원묵이었다.
참룡 팽원후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서 유한백을 짓밟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수강 신청을 실패하게 된다면 강제적으로 퇴관을 당한다는 학칙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유한백은 앞을 가로막은 팽원묵을 슬며시 바라보다가 모용후와 월소청 앞으로 나서서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내 이름은 청성의 백무흔이다. 유 사제는 여기 없는데 왜 찾는 거냐.”
너무도 뻔뻔하게 나선 유한백을 보고 모용후와 월소청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팽원묵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한백을 쏘아보며 말했다.
“백무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유한백은 팽원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무명소졸이라 뭐 별거 없다. 그러니까 그냥 비켜 줘라. 빨리 신청서 내고 밥 먹으러 가게.”
팽원묵은 유한백의 말에 도를 휘두르며 말했다.
“이곳은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나 팽원묵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한백은 팽원묵의 말에 혀를 찼다.
‘귀찮네.’
그런데 그때였다.
팽원묵이 서 있는 복도 반대 방향에서 제갈소소 일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들 역시 다른 관생들을 제치고 오느라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유한백은 손가락을 들고 팽원묵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유 사제!”
유한백이 뒤를 향해 손을 흔들자 팽원묵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휘이익!
유한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팽원묵의 뒤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같이 있던 모용후와 월소청 역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유한백의 빈자리를 봤다.
팽원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성의 백무흔. 무명소졸인데다가 비열하기까지 한 소인배였군.”
그때 그 말을 들은 진짜 백무흔이 도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라 했나.”
팽원묵은 청성의 도복을 입은 백무흔을 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청성의 도복. 네가 바로 그놈인가 보구나.”
백무흔을 유한백으로 착각한 팽원묵은 대도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오늘 네놈을 일도회 부회주 팽원묵이 짓밟아 주마.”
쿠구구구구!
팽원묵의 몸에서 강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거대한 산이 이들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무흔은 그런 팽원묵의 기운에 맞서서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호오.’
자신의 기운에 짓눌리지 않고 맞서는 백무흔을 보며 팽원묵은 감탄을 했다.
유한백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의 대부분이 과장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그 기세가 사뭇 날카로웠던 것이었다.
‘청성파에서 도를 쓰는 도사라. 적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군.’
본래 도를 쓰는 사람들끼리는 이상하리만치 동질감을 느꼈다.
만병지왕이 검이라는 말에 밀려서 도는 만년 이인자 신세였기에 나름의 서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팽원묵은 검종으로 유명한 청성에서 도를 선택한 백무흔에게 일종의 동질감과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가 백무흔을 향해 말했다.
“선배된 입장에서 내가 삼초를 양보하…….”
삼초를 양보한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무흔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쩌어어엉!
팽원묵의 대도에 비해 백무흔의 유엽도는 크기가 작았지만 그 위력은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강렬했다.
지이이잉-
팽원묵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동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강하다.’
일합만으로도 백무흔의 강함을 직감한 팽원묵이었다.
백무흔은 팽원묵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이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