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다짜고짜 찾아와 갑자기 인사를 요구하는 대사형의 말에 유한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아, 그거구나. 알겠다.”
그는 옥피리를 허리띠에 꽂아 두고 적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 손을 쥐고 포권을 취할 자세를 잡았다.
적영은 유한백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려 하자 긴장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신룡무관을 뒤흔든 악동이라지만 사문의 법도는 엄한 것이었기에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적영을 비롯해 뒤에 있는 다른 적자 배들도 고개를 숙이려는 유한백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팔룡과 사흉을 쓰러뜨린 유한백을 자신들의 밑에 두고 위에서 움직인다면 졸업 전까지 신룡무관에서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한백이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뻐억!
적영의 턱을 유한백이 고개를 들면서 그대로 머리통으로 후려친 것이었다.
“커헉!”
방심한 채로 턱을 가격당한 적영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 있던 다른 적자 배들이 유한백을 보며 소리쳤다.
“유한백! 이놈!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사문의 법도가 두렵지도 않느냐!”
자못 엄한 목소리로 유한백에게 호통을 치는 이들이었다.
그러자 유한백이 허리띠에 꽂아 두었던 옥피리를 꺼내 들며 몸을 풀었다.
“새끼들이 가만히 있다가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을라고 기어 나온 모양인데.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어.”
유한백 뒤에 서 있던 조명환과 백무흔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미리 보고 온 듯 대사형 일행을 향해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옥피리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는 유한백을 보고 적영이 턱을 부여잡은 채 소리쳤다.
“네놈! 이 하극상을 본문에 알릴 것이다!”
“그러든가. 우리 장문인이라면 더 때려도 된다고 하실걸?”
애초에 벽풍자 장로 측 줄을 잡고 있던 이들이었다.
벽풍자의 급사 이후 연결되어 있던 세력들이 모두 와해된 상황에서 이들이 본문에 기댈 구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졸업의 시기가 왔지만 졸업을 하지 않고 유예하며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한백이 옥피리를 들고 천천히 이들에게 다가갔다.
“거지 같은 것들이 어디서 되도 않는 꼰대질을 할라고 X랄 발광이야. 일단 일루 와. 맞자. 맞다 보면 너희들의 잘못을 스스로 반성할 수 있을 거다.”
그가 앞으로 달려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휘이익!
옥피리가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적영의 머리통 위로 떨어졌다.
“크윽!”
그가 차고 있던 검을 빠르게 뽑아 들어 유한백의 옥피리를 막아 냈다.
파칭!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구파일방의 일원인 청성파의 대제자인 만큼 검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뒤로 물러난 그가 유한백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청성파 적자 배의 대제자 적영, 삼대제자의 대표로 사제인 유한백의 하극상에 대해 합당한 처벌을 내리노라!”
동시에 그가 청운적하검을 펼치며 유한백을 향해 내달렸다.
우우웅!
적영의 검에서 노을빛 기운이 솟구쳤다.
검기의 형태를 띠지 않은 희미한 기운만이 안개처럼 그의 검을 휘감았다.
이를 본 유한백이 혀를 찼다.
‘검 끝이 흐물흐물하네. 여기서 아주 편하게 있었구만.’
후기지수들의 평균적인 실력을 보자면 적영의 성취가 낮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정도로 유한백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하아아앗!”
적영은 기운을 최대한 끌어 올려 유한백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유한백이 비류보를 펼치며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나아갔다.
휘익!
순간 자신과의 거리를 좁힌 유한백의 동작에 적영이 당황했다.
그러자 검 끝이 머뭇거리면서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 틈에 유한백이 옥피리를 휘둘러 적영의 검을 쳐냈다.
차앙!
검을 타고 올라오는 강력한 기운에 손이 저릿할 정도였다.
‘크윽!’
적영의 기억 속의 유한백은 말더듬이에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끌려가 괴롭힘을 당하는 폐급 쓰레기였다.
그런 유한백이 신묘한 수법으로 자신의 틈을 파고들어 검을 쳐내니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검을 옆으로 쳐낸 유한백이 다시 몸을 움직여 적영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가 옥피리를 세워 적영의 명치를 그대로 찔렀다.
퍼억!
명치가 훤하게 열린 적영은 옥피리에 정통으로 맞자 숨이 순간 멎는 듯했다.
“커, 커헉!”
숨을 쉬지 못하면 호흡을 하지 못하고 내공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굳어지는 느낌에 적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춤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유한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휘익!
그의 안쪽 허벅지에 발차기를 날렸다.
퍼억!
다리 전체가 마비되는 느낌에 적영이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으!”
분명 자신의 몸이었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저앉은 적영을 향해 유한백이 악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옥피리를 들고 앞에 섰다.
“대사형이라 했지? 대사형답게 그럼 대표로 시원하게 맞아 보자.”
“자, 잠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피리가 잔상을 남기며 적영의 급소 곳곳으로 떨어졌다.
퍽! 퍽! 퍽! 퍽!
쉴 틈 없이 두들기는 유한백의 손놀림에 뒤에 서 있던 다른 적자 배의 인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 맙소사.’
‘사람을 저렇게 팰 수 있다니.’
‘저 자식은 밥만 먹고 사람만 팼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유한백의 구타를 보고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시진 정도가 지나자 적영의 얼굴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으어어어…….”
적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뭘 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제발 그만…….’
실컷 두들겨 팬 유한백이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뒤에 서 있는 다른 적자 배들을 보며 말했다.
“자, 그다음 누구야. 반항할 놈 있으면 빨리 나와.”
그제서야 이들은 유한백에게 사문의 법도나 기수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항 따위는 그대로 짓이겨 버리는 폭력 그 자체.
아무도 유한백에게 반항할 생각 따위는 품지 못했다.
탁! 탁! 탁!
피 묻은 옥피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는 소리만으로도 이들은 움찔하며 눈치를 봤다.
그러자 유한백이 악귀 같은 표정으로 이들을 보며 말했다.
“없어? 없으면…… 대가리 박아 새끼들아!”
유한백의 말에 적자 배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유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반항을 한다 이거지. 오냐, 내가 오늘 너희들 몸에 제대로 고통이 뭔지를 새겨 주마!”
“자, 잠깐!”
“끄아아악!”
그리고 한시진이 넘게 유한백의 구타는 이어졌다.
그 어마무시한 구타에 황룡관원들은 다시 한번 유한백에게 절대 덤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커흐윽.”
“크윽.”
유한백에게 실컷 구타당하고 앞마당에서 구른 대제자 일행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조명환이 다가갔다.
“이거라도 바르십시오. 좀 나을 겁니다.”
진무치네 광동진가에서 만든 금창약이었다.
현금이 없는 진무치가 현물로 대신한다면서 집에서 가져온 금창약을 왕창 내놓았기 때문에 황룡관에는 비싼 진가 금창약이 한가득 있었다.
적영을 비롯한 적자 배들은 서러워하며 조명환이 준 금창약을 발랐다.
어느 정도 서러움이 가시자 적영이 조명환에게 말했다.
“명환아, 아무리 청성이 벽풍자 장로님이 돌아가신 후로 개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느냐. 어찌 후배가 선배를 이런 식으로…….”
그의 말에 조명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대사형, 아직 못 들으셨군요. 한백이가 기수의 막내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좀 복잡합니다.”
“뭐? 그건 무슨 소리냐.”
“한백이는 과거의 청성제일검이었던 청운자 사조님의 심득을 이었습니다.”
조명환의 말에 적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처, 청운자 사조님의 심득을?”
“예, 정석대로 계산하자면 한백이의 배분이 장문인, 장로님들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문의 어른들도 한백이의 말을 존중하고 시키는 훈련도 모두 열심히 따르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적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설마 유한백이 시킨 훈련을 심자 배 사숙들께서 따랐다는 것이냐?”
“심자 배뿐만 아니라 운자 배까지도 참여하셨습니다. 덕분에 청성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유한백의 악귀 같은 훈련 때문에 서로의 결속력이 강해졌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적영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유한백이 청성을 손에 쥐었구나.’
이곳에서 유한백을 구슬린 다음 신룡무관에서 편하게 있다가 기회를 봐서 청성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전제부터 잘못된 셈이었다.
적영을 비롯해 다른 적자 배 일원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사실 이들은 벽풍자의 급사 이후 잡고 있던 줄을 놓치면서 청성에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해 신룡무관 내에서도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라면 벽풍자가 무림맹 장로가 되면서 이들 역시 신룡무관의 졸업생으로 맹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세가 연합을 선택한 뒤, 청성의 도복을 벗고 연합회의 회원으로 들어갔다.
청성에 돌아가 봐야 벽풍자 쪽 세력이 모두 축출당했을 테니 새로운 줄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연합을 통해 무림맹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세가 연합의 핵심은 주요 세가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파고들 틈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들 밑에서 따까리 취급이나 당하다가 운이 좋게 구석에 있는 지부 쪽으로 발령이나 나면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청성파의 유한백이 신룡무관을 뒤흔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면 한번 마지막 동아줄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황룡관에 온 것이었다.
막상 동아줄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거대한 범의 꼬리였고, 이들은 겁도 없이 이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적영이 조명환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명환아, 네가 유 사제에게 잘 말해서 우리도 황룡관에 머물 수 있도록 얘기를 좀 해주거라. 이대로라면 우리는 연합 세력에서도 축출당하고 청성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조명환은 얼굴이 부어터진 채 자신에게 매달리는 대제자 적영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무흔이 조명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형, 이전에 벽풍자 측 세력에 있던 이들입니다. 황룡관에 잘못 들였다가는 오히려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백무흔의 말에 적영이 미간을 그러모으며 소리쳤다.
“네 이놈! 난 지금 명환이와 얘기 중이다! 삼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막내 기수가 어딜 건방지게 나서는 것이냐!”
그런 적영의 반응에 백무흔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 보십시오. 이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분명 뒤통수를 칠 위인들입니다.”
조명환은 백무흔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자신이 섣불리 월소청 일행을 도와주려고 했다가 동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는 어설픈 동정심을 경계하는 법을 배웠다.
조명환이 고개를 돌리고 적영을 보며 말했다.
“대사형, 죄송하지만 백 사제 말대로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전의 유약했던 모습과 달리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는 조명환을 보며 적영과 적자 배 인원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적영이 조명환을 보며 윽박을 질렀다.
“명환이 이 녀석! 내가 청성에 있을 때 너를 어여삐 여겼던 것을 잊었더냐!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을…….”
그때 조명환과 백무흔 뒤에 목검을 들고 온 유한백의 모습이 보였다.
유한백을 본 순간 이들은 딸꾹질을 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짜식들이 잠깐 숨 좀 돌리랬더니 어디서 분탕질을 하고 있어. 뒤질래?”
적영은 유한백의 말에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럴 리가. 오해, 오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백무흔이 아니었다.
황룡관에 머무르고 싶다면서 조명환을 압박한 것을 그대로 고해바쳤다.
이를 들은 유한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룡관에 머물고 싶다고?”
그의 말에 적영 무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유한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흐음, 어디 보자. 잘 생각해 보면 방법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