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존강림-140화 (140/250)

140화

드드드드!

유한백과 옥설신녀를 태운 마차가 어딘가로 향했다.

마차의 창문이 모두 막혀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한백은 감만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재주가 있었다.

‘빙빙 돌고 있기는 하지만 밖으로 나간 게 아니네.’

신룡무관 밖으로 나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무신성 외곽을 돌다가 어딘가로 진입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한백은 마차가 들어온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었다.

‘흐음? 금역으로 들어왔잖아.’

신룡무관과 무림맹이 위치한 무신성은 오랫동안 무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이전에는 정의맹이나, 영웅맹, 백도맹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통점은 모두 이 무신성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무신성은 무림의 역사를 함께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 온 만큼 곳곳에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금역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세 군데의 금역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가 무림의 흉악한 죄인들을 가두는 만년옥이고 두 번째가 지독한 마병기(魔兵器)를 봉인해 둔 봉마고(封魔庫)였다.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연무곡(煙霧谷)이라 불리는 무신성 뒤편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골짜기였다.

사시사철 언제나 안개가 끼어 있기에 연무곡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산과 골짜기 전체가 고대의 진법에 휩싸여 있어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다 알려진 곳이었다.

청성의 금역보다 진법이 복잡한 데다가 규모까지 훨씬 커서 그 안에 발을 들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금역들이 무신성 내부와 주변에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흉흉한 소문이 많은 연무곡에 진입을 한 것이었다.

마차가 금역 안을 달리고 있음에도 유한백은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괴존 시절 연무곡에 들어가 그 안을 탐사한 뒤 지도를 그려 온 사람이 바로 자신과 신기자였기 때문이다.

‘연무곡 안쪽이 워낙 넓고 복잡하게 지형이 얽혀 있어서 사분지 일 정도밖에 못 알아내긴 했지만.’

유한백과 신기자는 연무곡에 들어가 진법으로 변해 버린 기괴한 숲속에서 역시나 기이하게 변해 버린 짐승들과 싸우며 열심히 영약 재료를 찾았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만승검왕이 유한백과 신기자가 만든 지도를 바탕으로 금역 안에 비밀 은신처를 만들어 둔 듯싶었다.

그때 유한백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잠깐, 비선당의 안가에 신기자가 만든 결계가 적용된 것도 그렇고. 혹시 이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런 알려지지 않은 금역 안에 몸을 숨기고 있을 수도?’

알려지지 않은 금역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다면 아무리 집요한 남궁성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테니 꽤나 타당한 추측이었다.

유한백은 신기자가 살아 있다면 몸을 숨기고 있을 금역 몇 군데를 추려 봤다.

아직은 그곳들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형산의 비동에 들어가 힘을 어느 정도 되찾고 나면 조사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가 여러 가지 상념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마차가 멈췄다.

드르륵!

마차가 열리자 바깥에서 변검용 가면을 쓴 이가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유한백이 마차에서 휙 내렸다.

‘흐음?’

마차에서 내린 유한백이 주변을 둘러보니 연무곡 안쪽 골짜기에 있던 천연 동굴인 듯싶었다.

동굴 안쪽을 개조해 은신처를 마련해 둔 것 같은데 그 규모가 유한백의 예상보다 컸다.

‘이 정도면 녹림의 웬만한 산채급인 듯싶은데?’

아무래도 단순한 은신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뒤이어 옥설신녀도 마차에서 내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가면을 쓴 이들이 짐칸에 실린 장이를 들것에 실었다.

“이쪽입니다.”

가면을 쓴 이가 유한백과 옥설신녀를 동굴 안쪽으로 안내했다.

야명주로 밝혀 놓은 내부를 보며 유한백은 이곳에 대해 한 가지를 더 기억해 냈다.

‘아, 여기 거기구나. 연무곡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안전지대.’

연무곡은 청성의 금역보다 훨씬 많은 진법들이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어서 처음 들어왔을 때 제대로 탐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유한백과 신기자는 겨우 길을 내서 이 동굴을 발견한 뒤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연무곡 곳곳에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지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곳을 중심으로 탐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이 천연 동굴은 처음으로 찾아낸 안전지대였기에 연무곡 입구까지 닿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을 뚫어서 외부에서 물자를 조달하는 중간 지대로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그곳을 더욱 크게 확장한 듯싶었다.

연무곡 초입에 존재하는 안전지대라고는 하나, 유한백과 신기자가 알아낸 길이 아니면 이곳까지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은신처로는 제격이었다.

가면 쓴 이를 따라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공동 안에 거의 마을 단위의 시설이 지어져 있었다.

유한백과 신기자가 사용했을 때는 잠시 몸을 뉠 움막과 수집한 재료들을 보관할 창고 몇 개가 전부였는데 몇십 년 만에 규모가 확연히 커진 셈이었다.

가면을 쓴 이는 두 사람을 건물 뒤편으로 안내했다.

콰콰콰콰!

놀랍게도 동굴 벽에 물이 흐르는 폭포가 있었고, 그 밑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가 존재했다.

실종되었다 알려진 만승검왕이 반듯하게 깎아 낸 돌을 의자 삼아 앉은 채 쏟아지는 폭포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나.”

만승검왕은 두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유한백은 만승검왕 쪽으로 다가갔다.

“멀쩡하신 걸 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만승검왕은 유한백의 말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마치 네놈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멀쩡하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의 말에 유한백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멀쩡하시긴 했겠지만 그랬다면 못 잡았겠죠? 밀밀령.”

유한백이 고개를 돌린 쪽에 포박된 장이와 함께 붙잡힌 박광철과 습격자가 제압된 채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혈도가 제압되었는지 움직이지 못한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만승검왕은 유한백의 말에 그가 잡아 온 장이를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네 말대로 되었다. 신룡무관에 뿌리박고 있던 간자를 결국 찾아냈구나.”

그가 유한백을 보며 말했다.

“이 건방진 놈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예, 꼭 한 가지만 물어보세요.”

만승검왕은 유한백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뒤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거냐.”

“뭘요.”

“말장난할 생각 말고.”

유한백은 만승검왕이 뭘 물어보는지 알고 있었다.

“밀밀령 놈들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냐는 거죠?”

만승검왕은 유한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백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뭐, 딱히 어려운 건 없었어요. 사천에서도 놈들은 결국 청성과 당문, 아미파를 싸움 붙이려고 했으니 여기서도 비슷하겠다 싶었죠.”

“나를 암살해서 싸움을 붙인다?”

“예, 놈들의 목적은 관주님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무림을 혼란케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삼십 년 전의 혈패천이 했던 방식 역시 이와 비슷했다.

그들은 무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란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그 분란들 사이에 그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무림은 언제나 싸움이 잦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작은 싸움들이 분쟁으로 번지고, 그 분쟁이 엮여서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정파와 사파, 마교, 새외무림이 얽히면서 복잡한 형국이 만들어졌다.

그 틈을 타서 혈패천은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갔다.

자신들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작은 이득을 위해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때 혈패천은 착실하게 목적을 수행해 나간 것이었다.

현재의 밀밀령이 하는 방식이 그와 거의 같았다.

학대원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느꼈기에 밀밀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유한백을 보며 말했다.

“놈들의 목적이 나의 죽음을 이용해 정사대전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읽었다는 말이냐.”

“뻔하죠. 신룡무관 관립 기념일에 갑자기 흑도맹의 사절을 부른다? 거기에 피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살인광 새끼가 끼어 있다? 이건 대놓고 사고 치라는 소리 아닙니까.”

유한백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만승검왕이 빙천독의 중독을 연기할 때 바른 푸른 안료였다.

“그놈이 저를 습격할 때 빙천독을 쓴 게 결정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독은 정파 쪽에서는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쓰는 순간 사파가 곧바로 특정되기 십상이죠. 특히나 청살문은 극독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놈들이 일부러 흑도맹의 사절에 청살문의 소가주를 끼워 넣고 빙천독으로 나를 음독시켜 누명을 씌우려고 준비를 했다는 말이군.”

“네, 그래서 관주님한테 얘기한 거예요 빙천독에 중독된 척하고 쓰러지라고. 그럼 놈들이 당황을 할 테니까 그때 반응이 이상한 놈들을 찾은 다음에 거꾸로 올라가면서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간단하다는 듯 말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은 계획이었다.

단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모두 어그러지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한백은 이런 함정을 수없이 실행해 본 것처럼 과감하게 만승검왕을 미끼로 삼아 밀밀령의 흔적들을 찾아냈다.

만승검왕은 묶여 있는 종남일검 박광철과 장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놈들이 간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유한백은 역시나 어렵지 않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대답했다.

“신룡무관에 퍼진 마약을 역추적했어요. 팔룡 중 이인인 태룡과 철룡은 물론이고 암암리에 중독 상태에 빠져 있는 놈들이 많더군요.”

유한백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이를 만승검왕에게 넘겼다.

만승검왕이 주머니를 열어 보자 마른풀이 가득했다.

“철룡이랑 태룡에게서 알아낸 정보로 역추적해 보니 결국 박광철이 진정초라는 최면 유도성 마약을 퍼뜨렸다고 나오더라고요. 저 장이라는 놈은 그 마약을 신룡무관 내부에 은밀히 유통시킨 역할이었고. 저놈들을 털어 보면 아마 밀밀령의 흔적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만승검왕은 유한백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비선당은 물론 자신 역시 밀밀령의 간자들을 잡기 위해 온갖 수를 강구했었다.

하지만 어디서 정보가 새는지 그들의 실마리를 잡기 직전에 번번이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설마 종남파를 대표하는 검수인 박광철이 놈들의 간자일 것이라고는 만승검왕 역시 생각지 못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편린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멍청한 놈. 유명하다고 간자 아니고, 명문정파 출신이라고 간자 아니면 세상 누가 간자라는 거냐. 의심을 할 거면 일단 터놓고 다 의심해야지. 쯧쯧.]

혈패천과의 싸움에서 유일하게 놈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함정을 파서 기가 막히게 간자들을 잡아내던 별종.

만승검왕은 유한백을 보니 과거 괴존의 괴랄하면서도 경이로웠던 모습이 떠올랐다.

만승검왕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한백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잘생긴 얼굴 처음 봅니까? 자꾸 보면 닳아요.”

입만 열면 열받게 하는 말본새까지 닮아서 만승검왕은 더욱 짜증이 났다.

그가 돌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유한백에게 손짓했다.

“헛소리 말고 따라와라.”

휘익!

그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 절벽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를 본 유한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늙은 놈이 기운도 좋아.’

유한백은 마찬가지로 몸을 날려 만승검왕을 뒤따랐다.

절벽을 넘어서니 뒤쪽으로 연결된 또 다른 공동이 나타났다.

유한백은 곳곳에 단단한 벽들이 부서져 있는 흔적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햐, 이거 내가 예전에 일일이 주먹으로 깨서 만들었었는데.’

최대한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 영초들을 옮겨 심기 위해 이곳을 다듬었던 기억이 났다.

과거에 빠져 있던 유한백의 귀를 울리는 호통 소리가 들렸다.

“뭣 하는 거냐!”

만승검왕의 호통에 유한백이 상념에서 벗어난 뒤 공동 안쪽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전에는 텃밭으로 썼던 공간이 깨끗하게 다듬어진 연무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 연무장 한가운데 만승검왕이 서 있었다.

그가 지팡이에서 검을 슥 뽑아 들더니 유한백에게 휙 던졌다.

유한백이 검을 잡은 순간 앞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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