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악양 동정호 맞은편에 있는 고급 기루인 구월루의 특실에 흑혈문의 문주인 방원강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X발, 이게 뭔 일이냐.’
그가 긴장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오문 쪽에서 따로 연락이 와서 이번 모임을 주최했기 때문이다.
하오문은 흑도맹 소속은 아니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특히 하오문 소속 흑조대에게 잘못 찍히면 평생 뒷세계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하오문의 흑조대 쪽에서 직접 연락을 해왔으니 방원강으로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오늘 모임에 참석하는 쪽이었다.
‘유가장과 천일문이라.’
흑혈문의 문주인 방원강 역시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천일문주인 갈호광과 유가장주인 유소홍이 그에게 큰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흑도맹 쪽에 줄을 대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갈호광과 유소홍이 아닌 다른 인물이 유가장과 천일문의 주인이랍시고 나타나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이상한 일에 엮이게 된 것은 아니겠지.’
여전히 긴장을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특실의 문이 열렸다.
드르르륵!
방원강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쪽으로 몇 명의 인물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검은 정복을 입고 화려한 검을 허리춤에 찬 성질 더럽게 생긴 젊은 사내가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들어왔다.
“그쪽이 흑혈문주요?”
검은 정복을 입은 사내, 그는 바로 청성의 도복을 벗은 유한백이었다.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에 방원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만…….”
“뭐 소개는 차차하고. 일단 앉자고.”
유한백이 털썩 자리에 앉자 방원강 역시 엉거주춤 착석을 했다.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듯 유한백을 힐끔힐끔 볼 뿐이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시비들이 화려하게 차려진 술상을 가지고 왔다.
뒤이어서 아름다운 기녀들이 들어오려 하자 유한백이 손짓했다.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다 나가 있어.”
구월루 같은 고급 기루의 기녀들은 부르고 싶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흑혈문의 문주인 방원강조차도 만약 하오문의 초청이 아니었다면 특실에서 기녀들의 대접을 받을 호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뒷배가 있길래 저런 권력을…….’
점점 유한백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방원강이었다.
그러자 유한백이 앞에 있는 술병을 통째로 들고 단숨에 들이켜는 것이었다.
“후우! 술이 좀 들어가 줘야 혀가 돌아가지. 안 그렇소 문주?”
기세 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흑혈문주는 유한백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요. 헌데…… 소협께서 어찌 저를 보자고 하신…….”
“하하! 흑혈문주께서 참 성격이 급하시군. 뭐, 서로 바쁜 사람들이니 그럼 일 얘기 먼저 합시다.”
그러더니 유한백이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미 들으셨나 모르겠소만, 내가 바로 유가장의 주인이오.”
그 말에 방원강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 혹여 유가장주인 유소홍 대인과 어떤 사이인지……?”
그의 말에 유한백이 인상을 쓰더니 살기를 내뿜었다.
츠츠츠츠!
초절정고수급인 유한백이 살기를 일으키자 방원강은 마치 온몸이 날카로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 빌어먹을. 어린놈이 엄청난 무공 고수였잖아.’
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위를 지닌 고수일 줄을 몰랐다.
유한백이 방원강을 보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유가장은 원래 내 것이오. 내가 일이 있어서 잠시 숙부에게 맡겨 뒀을 뿐이지.”
방원강은 유한백의 말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셨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유한백이 다시 살기를 거두어들이자 방원강은 겨우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유한백은 그런 방원강을 보며 말했다.
“숙부께서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사촌 동생인 한기 역시 아직 흑천성에서 배울 것이 많으니 본래 주인인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소. 유가장이 이제야 본래 주인을 찾은 것이지. 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짓는 유한백의 반응에 방원강 역시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유한백이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더니 방원강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숙부께서 천일문주와 함께 문주님과 진행하던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만.”
방원강은 유한백의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것이. 별것은 아니옵고 유가장과 천일문이 장사 지역으로 확장을 하기 위해 흑도맹의 간부들을 소개해 달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유한백은 방원강의 말에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랬었군. 장사로의 진출이라. 내가 나선다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유한백의 말에 방원강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정도의 고수가 직접 나선다면 유가장의 재력과 천일문의 영향력으로 흑도방파를 규합해 장사를 손에 넣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젠장, 갈호광과 유소홍. 이 자식들이 이런 패를 뒤에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유한백과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방원강은 속으로 이를 갈 뿐이었다.
그때 유한백이 방원강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문주께서 흑도맹의 간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계신 모양이오.”
방원강은 유한백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 선대부터 악양에서 일을 해온 터라 흑도맹과 인연을 맺어 온 부분이 있습니다.”
“호오, 그렇군. 악양 토박이셨구려. 그럼 혹시 장강수로채와도 인연이 있소?”
유한백의 말에 방원강의 눈동자가 커졌다.
“장강수로채라 하심은…….”
“뭘 놀라고 그러시오? 장강수로십팔채를 다스리는 수룡채의 수룡왕. 그쪽과의 인연이 혹시 있나 묻는 것이오.”
수룡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방원강이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쪽에 계속 있다 보니 아예 인연이 없다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아하, 그거 아주 잘됐구만.”
동시에 유한백이 방원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흑혈문주, 내 말 잘 들으시오. 나는 흑도맹에서 특수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왔소.』
유한백의 전음에 방원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특수 임무라고?’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한백의 전음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사실 지금 정파 쪽에서 청성괴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소.』
그의 말에 방원강이 숨을 들이켰다.
‘처, 청성괴협? 설마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왕귀를 조져 놨던…….’
수왕귀뿐만 아니라 백골채주와 혈루채주까지 같이 관에 붙잡혀 들어가면서 청성괴협이라는 별호가 강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동시에 방원강이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청성괴협은 무림맹 쪽 인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말했잖소 특수 임무로 파견된 것이라고. 청성과 신룡무관에 잠입하여 정보를 빼내고 이제 다시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와 정식 임무를 맡은 것이오.』
유한백의 말을 들은 방원강은 워낙 황당한 이야기라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유한백이 방원강을 보며 말했다.
“문주가 쉽게 믿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증거가 있지.”
유한백이 품에서 흑월이 그려진 패 하나를 꺼냈다.
‘이건 설마 흑월패?’
흑월패는 흑월문의 직계나 중요한 인사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흑도팔문의 일원인 흑월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 고수라면 앞으로 흑도맹에서 가질 위치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방원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유한백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나으리! 앞선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귀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유한백은 그런 방원강을 보고서는 씨익 웃었다.
‘월 소저에게서 흑월패를 빌려 오길 잘했네.’
그는 쐐기를 박기 위해 방원강에게 전음을 날렸다.
『문주, 혹시 수룡왕이 마교 쪽에서 흘러 들어온 인물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본 적 있소이까.』
유한백의 전음에 놀란 방원강이 침을 삼키다가 사례가 들려 기침을 했다.
“켈록! 켈록!”
한참을 기침하다가 겨우 진정한 방원강이 굳어진 얼굴로 유한백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그,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의혹일 뿐이지만 상부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소. 수룡왕을 떠보기 위해 내가 정파의 협객으로 위장하여 그들의 수하들을 격파한 것이지. 몇 명을 심문해 보니 의혹이 더욱 가중되더이다.』
방원강은 유한백의 말에 눈동자를 빠르게 이리저리 굴렸다.
‘제, 젠장. 골치 아픈 일에 엮인 거 아닌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흑도맹의 윗선과 연을 맺을 좋을 기회이기도 했다.
마음을 정한 방원강이 유한백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으리,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유한백은 그런 방원강의 말에 만족한 듯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주 든든하군. 좋소. 그럼 문주에게 한 가지 부탁 좀 합시다.”
그가 방원강에게 다시 전음을 날렸다.
『수룡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악양에 소문을 좀 내주시오. 청성괴협 유한백이 신룡무관의 기재들을 데리고 마교 쪽으로 전향을 하기 위해 악양에 왔다고 말이오.』
유한백의 말에 방원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 마교로 전향 말입니까?』
『수룡왕이 진짜 마교 쪽 인물이라면 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겠지. 아니 그렇소?』
방원강은 유한백의 말에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자신이 파악하기에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좋소. 내 흑혈문주만 믿도록 하지. 흑도맹의 장로이자, 흑월문의 총관이신 독갈뇌옹 어르신께 문주의 이야기를 잘 해놓겠소.”
흑도맹의 실세 중 하나인 독갈뇌옹의 이름이 나오자 방원강은 더욱 유한백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으리만 믿겠습니다.”
방원강이 특실에서 나가자 뒤에서 숨어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하오문 흑조대원인 이무량과 3조 조장인 오산화였다.
평소에는 왕삼이라는 이름으로 황룡관의 일꾼으로 위장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다시 흑조대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한백은 앞에 있는 술상 위의 음식을 열심히 집어 먹으며 이무량에게 말했다.
“왕삼아, 가서 저 새끼 제대로 하는지 감시해라. 이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얘기하고.”
이무량은 유한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다시 기척을 감추며 사라졌다.
그때 남아 있던 오산화가 유한백을 보며 말했다.
“유 소협,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이지만 설마 진짜로 흑도맹 쪽으로 전향하려는 건 아니시죠?”
유한백이 평소에 하는 짓으로 봐서는 흑도맹 쪽으로 가면 대환영을 받을 것 같다고 생각한 오산화였다.
정파의 이름을 가지고도 고혈을 쥐어짜는 악귀 같은 짓을 서슴없이 하는데, 진짜 흑도 쪽으로 전향하면 어떤 마두가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유한백은 잘 익은 육전 하나를 날름 먹으며 오산화에게 말했다.
“사파? 내가 왜 거길 가. 그 새끼들은 죄다 수배자들이라서 자기네 영역 밖으로 못 나가. 그 말은 자유롭게 풍류를 즐길 수도 없고 맛집도 못 간다는 소리지. 너네도 음지에서 일하니까 떳떳하게 얼굴 못 내밀고 다니잖아.”
유한백의 말에 오산화가 울컥하며 말했다.
“저, 저희는 음지에서 일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첩보 조직의 특성상…….”
“개방은 첩보 조직 아니냐? 거기는 대놓고 동냥 그릇 들고 다니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오산화는 유한백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약 올라.’
오산화가 유한백의 대답에 부들부들 떠는 동안 어느새 술상의 음식들이 죄다 비어 버렸다.
유한백이 빈 그릇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음식 맛있네. 가서 상 좀 더 봐 오라고 해. 어차피 하오문이 차려 주는 거니까 실컷 먹어야지. 갈 때 좀 싸 주는 것도 잊지 말고. 흐흐흐.”
오산화는 유한백과의 거래 내용 중에 유명 관광지에 있는 식당과 객잔을 공짜로 이용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욕했다.
속 타는 오산화의 마음도 모르고 하오문의 기둥을 뽑아 버리겠다는 기세로 술과 음식을 먹어 치우는 유한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