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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독식 (16)화 (16/200)

기연독식 (16)

“조장님! 나오셨습니까!”

“조장님! 안녕하십니까!”

“도조장, 일찍 나왔군.”

도통달이 1층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건달들이 앞다퉈 인사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왕칠 덕분에 벼락출세한 애송이로 보더니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만화루 현장에 있던 건달들의 변화는 더 극적이었다. 인사를 할 때 허리가 더 굽혀졌고 조장들의 고개도 숙여질 정도였다.

힘이 곧 법인 흑사회의 본질이 여실히 드러났다.

“조장님! 한장로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백동이 기분 좋은 얼굴로 기별을 알렸다. 장로쯤 되는 고위층이 조장에게 용건이 있으면 본부로 부르지 이처럼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오, 역시 도조장님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

“네가 만화루에서 도조장님 실력을 봤어야 해. 무림에 나가도 고수 소리 들을걸?”

그런 수군거림을 뒤로 하고 도통달은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도통달을 맞는 한동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어제 싸움이 힘들었을 텐데 오늘 하루 쉬지 그랬나?”

“해가 똥구멍에 뜰 때까지 잤으니 됐습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잘 됐군요.”

도통달은 품에서 한지로 만든 봉투를 꺼냈다.

“이거 며느님 베개에 넣어 두세요.”

도통달은 ‘방사할 때 쓰는 베개면 더욱 좋고요.’라는 속삭임을 덧붙였다.

“이…… 이게 뭔가?”

“부적입니다. 재료가 여간 귀하지 않아서 고생 좀 했습니다.”

“오오! 그럼 이제 우리 대를 이을 수 있는 건가?”

“사람이야 정성을 다하는 거고 점지야 하늘이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그래도 효험은 있을 겁니다. 아들 내외에게 좋은 거 많이 먹고 부정 타는 짓 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십시오. 그러면 두 달쯤 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흑룡회의 습격이 있고 두 달 후에 한동산이 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났다.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며 입이 귀에 걸렸던 한동산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두…… 두 달? 흐흐흐…… 자네 말이니 틀림없겠지. 고맙네, 정말 고마워.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보게. 안 그래도 회주가 자네에게 포상을 내리라고 하더군.”

“회주님 성격에 포상이 크지는 않을 텐데요?”

“에휴―! 그 양반 옆에 있으면 내가 항주에 사는지 바닷가에 사는지 구분이 안 된다니까. 아주 짠 내가 풀풀 나. 그래도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들어줄 테니까.”

“그럼 이번에 싸우다 다친 식구들한테 위로금이나 좀 주세요.”

“응?”

“적호회를 지키려다 다친 거니 보상받을 자격 있잖아요.”

건달들이야 싸우다 다치는 게 다반사고 치료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감지덕지였다.

“자네 건?”

“사지 멀쩡한 게 보상이죠. 전 됐습니다.”

지금은 푼돈 받는 것보다 적호회 건달 인심 얻는 게 백 배 이익이었다.

도통달은 계산을 끝낸 것인데 한동산은 감동했다.

한동산은 ‘흑사회에 있기에는 아까운 놈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리 하도록 하지. 그리고 어젯밤에 자네와 함께 왔던 친구 말일세.”

“장대협이요?”

“왕지부장 말로는 적호회 식구가 아니라 자네 친우라고 하던데.”

장유섬이 정식으로 입회를 하지 않았으니 적호회 식구라고 하긴 애매했다.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회주가 그 친구를 탐내는 것 같던데.”

“장대협을요?”

“자기 직속으로 들일 모양이야. 얘기를 듣자 하니 자네보다 강하다고 하던데.”

“무림에 나가도 일류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죠. 그런데 장대협이 회주 밑으로 가지는 않을걸요. 괜한 망신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망신이라니?”

“개가 호랑이한테 밑으로 들어오라면 듣는 호랑이 기분이 좋겠습니까?”

*    *    *

적호회의 회주가 찾는다고 해서 왔다. 그래도 도통달이 속한 흑사회의 우두머리이니 얼굴은 보여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제가 일하는 곳이고, 지금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시간과 자리 모두 적당하지 않군요. 그럼 이만.”

장유섬이 돌아서려는데 조치운과 함께 온 황선중이 말했다.

“그게 걸리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넨 오늘 천상루를 떠나게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회주님께서 본부에 아주 좋은 자리를 마련해 두셨네. 알아보니 입회식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적호회 식구나 마찬가지더군. 자네처럼 능력 있는 친구를 고작 이런 곳에서 썩힐 수는 없지.”

“난 이곳이 좋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친구로군. 우리와 함께 본부로 가면 으리으리한 집에서 매일 이런 술집에 손님으로 올 수 있어. 자네가 모르는 극락이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그리 극락 같지 않군요.”

돌아서는 장유섬에게 황선중이 말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조직에는 위계라는 게 있네. 회주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적호회에 머물 수 있을 것 같나?”

“아까 본인 입으로 얘기를 했듯 난 입회식을 하지 않았소. 당신들은 내 존재도 몰랐고. 이제 와서 날 데려가겠다고? 그대들 눈에는 내가 손짓하면 꼬리치며 달려가는 개새끼처럼 보이나?”

“이런 건방진 자를 봤나! 지금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실력이 있다고 해 회주님께서 친히 오셨으면 바닥에 코가 닿도록 절을 해야 마땅한데 건방진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황선중은 사실 조치운이 장유섬을 데려오려는 게 내심 기분 나빴다.

적호회에서 고수로 대접받는 사람은 그 하나로 족했다. 그 명예를 장유섬과 나누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차에 장유섬이 건방지게 나오니 쾌재를 부르면서 나선 것이다. 물론 싸운다면 이길 자신도 있었다.

원래 무공 실력이란 구경한 자에 의해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장유섬이 소문처럼 고수라면 고작 기루나 지키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장유섬의 물음은 짧았다. 황선중이 조치운에게 말했다.

“오늘 저 건방진 놈을 그냥 둔다면 회주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조치운도 황선중이 굳이 싸우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 장유섬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싸우면서 정드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살살 하게.”

조치운은 장유섬이 황선중 정도만 강해도 만족이었다.

‘좌청룡 우백호면 짝도 맞잖아.’

“당장 밖으로 나가자!”

황선중의 높은 목소리에 비해 대꾸하는 장유섬의 음성은 낮았다.

“당신 상대로 굳이 나갈 필요는 없지.”

“뭐야? 이런 건방진 놈!”

45년을 살아오며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황선중은 장유섬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작 여섯 자 거리였기에 주먹이 장유섬의 얼굴에 닿는 건 순간이었다.

‘선방 필승이다! 개자식아!’

쩍!

황선중은 분명 장유섬의 얼굴을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을 느낀 건 자신이었다.

세상이 빙글 돌아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끝내 의문을 풀지 못하고 기절했다. 단 한 방으로 황선중을 제압한 장유섬의 시선이 조치운에게 향했다.

“당신은?”

“험!”

조치운은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흑사회 회주가 기루에서 함부로 싸울 수는 없지.”

장유섬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도조장을 보고 흑사회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    *    *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치운이 입단속을 시키기는 했으나 몇몇의 귀에는 회주와 황선중이 천상루에서 당한 망신이 들어왔다.

왕칠도 어쩌다 보니 그 소식을 들었다.

“하아―! 좀 참지. 황호법은 몰라도 회주 체면이 많이 상했을 텐데.”

조진호가 말했다.

“회주님이 가만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왕칠이 도통달을 슬쩍 봤는데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통달이 넌 걱정도 안 되냐?”

“누굴 걱정해야 하는데요?”

“누군 누구야 장대협이지.”

도통달이 피식 웃었다.

“회주가 뭘 할 수 있는데요?”

“그야…… 그러게?”

적호회 건달 전부를 끌고 간다면 모를까, 장유섬은 조치운이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진호가 말했다.

“너나 형님한테 불똥이 떨어질 수도 있지.”

“지금 이 시기에요? 적호회를 흑룡회 아가리에 떠먹이는 꼴이죠.”

조치운으로서는 고수 한 명이 아쉬운 마당이다. 다른 건 몰라도 셈은 빠른 조치운이 적호회를 수렁에 빠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전 구역 한 바퀴 돌고 장대협 좀 만나고 오겠습니다.”

이번 일로 가장 마음을 쓰는 사람은, 어쩌면 장유섬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역시 도통달을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제가 그냥 참았어야 했는데.”

“잘하셨습니다.”

“네?”

“제가 처음 장대협을 모셔올 때 했던 약속은, 우리 계약이 끝날 때까지 유효합니다. 장대협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솔직히 회주 따위가 장대협을 품을 깜냥이나 됩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더 부끄러워지네요. 그런데 우리 계약이 언제까지죠? 계약의 끝을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 항주의 밤을 일통하는 날이 되겠죠.”

장유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 정도 계획이 없었다면 애초에 장대협을 모셔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럼 좀 서운한데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데, 그 낙을 저 빼고 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뭐, 원하시면 더 계셔도 좋습니다. 저야 환영이죠.”

“항주를 일통하려면 먼저 적호회를 먹어야 할 텐데…….”

장유섬에게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늦어도 2년, 빠르면 1년 안에 가능할 겁니다.”

“도조장님은 다 계획이 있군요?”

“아직은 설익은 계획이죠. 근거 없이 자신감만 가득한.”

“도조장님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항주도 좁습니다.”

“그럼 중원의 밤을 일통할까요?”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밖에서 선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쟁반을 든 선혜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옅게 풍기는 차향이 좋았다.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오랜만에 장유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자 선혜민의 기분도 좋아졌다.

“도조장님을 만나는 것만으로 즐겁지.”

선혜민은 장난스럽게 장유섬을 흘겼다.

“이거 질투 나려고 하는데요?”

“어이구, 앞으로 장대협을 만나려면 밖에서 몰래 만나야겠습니다. 하하하!”

도통달은 차를 따르는 선혜민에게 말했다.

“혈색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도조장님 덕분이에요.”

“치료는 흑의가 했으니 인사도 그 양반이 받아야죠.”

“은자 세 냥이나 준 분은 도조장님이잖아요.”

“흑의는 비쌀 자격이 있습니다.”

도통달이 목소리를 낮췄다.

“두 분 비밀 지켜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지켜야죠. 뭔데 그러시죠?”

“사실 흑의는 원래 어의였습니다.”

잠시 도통달을 보던 장유섬이 ‘농담이죠?’라고 물었다.

“화류병이나 고치는 뒷골목 의원이 어의였다고 하니 당연히 믿기 힘들겠죠.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정말입니다.”

도통달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자금성에서 옥체를 보시던 분이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자금성에 있을 때 궁녀와 눈이 맞았다고 하더군요. 뭐, 그 뒷얘기는 자세히 안 들어도 익히 짐작이 가잖아요.”

자금성 안의 여자는 눈길 한 번 받지 못했어도 모두 황제의 여자다. 그런 여자와 정분이 났다면 목숨을 부지한 게 신기한 일이다.

장유섬이 물었다.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게 분명한데, 도조장님은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지금부터 약 10년 후쯤 밝혀져서 흑의는 한동안 술안주가 되었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장유섬과 선혜인은 꼬치꼬치 캐묻는 실례를 범하지 않았다.

“어의에게 치료를 받으시니 곧 나으실 겁니다.”

도통달이 굳이 흑의의 정체를 밝힌 건 선혜인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였다.

환자의 긍정적인 마음은 병을 치료하는 데 무엇보다 좋은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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