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독식 (41)
이제부터는 왕칠의 시간이다. 도통달이 난세에 필요한 영웅이라면 왕칠은 치세가 어울리는 현군이었다.
마음이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조진호가 옆에서 중심을 잡아 줬다. 조진호 때문에 없던 부회주 자리까지 생겼다.
일없이 밥만 축내던 일곱 명의 장로 중 세 명은 날아갔다. 당연히 왕칠을 지지했던 네 명만 남았다.
도통달은 적호회의 알짜배기인 남경지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장기전이 될 줄 알고 차지한 곳인데 빨리 끝나 버렸으니 뭉개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장유섬은 드디어 천상루를 떠났다. 천상루에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다리 병신이 된다는 건 왈짜패 사이에서는 유명한 소문이었다.
행패를 부리는 취객이 없으니 장유섬이 머물 이유도 사라졌다.
왕칠이 거의 사정하다시피 해서 장유섬은 적호회의 호법이 되었다. 웃긴 건 황선중도 여전히 호법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괘씸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목을 날릴 만큼 큰 잘못은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적호회 최고 고수였으니 있으면 도움은 될 것이다.
인사를 마치자 적호회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조광운으로 인해 피해를 본 상인들에게는 조치운의 부동산을 팔아서 변상을 해 줬다.
물론 집은 도통달의 차지였다.
도통달의 직책이 조정관이기는 했지만 한 달에 출근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치료하는 시간 외에는 하루 대부분을 무공 수련으로 보냈다. 남궁설린은 물론이고 도통달 본인조차 그처럼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할 줄은 몰랐다.
재능이 있으니 재미가 있고 그 재미가 다시 재능을 부르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아―!”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계절이 됐다. 천영일섬각을 두 시진이나 쉬지 않고 연마하던 도통달이 느닷없이 겉옷을 집어 들었다.
“장대협한테 가자.”
“왜요?”
남궁설린은 이제 가끔 묻기도 했다. 그리고 도통달은 선선히 대답해 줬다.
“비무 한 번 하려고.”
“저하고 하면 되잖아요.”
“넌 내 무공을 너무 잘 알잖아.”
무공을 파악해서 그 묘리를 도통달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남궁설린이었다.
장유섬의 집은 본부에서 가까웠기에 사람을 보내서 부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바쁘실 텐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요즘은 그저 밥만 축내는 한량입니다.”
장유섬은 칼집에 들어 있는 칼이었다. 사용할 일이 없으면 쓸모라고는 장식용뿐이었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대청에서 화로를 끼고 차를 마시는 선혜민이 보였다.
그녀의 병은 이제 거의 나아서 한 달에 한 번 흑의를 방문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서 오세요. 차 내올게요.”
선혜민이 안으로 들어가자 도통달이 장유섬에게 말했다.
“비무를 부탁하기 위해 왔습니다.”
장유섬이 활짝 웃었다.
“그동안 성취가 있었나 보군요.”
“변변찮습니다.”
“변변찮으면 절 찾아오실 분이 아니죠. 목도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장유섬이 굳이 날붙이를 들 필요는 없었다. 그사이 차가 나왔고 구경꾼인 남궁설린은 대청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선혜민이 차를 권했다.
“오라버니께서 용봉회에서 우승하셨다면서요? 많이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남궁설린은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도조정관님께서 오셔서 말씀해 주셨죠.”
선혜민은 ‘자기가 우승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라고 속삭였다.
차를 마시기 위해 가면을 벗은 남궁설린의 얼굴은 창백했다. 계속 쓰고 있다 보니 이젠 가면을 벗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목도를 가지고 나온 장유섬이 도통달과 오 장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하나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올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오네요. 내년 농사가 잘되려나 봐요.”
눈이 많이 오면 왜 농사가 잘되는지 남궁설린은 알지 못했다.
“도조정관님 팔은 좀 어때요?”
선혜민의 물음에 남궁설린은 도통달과 장유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조금씩 좋아지는 중이에요.”
도통달은 주먹을 쥐고 가슴까지 손을 올렸다. 딱 저기까지가 도통달이 팔을 구부릴 수 있는 한계였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게 다였는데, 그래서 남궁세가의 의원들이 지레 포기했었는데 장족의 발전이었다.
도통달이 먼저 움직였다. 앞차기가 목도에 막히자 몸을 빙글 돌려서 회풍각을 펼쳤다. 그의 발에 걸린 눈발이 진저리를 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조정관님이 완치되면 떠날 건가요?”
찻잔을 든 남궁설린의 손이 흠칫 떨렸다.
“주인님이 떠나라고 하면. 그게 애초의 약속이었으니까요.”
장유섬이 휘두른 목도가 도통달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역시 성격 어디 안 가서 장유섬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기약 없는 날이니 좀 더 편안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선혜인은 목도를 피하면서 몸을 핑그르르 돌려 반격하는 도통달을 봤다.
“이제 그를 편하게 대하라는 거예요. 함께한 시간도 꽤 됐잖아요.”
남궁설린이 쓰게 웃었다.
“전 그의 팔이고 그는 제 주인이에요. 편하게 느껴질 리가 없죠.”
“처음보다는 많이 편해진 것 같은데요?”
그렇기는 하다. 처음에는 한 발 뒤에서 걷는 것도, 아침에 세수를 시키는 것도, 밥을 먹이는 것도, 이불을 깔아 주는 것 모두 어색했다.
유일하게 도통달과 떨어질 수 있는 밤이 간절히 기다려지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그 모든 게 자연스러워졌다. 도통달을 향해 휘둘러지는 장유섬의 저 칼처럼.
“전 지금도 많이 미움받고 있을까요?”
남궁설린의 독백 같은 질문에 대한 선혜민의 답은 빨리 나왔다.
“아뇨.”
“하지만 주인님의 팔은 여전히 고장 나 있잖아요.”
“도조정관님이 소저를 미워하고 있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사람에게서 미움받는 건 밧줄로 온몸을 묶이는 것보다 불편한 일이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젠 도통달이 그녀를 그만 미워했으면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방법이 있어요?”
선혜민은 뒤쪽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목도를 피하는 도통달을 봤다. 비무는 꽤나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도조정관님 목욕은 어떻게 해요?”
“혼자 하죠.”
“팔을 못 쓰는데 어떻게 혼자 목욕을 해요?”
“그…… 그거야 저도 모르죠.”
“오늘은 소저가 목욕을 시켜 보세요.”
“네에?”
너무 큰 목소리를 내서 남궁설린은 황급히 자기 입을 가렸다.
“목욕을 시켜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누가 싫은 사람에게 몸을 맡기겠어요? 안 그래요?”
일리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목욕을 시키라니! 그것도 남자를!
남궁설린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못 해요.”
선혜민은 찻잔을 들며 장유섬과 마주 선 도통달을 힐끗 봤다. 비무가 끝난 모양이다.
“그럼 소저는 계속 모른 채로 지내야죠. 도조정관님이 소저를 싫어하는지 아닌지.”
도통달과 장유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청으로 왔다.
“대체 어떻게 수련을 시켰기에 짧은 시간에 이처럼 강해진 겁니까?”
남궁설린은 장유섬의 질문이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하느라 비무를 못 봤다는 말은 못 한다. 무슨 얘길 했냐고 물을 테고 그럼…….
남궁설린이 대답했다.
“X나게 했죠. 헙!”
건달들과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언어가 입에 붙어 버렸다.
“젠장!”
남궁설린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가면을 썼다. 도통달이 선혜민에게 물었다.
“오늘 내팔이 이상한데 무슨 얘길 하신 겁니까?”
“땀을 많이 흘렸으니 목욕을 해야 한다고요.”
남궁설린뿐 아니라 선혜민도 이상한 것 같았다. 목욕 소리에 뜨끔한 남궁설린이 벌떡 일어섰다.
“비무 마쳤으면 어서 가요!”
“야! 차 한 잔을 하고……!”
어찌나 빠른지 남궁설린은 이미 대문턱을 넘고 있었다.
“쟤가 왜 갑자기 폭주를……. 같이 가! 두 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통달은 허둥지둥 남궁설린을 따라갔다. 황당하기는 장유섬도 마찬가지였다.
“무공에 대해 차분히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무공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무공보다 중요한 거?”
선혜민은 도통달과 남궁설린이 사라진 빈 공간을 응시했다.
“두 사람 어울리지 않아요?”
“두 사람? 누구? 우리? 어울리지.”
“도조정관님하고 남궁소저요.”
“엥? 그건 아니지!”
“왜요?”
“남궁소저는 도조정관한테 원수나 다름없는데.”
“저렇게 붙어 다니는 원수 봤어요?”
“도조정관이 원수 갚느라 곁에 두고 있는 거잖아.”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 만들잖아요. 음식을 썩게도 하지만 꽃을 피우게도 하죠.”
머릿속으로 도통달과 남궁설린을 떠올린 장유섬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두 사람은 아니야! 더구나 도조정관한테는 연루주가 있잖아.”
“둘이 사귀어요?”
“글쎄. 딱 말로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거의 비슷한 것 같던데?”
“그래요? 흐음. 앞으로 재미있어지겠네. 과자를 준비해야겠어요. 흐흐흐…….”
* * *
책상에 쌓인 서류를 보고 도통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류가 부르르 떨리기는 했지만 날아가지는 않았다.
“이게 다 뭐냐?
도통달의 비서로 자리를 옮긴 장백동이 대답했다.
“조정관님이 해결해야 할 일이죠.”
“내가 무슨 해결사냐? 설사 해결사라고 해도 왜 이렇게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거야?”
“첫째, 조정관님이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렇고, 둘째 능력이 좋으시니 그렇고, 셋째 다른 조정관이 무능한 탓이 아닐까요?”
장백동 말을 들으니 딱히 불만을 가지기도 힘들었다. ‘매일 나오셨으면 일이 이렇게 쌓이지도 않았을 겁니다.’라는 장백동 말이 폐부를 찔렀다.
그렇다고 이 일을 모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다른 사람 줘.”
반을 뚝 잘라서 책상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집어 든 서류는 화령지부에서 온 것이었다.
“화령지부 도박장이 파산 직전이라고?”
누가 횡령을 하거나 사기를 당하지 않는 이상 도박장의 파산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거기 소문이 자자했죠.”
“소문?”
“엄청난 도박사가 와서 도박장 돈을 다 긁어 가고 있답니다.”
“도박장에서 돈을 잃어도 손님 돈이고 따도 손님이 따는 거잖아? 도박장은 자릿세만 받는 거고.”
“보통 그렇지만 도박장의 도박사가 직접 선수로 뛰는 곳도 있어요. 화령도박장이 그런 곳이죠.”
“도박장 소속 도박사가 손님한테 돈을 다 털렸다는 거군.”
“그렇죠.”
도통달이 인상을 와락 썼다.
“도박장이 휘청일 정도로 잃기 전에 그만하든가 내쫓았어야지!”
“어디 도박꾼의 마음이 그렇습니까? 본전 생각 때문에 계속 붙다가 계속 깨진 거죠.”
“그럼 문 닫아야지 왜 본부에 도움을 청해?”
“거기 도박장이 화령지부 수입의 반인데 쉽게 포기하겠어요?”
도통달은 그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알아서 하라고 해. 잠깐. 도박사란 말이지?”
도박사란 결국 얼마나 상대를 잘 읽느냐가 실력을 좌우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을 잘 감추는 것도 읽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심술법을 시험하기에 좋은 상대로군.’
도통달은 밀었던 서류를 당기며 말했다.
“내가 가 보지.”
표정 숨기는 게 직업인 자는 얼마나 자신을 잘 숨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
* * *
남궁설린은 데워 온 물을 기름 먹인 나무통에 부었다. 매일 하는 일인데 그날 얼굴에 닿는 수증기는 느낌이 달랐다.
―목욕을 시켜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누가 싫은 사람에게 몸을 맡기겠어요? 안 그래요?
선혜민의 말이 생각나자 얼굴이 물보다 뜨거워졌다. 목욕을 어떻게 하나 궁금한 적은 있지만 ‘알아서 하겠지.’라고 곧 잊어버렸었다.
드르륵―!
욕실 문이 열리고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도통달이 들어왔다. 움찔 놀라는 남궁설린에게 도통달이 말했다.
“다 됐어?”
“네? 네.”
도통달이 남궁설린에게 등을 보이고 팔을 약간 벌렸다. 도통달이 옆으로 벌일 수 있는 최대한이다.
남궁설린은 도통달의 윗옷을 벗겼다.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후 부쩍 탄탄해지고 넓어진 어깨가 드러났다.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