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독식 (45)
“어서 오시오.”
소태상이 일어서서 양상진을 맞이했다. 이십 년째 항주삼대흑사회 중 하나인 해랑회를 끌어오고 있는 양상진은, 사소한 움직임에도 관록이 묻어 나왔다.
“소회주께서 초대를 하시다니 이 양모 깜짝 놀랐소이다.”
“놀라시지 않게 앞으로는 자주 만납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대 관계인 두 흑사회 회주가 자주 만나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차나 마시자고 이 양모를 부르시지는 않았을 테고…….”
소태상은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모두 물렸다. 넓은 차루의 이 층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적호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표정에 변화가 없다는 건 양상진도 소태상이 만나자는 이유를 짐작한다는 뜻이다.
“적호회와 흑룡회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아무리 쉬쉬해도 비밀 새는 걸 막기 힘든 곳이 흑사회다.
“이번에는 적호회가 돈만 받고 물러났지만, 다음에도 과연 그럴까요? 이건 비단 우리 흑룡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삼대흑사회 중 적호회의 세력이 가장 약했었는데, 도통달이 등장한 후 힘의 추가 적호회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소회주께서 생각하신 게 있어서 이 양모를 부른 것 같구려.”
“이대로 시간만 보내면 머잖아 적호회가 이빨을 드러낼 겁니다.”
“이빨을 드러낸다는 건?”
“항주를 혼자 먹으려고 들겠죠. 이번 사건만 봐도 그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습니까?”
적호회는 기다렸다는 듯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흑룡회가 물러서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리 됐을 것이다.
“복안이 있으시오?”
“일단 우리 흑룡회와 귀하의 해랑회가 불가침 약속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합을 하자는 거요?”
“적호회로부터 우릴 지키려면 최선의 방법 아니겠습니까?”
양상진도 흑룡회보다 적호회가 훨씬 큰 위협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군요.”
“일단 이걸 출발점으로 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해 보죠.”
* * *
눈과 이마는 따뜻한 수건으로 덮였고 몸은 적당한 온수에 푹 잠겨 있다. 도통달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욕실 문이 열렸다. 욕실 밖은 남궁설린이 지키고 있으니 욕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그녀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나왔다.
“씻겨드리려고요.”
“응? 으응?”
도통달은 고개를 움직여서 얼굴의 수건을 치웠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가면을 쓴 남궁설린이 보였다.
“무슨 소리야?”
“팔 불편하니 목욕도 제대로 못 할 거 아니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야 그 생각을 했단 말이야?”
“어쨌든 씻겨드릴게요.”
“됐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씻겨 준다고요!”
욕조와 가까워진 남궁설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수증기가 짙기는 했지만, 욕조의 물은 맑았다. 당연히 물에 잠긴 도통달의 몸이 훤히 보였다.
피식 웃은 도통달이 말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무슨 목욕을 시키겠다고.”
“아…… 안 보고도 할 수 있어요.”
게걸음을 옮긴 그녀는 벽에 걸린 수건을 잡았다.
‘저거 요즘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도통달은 쭈뼛쭈뼛 움직이는 남궁설린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궁설린은 도통달의 그곳(?)이 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씻길 수 있는 자리에서는 모두 보였다. 단 한 군데도 사각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더듬더듬 수건에 물을 묻혔다. 그리고 도통달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푸우! 푸우! 언제까지 얼굴만 문지르고 있을 거야?”
더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을 닦는데 손이 맨살에 닿자 화들짝 놀라 수건을 놓쳐 버렸다.
물을 먹은 수건이 스르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린 남궁설린은 수건을 찾기 위해서 황급히 욕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잡았는데 수건이 아니라 다른 걸(?) 잡았다.
‘이건 뭐지?’
도통달이 속삭였다.
“그거 자꾸 주물럭거리면 커지는데.”
“으악―!”
철썩!
어쩌다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은 뺨을 때렸고 한 사람은 뺨을 맞았다.
“대체 왜 온 거야!”
“몰라요!”
도통달은 욕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는 남궁설린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그날이 왔다. 오고야 말았다. 완전범죄(?)를 위해 양수판도 천상루에 오기는 했지만 ‘난 능숙한 기녀가 좋아.’라면서 다른 기녀를 데리고 가 버렸다.
그래서 도통달과 자수영은 한 방에 놓여졌다. 방은 크고 깔끔했으며 침대에는 비단금침이 깔려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연자연은 천상루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방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도통달이 말했다.
“바닥에 이불 한 채 더 깔아. 공대인 눈만 속이면 되니 굳이 나하고 합방할 필요 없어.”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기녀라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마음에 없지 않은데요?”
“응?”
쟁반을 든 자수영이 도통달 곁에 앉았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자수영은 쟁반에 놓인 술병을 기울여 잔에 술을 따랐다.
“기녀라 아는 남자는 많아요. 그 많은 남자 중 제 첫날밤을 가졌으면 하는 남자가 도조정관님이라면 어쩌겠어요?”
“나야 영광이지.”
“그럼 그 영광을 가지세요.”
자수영이 술잔을 도통달 입으로 기울였다.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매달리지 않을게요. 매달리는 기녀만큼 추한 것도 없잖아요.”
“넌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예인이 될 거야.”
자수영이 천재인 건 분명하니 그 정도 말은 해 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중원 제일의 예인까지 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제 연주에 제가 만족할 정도면 충분해요.”
예인에게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었다.
“욕심꾸러기로군.”
“제가 욕심이 없었다면 오늘 밤 도조정관님을 차지했을까요?”
“내가 간택된 건가?”
* * *
“그 가면 벗지 그래요?”
연자연의 말에 남궁설린은 가면을 벗었다. 언제부턴가 머리를 밀지 않아서 더벅머리 총각의 그것 같았다.
“예쁘네요.”
“놀리지 마세요.”
연자연은 문을 봤다. 저 문 바깥에 복도가 있고 그 복도 너머에 도통달과 자수영의 방이 있다.
“지금 두 사람은 뭐 하고 있을까요?”
연자연의 태연한 얼굴이 속마음과 같은지 궁금했다.
“아무렇지 않으세요?”
남궁설린의 물음에 연자연은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그런 거짓말은 못 하죠.”
“그런데 왜 자수영의 상발을…… 그 사람에게 맡겼어요?”
남궁설린은 의식적으로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피했다.
“누군가 해야 할 거라면 도조정관이 가장 적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 남잔데요?”
연자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조정관이 정말 내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는 루주가 유일했으니까요.”
“지금뿐이죠. 긴 인생에 어찌 여자가 저 하나뿐이겠어요. 각오하고 있었으니 담담하게 받아들여야죠.”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
“집착을 버리면 생각보다 쉬워요. 도조정관은 제가 집착할 상대도 아니고요. 열두 살이나 많은 여자가 집착하면 추해요.”
남궁설린에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과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손님이었나요?”
“도조정관이 갓 흑사회 건달이 됐던 때였죠.”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까마득히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연자연은 도통달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얘기해 줬다.
“도조정관이 술병으로부터 날 보호하던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운명 같네요.”
“운명은 남궁소저 당신이죠.”
남궁설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운명이 아니라 악연이에요. 그는…… 그래요. 그냥 악연이죠.”
연자연은 남궁설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전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남궁소저는 어떤가요?”
“전…….”
대답을 하려던 남궁설린이 깜짝 놀랐다.
“제가 뭘요?”
“좋아하잖아요. 도조정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제가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해요!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연자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가 끊기자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남궁설린은 도통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고 연자연은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여인은 그 침묵의 바다에 한참 동안 함께 빠져 있었다.
“왜 사람들은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죠? 장대협은 무공으로 날 죽이려고 했고 선부인에게는 뺨을 맞았죠. 루주님은 절 독살시키려 했고요. 왕칠 회주님도 있군요. 현령은 그 사람이 말리지 않았으면 절 옥에 가뒀을 거예요.”
“한낱 건달일 뿐인데 이상하죠?”
“그러게요. 한낱 건달일 뿐인데.”
“오늘 수영이 같은 거예요.”
“네?”
“도조정관은 사람들이 가장 간절할 때 그걸 이뤄 줘요. 선심 쓰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죠. 어쩌면 자신을 위해 그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절박함에 귀 기울이죠.”
남궁철현이 가장 절박할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도 도통달이었다.
“도조정관의 특별한 재능일 수도 있죠. 그리고 함께 있다 보면 그냥 그 사람한테 빠지는 거예요. 비에 젖는 것처럼 젖어 들죠. 내가 말했잖아요. 남궁소저도 결국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남궁설린은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다. 지금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는 도통달이 괴로운 건 사실이니까.
연자연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 중에 도조정관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남궁소저일 거예요.”
“왜요?”
“기녀보다는 남궁세가의 여식이 어울리는 건 당연하잖아요?”
“전…… 그 이름을 버렸어요.”
연자연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 남자와 세 여인의 밤이 깊어 갔다.
* * *
“백음자객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양상진의 물음에 소태상이 흠칫 놀랐다.
“무림에서도 유명한 자객이 아닙니까? 무림의 일류고수들조차 벌벌 떤다는.”
흑사회 건달에게조차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백음자객의 명성은 자자했다.
“백음자객에게 의뢰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습니다.”
“네? 하지만 백음자객은 죽일 상대가 일류 고수가 아니면 의뢰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백음자객의 자객답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은자 삼백 냥. 그 이상이면 구대문파의 장로 정도의 위인이나 나라의 관리가 아니면 무조건 수락한다는군요.”
역시 자존심보다는 돈이다.
“적지 않은 금액이군요.”
“도통달을 처리하는데 비싼 값도 아니죠.”
도통달만 아니면 적호회는 그야말로 종이 호랑이였다.
“일을 진행하기로 하죠.”
* * *
남궁설린이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이는데 도통달의 턱으로 국물이 흘렀다.
“잘 좀 삼켜요. 칠칠치 못하게.”
“왜 잔소리야?”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잔소리 안 하게 생겼어요? 자요, 입 좀 크게 벌려요.”
도통달은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은 남궁설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뱉듯이 말했다.
“내 팔 그만둬.”
“네?”
“오늘부터 자유라고.”
“그…… 그게 무슨…….”
벌떡 일어선 도통달이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서 바깥쪽을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가. 이제 더 이상 내 팔 노릇할 필요 없어.”
“하…… 하지만 당신…… 아니, 주인님 팔이 아직 낫지 않았잖아요.”
“애초 약속은 내 팔의 상태가 아니었잖아. 내가 원할 때 넌 떠나는 거였고, 지금이 내가 원하는 때야.”
“이…… 이렇게 갑자기요?”
“왜? 계속 내 팔이 하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잘된 거지. 노자는 재주껏 마련해서 떠나.”
그 말을 한 도통달은 방을 나가 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단호해서 혹시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도통달은 그 길로 집을 나갔고 남궁설린은 남았다. 근 여덟 달 만에 처음으로 두 사람은 십 장 이상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