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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독식 (50)화 (50/200)

기연독식 (50)

도통달이 말하려는데 양수판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물을 수가 있어. 멋있잖아. 안 그래?”

도통달은 고성철에게서 받은 증거를 양수판 앞에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이걸 해 주세요.”

“응?”

“뭘 해 줄까? 라고 물었잖아요.”

“아니, 그건 그냥 말하다가…….”

“어쨌든 해 주세요.”

양수판의 짧은 한숨에 종이가 부르르 떨렸다.

“이건 뭔데?”

“항주의 삼대흑사회는 알고 계시죠? 그 중 흑룡회와 해랑회가 모의를 해서 절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예요.”

“엥? 흑사회 일을 관에게 맡기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들이 무림의 자객을 쓰지 않았다면 저도 관을 끌어들이지는 않겠죠.”

“무림의 자객을 썼다고?”

“그것도 일류자객이요. 두 흑사회가 자객에게 은자 삼백 냥을 줬다는 증거와 증언이에요. 이 정도면 잡아다 문초할 수 있는 거리로는 충분하겠죠?”

증거를 살펴보던 양수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다 족치는 거야 이거 반만 돼도 충분하지. 두 흑사회 회주를 잡을까?”

“뱀 머리는 단번에 끊어야죠. 포두와 포쾌는 제가 보내라는 자들을 보내십시오.”

“왜?”

“두 흑사회에게 돈을 안 받은 관원을 보내야죠. 언질이 들어가면 도망쳐 버릴 테니까요.”

양수판은 관원이 뇌물을 받고 있다는 말에도 그러려니 했다. 뇌물을 안 받는 관원이 이상한 세상이니 말이다.

“알았네. 내일 오전 중에 처리하기로 하지.”

“일 얘기는 이쯤 하고 오늘은 마음껏 마셔 볼까요?”

옆에서 술 시중만 들던 연자연이 말했다.

“현령님께 경사스러운 날이니 오늘 사기주는 제한 없이 풀겠습니다.”

“하하하! 입은 즐겁고 주머니는 가벼워지겠군!”

“북경에 가시면 두둑해지실 텐데 항주에서 많이 쓰고 가세요.”

“그러지! 이보게 도조정관! 오늘 사기주로 목욕을 해 버리자고! 수영이, 자수영 불러서 가야금 타라고 해! 품는 건 싫지만 예쁜 얼굴 보는 건 좋으니까!”

자수영까지 부른 흥겨운 밤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때까지 사기주를 마신 양수판은 먼저 방으로 갔다.

술을 즐기지 않는 도통달도 얼굴이 벌겋게 변할 정도로 마셨다. 그래도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루주, 우리도 갑시다.”

도통달을 따라 일어선 연자연이 물었다.

“저하고 함께 가시게요?”

그녀의 시선은 기대 가득한 눈빛의 자수영과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궁설린을 왕복했다.

남궁설린은 굳이 따라와서 이 불편한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좋은 일일수록 조강지처와 함께 나눠야죠.”

“조강지처라고요? 호호호! 그 말이 이렇게 듣기 좋은 이름인 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연자연은 방에 남아 있는 두 여인에게 입 모양만으로 ‘조강지처’를 만든 후 도통달과 함께 복도 맞은편 방으로 갔다.

가는 한숨을 쉰 자수영이 남궁설린에게 물었다.

“안 가세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흠칫 놀란 남궁설린이 대답했다.

“전 도조정관을 지켜야 해서요. 소저는요?”

“전 부르는 곳은 많고 갈 데는 없고 해서.”

그때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영아씨, 손님이 찾으시는데요.”

갈 데가 생겼다.

“다른 방에 들어가서 못 간다고 해.”

자수정이 싱긋 웃었다.

“손님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죠.”

“저는 괜찮은데…….”

“얼굴이 안 괜찮은데요?”

자수영은 술과 음식이 넉넉하게 남은 식탁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 술이나 마실까요?”

“전 도조정관을 지켜야 해서. 그리고 술은 마셔 본 적이 없어요.”

“네? 정말 술을 안 마셔 봤다고요? 몇 살이에요?”

“스물이요.”

“언니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뭐든 처음은 있는 거니까 오늘 한잔하세요. 어서 이리 오세요.”

자수영은 남궁설린을 억지로 자기 곁에 앉혔다.

“처음인데 좋은 술로 시작해야죠.”

그녀는 술잔 두 개에 사기주를 따랐다.

“우울한 기분 날리는 데 술만 한 게 없어요.”

“그리 우울하지 않은데…….”

“에이, 얼굴에 X나 우울함이라고 쓰여 있는데 뭘.”

자수영이 그렇게 말하니 우울한 것 같기도 했다. 남궁설린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자수영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남궁설린도 입술을 적셨는데 쓰기만 할 뿐 좋은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다 그렇게 말하고 결국 중독이 되더라고요.”

자수영이 식탁에 턱을 괴고 남궁설린을 물끄러미 봤다.

“언니, 참 예쁘다.”

“네? 항주 최고 미인이 그런 소릴 하면 욕이에요.”

“제가 예쁜 건 맞죠. 큭큭…… 하지만 언니는 저하고 다르게 예뻐요. 뭐랄까…… 당당하게 아름답다고 할까? 도조정관님이 좋아할 만해요.”

“그건 아니에요.”

남궁설린은 한 번 더 사기주 맛을 봤다. 약간 머금었는데 쓴맛 외에 묘한 향이 전해졌다.

“이러니까 좋아하는 마음은 표현을 해야 한다니까.”

“도조정관이 절 좋아하면 루주와 당당하게 잠자러 가겠어요?”

“네.”

자수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조정관님은 루주님을 좋아해도 저와 자러 갔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이…….”

“에이, 어쩔 수 없이 여자와 자는 남자는 없어요.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애정은 있는 거죠.”

시비가 또 자수영을 찾았지만, 이번에도 거절했다.

“정말 안 가도 돼요?”

“빚 다 갚아서 괜찮아요. 오늘은 연주할 기분도 아니고요.”

“아닌 척해도 도조정관과 루주가 자러 간 게 신경 쓰이는 거군요?”

“아뇨. 도조정관님이 말한 조강지처라는 말이 더 기분 나빠요.”

“조강지처는 늙은 여자라는 뜻 아닌가요?”

“네?”

“세상 조강지처는 대부분 나이 먹은 여자잖아요.”

“풉! 호호호! 언니 말이 맞아요!”

연거푸 술을 마신 자수영이 말했다.

“나 언니 마음에 들어요. 언니는요?”

이전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오늘 하는 짓은 귀여웠다.

“좋네요.”

“그럼 앞으로 저 미워하면 안 돼요.”

“내가 왜 소저를 미워하겠어요.”

“소저가 뭐예요? 그냥 수영이라고 부르세요, 언니.”

“그럴까?”

그날은 남궁설린과 자수영의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음 차례는 저하고 루주님이네요.”

“응?”

“언니가 도조정관님과 자러 가면 이 방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저하고 루주님이 되는 거죠. 큭큭!”

“마…… 말도 안 돼!”

*    *    *

왕칠이 도통달 사무실 문을 왈칵 열었다.

“네가 그런 거냐?”

“뭘요?”

“소태상과 양상진이 살인교사 혐의로 관아에 잡혀간 거 말이야!”

“네.”

“흑사회가 관의 힘을 빌려서 상대 흑사회 회주를 처리하면 어떻게 해?”

“먼저 불문율을 어긴 건 저들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죠.”

“그렇기야 하지만…….”

“형님은 애들 시켜서 소태상과 양상진이 왜 잡혀갔는지 소문이나 내 주세요.”

그들이 백음자객에게 청부를 한 게 알려지면 흑사회 회주로서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소문이야 내가 안 내도 어떻게든 나게 돼 있지. 저들이 먼저 불문율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린 흑사횐데…….”

왕칠은 관의 힘을 빌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님, 우린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첫째는 저들이 절 죽이려고 했건 말건 그냥 넘어가는 거죠. 마음씨 좋은 흑사회 소리는 듣겠군요.”

“그건 안 되지.”

“그럼 두 번째는 힘으로 응징하는 거죠. 물론 우리 전력으로 충분해요. 두 흑사회의 숫자가 월등히 많기는 하지만 우리한테는 장호법과 남궁설린 그리고 제가 있으니까 절대 질 리가 없죠. 대신 우리 애들 피도 많이 볼 겁니다. 우리 셋만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애들은 안 다치는 게 좋지.”

“그래서 제가 택한 방법이 세 번째였는데 마음에 안 들면 물리고요.”

“무…… 물리다니?”

“현령에게 풀어 주라고 하면 당장 풀어 줄 거예요.”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길 한 번 삐끗하지.”

“형님, 대의와 의리는 지킬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 지키는 거예요. 적이 늑대가 되었으면 우리도 승냥이가 돼야죠.”

“그럼 이제 우리가 가서 접수만 하면 되는 거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쪽도 그동안 나름 준비를 했을 테니까. 그래서 일단 소태상과 양상진을 만나 보려고요.”

“네가 조금만 긁어도 그자들 속 터져 죽을 거다.”

“그자들 만나 본 후에 어떻게 나갈지 결정하기로 하죠.”

*    *    *

“우릴 이렇게 몰아붙인 건 네놈이야! 그런데 이젠 관까지 이용해! 이 개자식아!”

소태상은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질러댔다. 도통달을 이길 자신만 있다면 당장 덤벼들었을 것이다.

“저기 간수님?”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간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네.”

“살인교사라면 중범죄인데 칼이라도 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태상이 그동안 여기저기 뇌물을 많이 뿌린 덕분에 간수들이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내가 현령님께 가서…….”

“다…… 당장 씌우겠습니다!”

“이 악독한 놈!”

소태상 뿐 아니라 옆방에 갇힌 양상진의 목에까지 칼이 씌워졌다.

“뭐 느끼는 거 없나요? 난 당신 목에 이런 칼 세 개를 씌울 수도 있고 사흘 내내 밥 한 끼 안 줄 수도 있어요. 살인교사면 살인에 버금가는데 그런 죄수 죽어 나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소태상은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도통달의 말이 맞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도통달에게 벌레 같은 존재일 뿐이다.

소태상의 눈에 서려 있던 독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원하는 게 뭐냐?”

상대를 무너뜨리면 표정 읽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들과 약속한 게 뭐였죠?”

“그…… 그들이라니?”

“간수 불러서 칼 하나 더 씌우게 할까요?”

본능적인 반항이었을 뿐 지속성은 없었다.

“적호회로부터 우릴 보호해 주면 수입의 5할을 주기로 했다.”

“적풍검문에게?”

넘겨짚었는데 소태상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해랑회는요?”

“흑하도문과 같은 계약을 맺었지.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적호회에게 구역을 빼앗겨 모두 잃느니 반이라도 챙기자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아무리 싸움이 힘들어도 무림문파는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흑사회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인간들.”

도통달은 감옥을 나가면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안 빗나가지? 그것도 신기한 일이야.”

*    *    *

황찬석은 이 만남이 여간 껄끄럽지 않았다.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도통달은 언제나 껄끄러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날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구려.”

차로 입가를 적신 도통달이 말했다.

“감옥에 가서 당신네 회주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도조정관이 보낸 그 감옥 말이군요.”

“무림의 자객을 써서 날 죽이려고 한 탓에 간 그 감옥이오.”

“난 아직도 왜 당신이 날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소.”

“황당주는 흑룡회가 적풍검문의 금고로 전락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거요?”

황찬석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금고라는 말이 심히 거슬렸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적호회에서 우릴 그리 만든 것이오. 정확히 말하면 도조정관 당신이지.”

“항주라는 도시의 역사가 몇 년인지 아시오?”

“내가 역사학자처럼 보이시오?”

“사실 나도 몰라요. 천 년, 이 천 년?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고. 그럼 항주에서 가장 오래된 흑사회인 해랑회는 몇 년이나 됐죠?”

“80년 정도죠.”

“80년 전에는 흑사회가 없었을까요?”

도통달이 뭘 얘기하려는지는 알겠다.

“흑사회에는 흑사회의 법칙이 있는 거죠. 정말 그 법칙을 무시하고 두 문파 아가리에 항주의 밤을 집어넣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이건 내 결정이 아니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죠.”

“한낱 당주인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적풍검문에 흑사회를 주기 싫으면 우리 적호회로 오면 되죠. 무림문파에 흑사회를 넘겨주는 게 옳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황당주 한 명만은 아닐 테니까.”

처음 소태상이 적풍검문과 손을 잡았을 때 내부에서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적호회와 결사항전을 해서 망하는 한이 있어도 무림문파에 흑룡회를 넘겨줄 수 없다는 간부들도 제법 되었다.

하지만 회주는 소태상이었고 결국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우두머리를 잃은 흑룡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적풍검문에 통째로 먹혀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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