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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독식 (75)화 (75/200)

기연독식 (75)

나무에 걸릴 만큼 낮게 깔린 먹구름이 기어코 비를 뿌렸다. 후두둑 내리던 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을 보기 힘들 정도의 장대비로 변했다.

숲길을 걷던 도통달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비가 오는군.”

“정말 네가 말한 대로네.”

“지금까지 내 말을 의심했던 거야?”

“의심한 게 아니라 전혀 믿지 않은 거지.”

“이제 조금만 가면 지강현이지?”

“저 산만 넘으면 돼.”

비 때문에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산은 멀리서 보기에도 제법 높았다.

도통달이 말했다.

“일단 쏟아지는 비는 피하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홀딱 젖었는데 이제 와서 피하긴 뭘 피해.”

남궁설린은 도통달의 의견을 무시하고 앞서 걸었다.

“젠장, 계집애가 체력도 좋다니까.”

도통달이 할 수 있는 건 투덜거림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강현에 면한 산을 중간쯤 오를 때 남궁설린이 갑자기 멈췄다.

“왜? 쉬어 가려고?”

그녀는 대답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요란한 빗소리를 뚫고 누군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기척이 들려왔다.

숲이 우거진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한 무리의 사내들이 도통달과 남궁설린을 발견하고 흠칫 멈췄다.

“누구냐!”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여섯 명은 흉흉한 기세로 무기부터 뽑았다. 그 모습을 본 남궁설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언제부터 화산파가 다짜고짜 검부터 빼 드는 무뢰배가 되었죠?”

가장 앞에 선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저는 뉘신지?”

“남궁세가의 남궁설린이에요.”

“아! 몰라뵙고 죄송합니다.”

구대문파의 수위를 다투는 화산파라고 해도 남궁세가의 여식에게 무례할 수는 없었다.

“원신방 인물에게 화산파 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와중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네? 화산파 제자가 원신방 방도에게 죽었다고요?”

“네. 무당파와 황보세가의 제자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사파 쪽에서는 원신방 뿐 아니라 북사도련과 청혈도문이 합세했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저희도 대략적인 정보만 듣고 가는 중이라.”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죠?”

“여기서 전력으로 달리면 일각 안에 당도할 겁니다. 그럼 저희는 급해서 이만.”

남궁설린은 화산파 제자들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사단이 일어났군.”

도통달의 말에 남궁설린이 물었다.

“이런 사건을 예상했다고?”

“꿈에서 봤다고 했잖아.”

“하아―! 넌 정말 사이비 교주 해야겠다. 어쨌든 우리도 서두르자.”

도통달은 달리는 남궁설린을 서둘러 따라붙었다.

“우리가 굳이 끼어들 필요 있을까?”

“화산파와 무당파, 황보세가는 무림의 모든 정파와 어떻게든 관련이 되어 있어. 원신방, 북사도련, 청혈도문도 사파의 기둥이고. 그 여섯 문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정사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어.”

“그럼 남궁세가도 참전을 해야겠군.”

“전쟁은 막고 봐야지.”

“네가 가서 어떻게 막으려고?”

“네가 막아야지.”

“잉? 내가 왜? 무슨 수로?”

“어떻게든 해 봐. 너 신기 있잖아.”

“이거랑 신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일각쯤 달리자 사방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앞을 막지 않았지만 피아를 구분하려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헉! 헉! 비도 오는데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궁설린을 따라오느라 전력을 다했더니 숨이 턱에 걸렸다.

공터는 갑자기 나왔다. 일부러 나무를 잘라낸 것처럼 우거진 숲은 사라지고 이백 명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것 같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백 명 정도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양쪽으로 갈려 있었다. 서로에게 적의를 날리고 있는 그들은, 숫자나 기세 어느 것 하나 상대에게 밀리지 않았다.

남궁설린이 도통달의 손을 끌더니 정파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도통달은 남궁설린을 따라가면서 공터 중앙에 놓인 시체 다섯 구를 봤다.

손에 병장기를 든 그들은 서로 싸우다 죽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팔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 작은 싸움에서 유일한 생존자일 것이다. 도통달은 걸음을 멈추고 남궁설린에게 물었다.

“저기 부상자는 누구야?”

도통달의 음성이 모기 날갯짓보다 작았기에 남궁설린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복장을 보니 원신방 같은데?”

부상을 입은 자도 그 부상을 돌봐 주는 두 사람도 검은 상의 왼쪽 가슴에 원(元)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사파 쪽은 청혈도문과 북사도련이고 정파 쪽은 황보세가와 화산, 무당파야.”

“안면이 있는 자들이야?”

“아니, 평소라면 모르지만 이렇게 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곳엘 오면, 자기 소속을 확실하게 밝힐 복장과 문양을 표시해. 그래야 서로 조심하니까.”

“그런데도 싸움이 일어난 거군.”

그때 고함 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닥쳐라! 우리 청명이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남궁설린이 속삭였다.

“청명은 아마 죽은 화산파 제자일 거야. 그리고 지금 소리를 지른 자는 화산파 장로인 황송운이야.”

팔에 부상을 입은 자가 항변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같은 사파 편을 드는 거겠지! 더러운 놈들!”

그러자 사파 쪽에서 고함이 난무했다.

“누가 더럽다는 거냐! 더럽기는 너희 정파가 더 더럽지!”

“양의 탈을 쓴 늑대 주제에 누구한테 더럽다는 거야!”

도통달이 남궁설린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말싸움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저번에 그 무림인들처럼.”

“아니, 이미 사람이 죽었잖아. 그리고 황송운이 저렇게 분개하는 걸 보면 청명이 제자 같아.”

아들 같은 제자가 죽었으니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그럼 우린 이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남궁설린이 슬그머니 뒷걸음치려는 도통달의 손목을 잡았다.

“해결하라니까 어딜 가려고?”

“왜 내가 무림 싸움에 끼어? 난 흑사회 건달이라고.”

“네 친구가 무림인이고, 널 좋아하는 여자가 무림세가 여식이잖아. 네가 위기에 빠지면 나나 오라버니는…….”

“알았어, 알았다고.”

그때 부상당한 자의 거친 고함이 쩌렁하게 울렸다.

“더러운 위선자 새끼들! 가지고 있지도 않은 만년삼황을 내놓으라고 검을 휘두른 자가 누군데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해! 북사도련의 우형과 청혈도문 백형은 날 도와주다가 저렇게 죽었다고! 이 개새끼들아! 다짜고짜 날 죽이려던 놈이 네 제자야! 이 씨X놈아!”

“저…… 저놈이 찢어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이 자리에서 명분의 우위는 사파에게 있었다. 유일한 증인이 정파의 비겁함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자는 땅에 떨어진 칼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내 입을 막고 싶냐? 당장 덤벼! 우형과 백형의 원수를 갚아야겠다!”

부상당한 자의 기백이 사파의 피를 들끓게 했다. 무기를 빼지 않았던 자들까지 손에 무기를 잡으며 금방이라도 정파를 향해 달려들 기세를 뿜었다.

정파 또한 가만 있지 않고 마주 무기를 뽑았다.

“내 오늘 죽더라도 너희 정파놈들의 위선을 낱낱이 까발려 주마!”

남궁설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떻게 좀 해 봐.”

“가만 있어 봐. 생각 좀 하게.”

하지만 남궁설린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도통달의 등을 밀어버렸다.

“어어!”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선 곳은 공터의 중앙, 시체 바로 곁이었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내가 정파를 향해 달려드는 길목이기도 했다.

“넌 뭐야! 이 새끼야!”

“잠깐!”

도통달의 목소리가 워낙 큰 탓에 부상당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멈췄다.

‘저 계집애는 진짜 대책 없다니까.’

속으로 남궁설린 욕을 한 도통달이 부상당한 사내에게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한산도…… 네가 내 이름을 왜 묻는 것이냐! 아니, 대체 넌 누군데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난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오.”

“뭐…… 뭐야?”

도통달은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훑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비 참 오지게 쏟아지는구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벤다!”

“물론 비켜드려야죠.”

옆걸음을 치던 도통달이 시체 한 구의 다리를 밟았다.

“어이쿠! 이런 실수가! 이분은 누구요?”

“옷 보면 모르느냐! 무당파 말코도사지!”

하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도장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무량수불. 재우는 내 제자요.”

“도장께서는……?”

“무당파 장로 영허라고 하오이다. 귀하는 뉘시오?”

“지나가던 사람이라니까요. 나이 드시니 귀가 어두우신가?”

무당파 제자들이 발끈했다.

“저…… 저 무례한 자가!”

영허도인은 나서려는 제자들을 막고 도통달에게 물었다.

“귀하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시오?”

“싸움이 나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자리겠죠.”

“잘 아시는구려.”

도통달이 씨익 웃었다.

“늦고 빠름의 차이일 뿐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 아니겠소? 그래도 재우라는 이 친구는 죽기에는 너무 젊군. 무공 약한 게 죄지. 쯧쯧쯧…….”

“재우는 무공이 약하지 않았소. 그 자질이 뛰어나 어린 나이에도 사형들을 뛰어넘었소.”

“맞소! 재우는 절대 이런 곳에서 저런 사파 떨거지들과 동귀어진 할 녀석이 아니었소!”

사파 쪽에서 ‘누구한테 떨거지라는 거야!’라는 고함이 터졌지만, 이전처럼 격렬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도통달로 인해 한껏 달아오른 분노가 조금은 식었기 때문이다.

도통달은 황보세가 무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럼 이 사람이 약했나?”

황보정욱이 나섰다.

“그는 황보세가의 운해당 당주였소! 황보세가 최연소 당주가 된 건 그 무공 때문인데 약할 리가 없잖소!”

“흠. 무당파와 황보세가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는 거군. 그럼 여기 화산파도?”

화산파 인물이 답했다.

“72 매화검수 중 한 명이었소.”

“그게 누군데요?”

“무림인이면서 72 매화검수를 모른단 말이오?”

도통달이 비에 흠뻑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무림인이 아니라서…….”

“네? 뭐, 어쨌든 화산 후기지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72명 중 한 명이라는 뜻이오.”

“흠, 그럼 여기 죽은 사파의 두 명과…….”

도통달의 시선이 부상당한 팔을 잡고 있는 한산도에게 향했다.

“부상을 입은 분도 사파에서 대단한 위명을 떨치시는 분이겠군요?”

사파 쪽에서 거친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나섰다.

“황조운은 우리 청혈도문에서 촉망받는 기재였소.”

그러자 북사도련에서도 노인 한 명이 나왔다.

“원조장은 북사도련에서 조장을 맡고 있소. 무공이 약하면 맡을 수 없는 자리요.”

“오오! 그럼 한형의 무공도 대단하겠군요?”

한산도가 우물쭈물하자 도통달이 사파 쪽에 대고 물었다.

“여기 원신방에 온 분도 계실 텐데 여기 한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씀해 주시겠소?”

서른 초반의 사내가 말했다.

“한산도는 원신방에서 촉망받는 인재요.”

“직급은?”

“평무사요. 하지만 그게 무공이 낮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오.”

“물론 그렇겠죠.”

도통달은 다섯 구의 시체 주위를 빙 돌면서 연신 ‘흠.’이란 소리를 뱉어 냈다. 이제 모든 사람의 시선은 도통달에게 모아졌을 뿐 싸우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구도가 나만 이상한 거요?”

정파 세 구의 시체와 사파 두 구의 시체는 서로 가까이 있었다. 정파 두 구의 시체는 엎어져 있고, 나머지 세 구는 하늘을 향해 누운 자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상한 건 나뿐인 모양이구려.”

그때 정파 쪽에서 제갈청이 나왔다.

“당신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제갈청은 마치 도통달을 처음 보는 것처럼 물었다. 제갈이라는 성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여자다.

“도씨 성을 가진 지나가던 사람이오.”

“무림에는 자신을 밝히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럼 도공자님이라고 부를게요. 전 제갈세가의 제갈청이라고 해요.”

“반갑소. 제갈소저는 이 시체의 어디가 이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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