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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독식 (87)화 (87/200)

기연독식 (87)

“아까부터 기척이 늘어난 건 알고 있어.”

하긴 남궁설린이 그런 걸 놓칠 리 없다. 그녀는 ‘살기도 장난 아니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걸리는 기척이 계속 늘어나는 것으로 총부락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두 사람이 뚝 떨어졌다. 나무 위에 있다가 뛰어내린 두 사람은 곧바로 창을 겨눴다.

“여기까지 적을 데리고 오다니! 제정신이냐!”

“족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다.”

“멍청아! 그게 이유가 돼?”

“적이 안 될 거라고 접마신께 맹세했다.”

“이족이 접마신을 어떻게 알아?”

“몰라. 어쨌든 저자는 알고 있었다.”

그쯤에서 도통달이 나섰다. 인질들보다 앞에 선 도통달은 먼저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족의 백성 도통달이라고 한다. 족장님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너희 부족민과 우리 이족민 포로를 교환했으면 한다.”

밀림 속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그들 외에는 더 이상 적이 없다는 신호일 것이다.

“너희를 죽이고 다 같이 머리 가죽을 벗겨 매달아 놓겠다!”

“그 전에 족장님께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려라.”

“너희들에게는 족장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

도통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게는 그걸 결정할 권한이 없잖아! 최소한 집수장에게라도 우리 방문을 알려야지!”

움찔 몸을 떤 녀석이 ‘네가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지?’라고 물었지만 도통달은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일각이 지나 그들은 전진할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포로로 잡힌 병사 여섯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양팔이 묶인 채 나무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칠성아!”

도통달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려는 송지봉을 잡았다.

“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오.”

도통달은 포로들을 살폈다. 축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호흡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았다.

잠시 후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나타났다. 머리에 갖가지 깃털을 꽂은 노파는 포로들 바로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노파가 도통달에게 잡힌 부족민들을 보며 물었다.

“인질 교환을 원한다고?”

“그건 부수적인 것이고 내 목적은 족장을 만나는 것이오.”

짓무른 눈으로 도통달을 보던 노파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부족민들이 포로들을 나무에서 끌어내렸다.

“깨워라.”

노파의 한마디에 부족민 둘이 허리에 찬 호로병을 포로들 입에 기울였다.

잠시 후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포로들이 하나, 둘 깨어났다. 몽롱했던 눈이 제 모습으로 돌아오고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칠성아!”

송지봉의 목소리를 들은 사내 한 명이 ‘십인장님!’하며 달려왔다. 창을 든 부족민들은 굳이 사내를 막지 않았다. 언제든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여섯 명의 포로들이 모두 이쪽으로 돌아오자 도통달도 부족민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포로 교환은 그렇게 간단히 끝났다. 도통달은 병사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싶었으나 날이 이미 어두웠다.

아무리 밤에 생존하는 방법을 알려 줬다고 해도 당장 돌려보내는 건 사지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우릴 여기서 돌려보내지는 않겠죠?”

노파가 듬성듬성 있는 이빨을 보였다. 웃음인데 기괴하게 보였다.

“밀림이 너희를 잡아먹을까 봐 두려우냐?”

도통달도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밀림의 밤을 두려워할 것 같소?”

“흠. 네가 그동안 봐 온 이족들보다 특별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럼 이제 족장님을 만나게 해 주겠소?”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목숨을 걸지 않고 밀림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소이다.”

“눈을 가려야 하는데 그래도 오겠나?”

“물론이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통달은 눈을 가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여기까지 무사히 왔고 포로까지 구했으니 도통달을 향한 병사들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순순히 안대를 받아들였다.

도통달은 부족민이 내민 막대기를 잡았고 같은 식으로 남궁설린과 병사들이 따랐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갑자기 얼굴로 뭔가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도통달은 손을 들어서 얼굴을 공격하는 걸 잡았다. 감촉만으로 노파의 지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호, 제법이군.”

“시험은 한 번뿐이길 바라오. 다음부터는 참지 않겠소.”

“클클클…… 마음에 들어. 사내가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이각 정도를 가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갑자기 시원해졌고 양쪽으로 불의 온기가 전해졌다. 바닥도 딱딱해서 동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굴을 한참 들어오고 나서야 노파는 안대를 풀게 했다. 여산족의 총부락이 동굴일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묘족은 밀림 한가운데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부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지하광장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지하광장 천장은 뻥 뚫려서 하얀 별이 촘촘하게 박힌 검은 하늘을 보여 주었다.

한쪽 길이가 칠십 장에 이르는 원형의 지하광장 벽에는 수많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의 개수만큼 밧줄이 늘어뜨려진 그곳은 벌집 같았다.

쿵! 쿵! 쿵! 쿵!

지하광장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선 수백 명의 부족민들이 창으로 바닥을 두드려 소리를 만들었다.

도통달이 남궁설린에게 말했다.

“환영이 거창하군.”

“환영처럼 보이지 않는데?”

“환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편하잖아.”

그들은 광장의 중앙에서 멈췄다. 움푹 들어간 그곳은 비가 내리면 꽤 많은 양의 물이 고일 것 같았다.

부족민의 창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심장 뛰는 것의 열 배쯤 되는 속도로 두드리던 창 소리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여인이다. 이 더운 여름에 가죽으로 된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고, 전신에는 온갖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검은 면사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모든 부족민이 그녀를 향해 엎드려 절을 했다.

노파가 부족장 여인에게 다가가더니 뭐라고 속삭였다. 너무 멀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있던 자리로 돌아온 노파가 도통달에게 물었다.

“부족장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를 얻고 싶소.”

“뭐라고? 그건 안 된다!”

“일단 부족장님께 물어봐야 하지 않겠소?”

도통달을 노려보던 노파가 부족장에게 가서 말을 전했다. 짧지 않은 대화 속에서 노파의 얼굴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씨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좋지 않은데.’

노파가 돌아오는 동안 도통달은 부족민을 쭈욱 훑어보았다. 대략 팔백 명 정도다. 물론 이 숫자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대화로 풀지 못하면 싸워서라도 고를 가져가야 하는데, 어쩌면 저들을 모두 죽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후에 선택해야 할 길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면 도통달은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조건이 있다.”

‘응?’

무조건 거절이 아니니 반가운 말이다.

“우리 부족민 한 명과 싸워서 이기면 네 제안을 거의 받아들이겠다.”

싸워서 이기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노파의 말에서 ‘거의’라는 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거의라는 건 뭐요?”

“그건 승리한 다음에 얘기하자. 그럴 리가 없지만.”

부족장과의 대화에서 노파가 마지막에 지은 웃음의 의미였다. 노파는 도통달이 이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파오랍 따!”

노파가 소리를 지르자 부족민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지상에서 십 장 정도 위쪽에 있는 동굴이었다.

“우워어어엉―!”

동굴 안에서 괴성이 울리더니 누군가 뛰어내렸다. 십 장 높이다. 경공의 고수가 아니면 최소한 다리가 부러지는 결과로 끝날 것이다.

광장에 횃불이 밝혀져 있다고는 해도 대낮처럼 밝지는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대한 원숭이인 줄 알았다.

쿵!

바닥에 떨어지고 허리를 편 후에야 온몸에 털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다.

몸뿐 아니라 얼굴에도 털이 가득했다. 사람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칠 척 거구의 사내는 어정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걷는 모습까지 원숭이와 비슷했다.

철심이 박힌 쇠몽둥이를 든 원숭이 사내는 도통달과 오 장 거리를 두고 섰다.

“난 단타부라다.”

사내가 말을 하자 사람으로 한 발짝 옮겨졌다.

“너에게 고맙다.”

“뭐가?”

“내가 널 이기면 부족장은 나와 밤을 보낸다.”

짧지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면도를 좀 하면 부족장과 밤을 보낼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을까?”

쿵!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돌조각이 튀면서 단단한 땅에 구멍이 파였다.

“내 외모를 놀리는 자는 죽는다.”

“미안. 열등감 같은 건 없는 줄 알았지. 싸움은 언제 시작하지?”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를 들며 ‘당장!’이라고 소리쳤다. 도통달이 칼을 빼자 단타부라가 땅을 박찼다.

놀라운 도약력이었다. 내공을 익혔을 리가 만무한데 무려 일 장이나 뛰어올라 도통달을 향해 쇠몽둥이를 내리쳤다.

도통달은 왼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쇠몽둥이는 한 자 깊이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저 공격으로 단타부라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건 확실해졌다.

우웅―!

단타부라의 쇠몽둥이가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타고난 신력이 대단해서 빠르기는 했으나 도통달을 맞출 정도는 아니었다.

허리를 숙여 피한 도통달은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단타부라의 허벅지를 벴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도통달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통나무를 벤 것 같았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아서 약간의 선혈만 비쳤다. 그 작은 상처에도 화가 난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마구잡이 공격이기는 했으나 워낙 빨라서 도통달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시험 삼아 칼로 쇠몽둥이를 막았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내공을 모두 사용해서 부딪치면 아마 칼이 박살 날 것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도통달은 허리를 쓸어 오는 쇠몽둥이를 피해 훌쩍 뛰어올라 단타부라를 넘어갔다.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로 단타부라의 어깨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공력을 확실하게 주입했기 때문에 칼은 제법 깊게 단타부라를 베었다.

“우아아아―!”

상처에 화가 난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를 휘둘렀으나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신력을 가졌다고 해도 무공을 익힌 무인을 상대로는 한계가 있었다.

단타부라의 상처는 늘어 갔고 움직임도 차츰 느려졌다. 도통달에게는 단타부라의 숨통을 단숨에 끊을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럼에도 가벼운 상처로 끝낸 것은 고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부족민을 죽이는 건 아무리 결투라고 해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단타부라는 온갖 욕설을 뱉으며 도통달을 공격했으나, 지금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 그만하지. 굳이 죽이고 싶지 않은데.”

“날 모욕하지 마라!”

도통달은 현격하게 느려진 쇠몽둥이를 피하며 말했다.

“너도 다른 원숭이…… 아니, 여자 찾아. 세상은 넓고 원숭이는 많으니까.”

도통달은 ‘아니, 여자.’라고 수정을 했지만 단타부라의 분노가 가라앉은 것 같지는 않았다.

“헉! 헉!”

온몸에 얹은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단타부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뒤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족에게는 절대 지지 않는다.”

뒤에서 나온 손에는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본 노파가 소리쳤다.

“단타부라! 멈춰라!”

하지만 단타부라는 병의 입구를 부순 후 내용물을 단숨에 마셨다. 놀라서 달려온 노파가 싸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끼윰을 마시다니! 미쳤느냐! 이 싸움은 무효다! 넌……!”

“비켜!”

피를 머금은 것처럼 눈이 충혈된 단타부라가 노파를 향해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노파에게는 저 쇠몽둥이를 버틸 힘이 없었다.

도통달은 노파 앞으로 달려가 칼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차앙―!

칼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면서 도통달과 노파는 한 몸이 되어 튕겨 나갔다. 깨진 칼 파편이 어깨에 박혔고, 칼을 박살 낸 쇠몽둥이는 도통달의 가슴을 때렸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훌훌 날아간 도통달은 땅에 떨어지기 직전 노파를 안고 몸을 뒤집었다. 등에 새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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