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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독식 (88)화 (88/200)

기연독식 (88)

바닥을 오 장이나 미끄러진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통달아!”

남궁설린이 달려오자 도통달은 품에 안은 노파를 넘겨주었다.

“일단 노인네 괜찮은지 봐봐.”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노파가 말했다.

“난 괜찮네. 왜 날 구한 것인가?”

“사람 목숨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윽!”

몸을 일으키려던 도통달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허리를 숙였다. 칼로 한 번 막지 않았다면 가슴뼈가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넌 비켜.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할 테니까.”

도통달은 나서려는 남궁설린을 잡았다.

“이 싸움은 내 거야.”

“하지만…….”

“발톱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호랑이가 원숭이 따위를 무서워할 수는 없잖아.”

“씨X, 맞는 말이네.”

노파가 말했다.

“싸우려 하지 말게. 끼윰을 먹은 단타부라는 평소보다 두 배는 강해졌으니까.”

도통달은 쇠몽둥이를 질질 끌고 오는 단타부라를 향해 섰다.

“두 배 정도로는 부족한데.”

어깨를 한껏 펴서 몸을 젖히자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진짜 괜찮은 거지?”

남궁설린의 물음에 도통달은 씨익 웃었다.

“나 항주의 붉은 호랑이 도통달이야.”

“그게 뭐?”

“뭐…… 그렇다고.”

피식 웃은 남궁설린이 어깨를 툭 쳤다.

“절대 안 도와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통달이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뛰어들 것이다.

“우아아아―!”

도통달은 고함을 지르며 뛰어오는 단타부라를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허리를 쓸어 오는 쇠몽둥이를 피해 몸을 날린 후 무릎으로 단타부라의 콧등을 가격했다.

바위를 친 것 같이 단단하고 묵직했으나, 그의 무릎은 바위도 부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타부라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도통달은 빙글 돌아서 내려섰고 단타부라는 뒤로 거칠게 넘어졌다.

끼윰이 뭔지 모르지만 대단한 약임에는 분명했다. 그 충격에도 단타부라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냥 누워 있어야 했다.

전력을 다하는 그때부터 이 싸움은 도통달의 지배하에 있었다. 도통달은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를 휘두를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장딴지를 찬 도통달은 중심이 낮아진 단타부라의 턱을 걷어 올렸다.

“이 새끼! 죽어!”

비틀 물러선 단타부라가 쇠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도통달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허리를 때린 도통달의 발은 어느새 가슴을 걷어찼고 얼굴을 짓이겼다.

정신없이 얻어맞는 단타부라는 자신이 쇠몽둥이를 놓친 줄도 몰랐다.

거의 일각 동안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지하광장의 모든 사람은, 사람이 누군가를 저처럼 빨리 때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결국 단타부라는 견디지 못하고 고목처럼 쓰러졌다. 끼윰이 아니라 끼윰 할아비를 먹었다고 해도 도통달의 매타작을 견딜 수는 없었다.

“자식, 덩치값 하네.”

도통달이 호흡을 가다듬는데 갑자기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여산족 부족민들이 지르는 함성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하게 승자를 축하하는 울림이었고 그 울림이 더욱 큰 것은 단타부라가 끼윰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노파가 도통달에게 다가왔다.

“끼윰을 먹은 단타부라를 이길 줄은 몰랐네.”

“이제 고를 주는 겁니까?”

“거의 됐네.”

자꾸 말하는 ‘거의’가 마음에 걸렸다. 노파의 시선이 족장에게 향하자 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자네는 오늘밤 족장님과 합방을 해야 하네.”

“뭐라고요?”

“합방이라는 우리말을 못 알아들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합방 얘기가 나오는 겁니까?”

“그것이 족장님께서 고를 주는 조건이네.”

도통달의 놀란 얼굴을 보고 남궁설린이 물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저기 족장하고 합방을 해야 고를 주겠다는데?”

“뭐야? 너하고 족장이 거시기를 해야 한다고?”

“그렇다는군.”

남궁설린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저 원숭이같이 생긴 계집애가 감히 수작을 부려!”

“면사로 가리고 있어서 어떻게 생긴 지 모르잖아?”

“뻔하지!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그럼 고는?”

움찔 한 남궁설린이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빌어먹을! 이렇게 비겁해도 되는 거야!”

남궁설린의 말 뒤로 노파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어떻게 할 텐가?”

만약 합방을 하지 않는다면 여산족을 모두 죽이고 족장을 협박해야 한다. 그래도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도통달이 자기 한 몸 희생(?)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몇 쌍이나 줄 수 있습니까?”

“자네 하기 나름이지.”

“저 하기 나름이라니요?”

“한 번에 한 마리네.”

“그게 무슨……?”

노파가 검지를 세워서 왼쪽으로 움직이다가 툭 떨어지는 형태를 만들었다.

“이거 한 번에 한 마리.”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뭐야?”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

“사정 한 번 할 때마다 한 마리씩 준대!”

“그게 무슨……? 뭐야? 왜 그런 흉측한 조건을 거는 건데!”

“강한 남자의 씨를 얻으려는 거지.”

“씨X! 차라리 내가 싸울걸!”

도통달이 남궁설린을 물끄러미 봤고, 남궁설린은 ‘왜?’라는 물음을 던졌다.

“관두자.”

한숨을 쉬는 도통달에게 남궁설린이 말했다.

“최소한 두 번은 해야 한단 소리네?”

한 쌍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남궁설린이 족장을 힐끗 봤다.

“저 원숭이하고 할 수 있겠어? 그거?”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이왕 하는 거 두 번은 꼭 채워야 해.”

“한 쌍도 불안한데.”

남만 이외에서 고를 키웠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고는 남만을 떠나서 살기 힘들다는 의미다.

그러니 죽을 때를 대비해서 여분의 고가 있어야 한다. 남궁설린이 도통달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오라버니 목숨이 걸려 있어. 그것만 생각해. 저 원숭이가 어떻게 생겼든 두 번은 해야 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도통달은 결국 족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노파도 함박웃음을 지어서 도통달의 결정을 반겼다.

“자네가 족장님과 합방을 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것이네. 자, 가세.”

“벌써요?”

“왜? 지금은 안 될 이유가 있나?”

“그게 아니라 마음의 준비라도…….”

노파가 음흉한 눈짓을 줬다.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자네 마음이 아니잖아. 흐흐흐…….”

도통달은 돌아서서 걷는 노파를 따라가며 물었다.

“저기…… 혹시 제 거시기가 준비가 안 돼서 거사(?)가 실패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자네가 제대로 된 남자라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족장님이 워낙 미인이거든.”

미의 기준이 다를 테니 의미 없는 장담이었다.

“그래도 혹시 자네에게 문제가 있다면 될 때까지 하든가 빈손으로 쫓겨나겠지.”

“되…… 될 때까지요?”

노파가 도통달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무어 그리 자신 없는 표정을 지어! 남자는 자고로 힘이지!”

노파가 팔뚝을 힘껏 세웠다.

*    *    *

도통달이 여산족 족장과 합방을 한다는 생각에 뒤숭숭해서 잠이 안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남궁설린은 바닥에 뒤통수가 닿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처럼 강행군을 했으니 피곤한 건 당연했다. 오랜만에 늘어지게 잠을 잔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동굴 밖을 보니 환한 게 날이 밝은 모양이다. 눈곱을 뗀 남궁설린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뻥 뚫린 천장에서 하얀 햇살이 광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자잘한 먼지가 하늘거리는 햇빛의 물결이 신비롭게 보였다.

그 광경에 감탄하던 남궁설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런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니지.”

이미 아침을 시작한 부족민들이 주변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잠에서 깬 병사들이 하나둘 동굴을 나오는 게 보였다.

“저…….”

황태민이 남궁설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백인장 황태민이라고 합니다.”

“남궁설린이에요.”

이름 외의 소개는 필요 없었다.

“도대협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처음 도통달을 따라올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아니, 불신의 골이 훨씬 깊었다.

하지만 밀림을 통과하면서 도통달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고, 어제 싸우는 것을 본 후에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흑사회 건달이에요.”

“네?”

“흑사회 건달이라고요.”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하하!”

남궁설린이 여전히 정색을 하고 있자 황태민이 ‘농담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네. 항주에서 도통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건달이죠.”

“흑사회 건달이 어떻게 남만에 대해 그리 잘 알고, 또 그리 강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황태민이 아는 건달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도통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일을 겪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황태민이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통달의 정체에 대해 얘기를 했다. 웃음 뒤에 경악하는 과정까지 황태민이 보인 반응과 똑같았다.

“그나저나 이놈은 아직까지 부족장과 자고 있는 거야?”

교미를 하다가 죽는지도 모르는 수컷 사마귀처럼 죽은 게 아닌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도통달은 그들이 아침 식사까지 마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설린은 왜 이렇게 늦었냐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꿀꺽 삼켰다.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반쪽이 될 수 있다는 걸 도통달로 인해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걱정스럽게 ‘괜찮아?’라는 물음부터 나왔다.

“네가 보기엔 어때?”

“안 괜찮아 보여서 물은 거야.”

“보이는 그대로야.”

“고는?”

그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였다. 그때 저쪽에서 노파가 흡족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나무 갑을 들고 있었다.

“밤새 즐거웠지?”

“뭐…… 그렇죠.”

“약속대로 이걸 주지.”

노파가 나무 갑의 뚜껑을 열어서 안을 보여 주었다. 검은색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남궁설린은 재빨리 애벌레 숫자를 셌다.

“네 마리?”

그녀는 도통달의 어깨를 토닥였다.

“밤새 수고했어. 네 번이나.”

그러자 노파가 나무 갑 아래를 서랍처럼 열었다.

“네 번이라니.”

서랍 안에도 네 마리의 애벌레가 꿈틀거렸다.

“암수 네 쌍이네.”

남궁설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도통달을 봤다. 도통달이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어.”

“넌…… 어떤 짐승인 거냐?”

*    *    *

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강행군이었다. 남궁설린은 말에 매달리다시피 가는 도통달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하루…… 아니, 한나절만 쉬자는 그녀의 제안을 도통달은 단칼에 거절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 남궁철현보다 도통달이 먼저 죽을까 봐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강철 체력에 체력만큼이나 튼튼한 정신력은 도통달을 산 채로 남궁세가에 도착하게 만들었다.

고 한 쌍은 도통달만큼 튼튼하지 못해서 오는 도중에 죽었다. 그래도 세 쌍이면 치료제로 충분했다.

도통달과 남궁설린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남궁철현의 숨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흑의가 곁을 지키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도통달은 남궁철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픽 쓰러졌다. 남궁설린은 도통달을 방으로 옮기게 한 후 흑의에게 가서 고를 건넸다.

“오오! 세 쌍이나!”

“원래는 네 쌍이었는데 오다가 한 쌍이 죽었어요.”

“여산족에게 고는 목숨만큼이나 귀한 건데 어떻게 이걸 네 쌍이나 얻은 거야? 설마 전부 죽이고 빼앗은 건 아니지?”

“우리가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는 못해요.”

“그럼?”

잠시 생각하던 남궁설린이 말했다.

“통달이의 거룩한 희생(?)에 의한 결과라고만 해 두죠.”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 나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서 좀 얻어 오게.”

남궁설린은 흑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 후 돌아섰다.

“한 마리나 얻을 수 있으려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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